세잔의 정물화 : 시각의 변주
세잔의 정물화 : 시각의 변주
  •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 승인 2022.07.26 2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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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점(多視點)의 그림에서 유연함을…

[대전=뉴스봄]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장 = 여름의 한가운데로 다가가면서 무더위도 강해지지만 간간히 비가 내려 더위를 식혀 주기도 하니 자연의 섭리가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비가 오고나면 밭의 풀들이나 채소들이 조금 과장하면 쑥쑥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키가 커지는 것에 놀라곤 한다. 비오고 나면 잡초가 걷잡을 수 없이 자라기도 하지만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등속의 채소들도 함께 자라서 풍성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굳이 움직여 다니지 않고 한자리에서 햇빛과 물과 땅속의 양분만으로도 이런 풍성한 잔치를 벌일 정도로 자기 몸을 키워 나가는 것을 보면 식물들의 왕성한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다. 봄에 수줍을 정도로 작은 이파리나 새싹을 조금씩 내보이던 모습에서 이제는 왕성하게 자신의 몸을 키우고 열매를 만들어 가는 계절이다. 이파리를 힘차게 키워나가고 꽃과 열매를 달아 나가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보면 경이로움과 외경심을 갖게 한다.

여름의 초록은 이른 봄의 여린 연두빛과는 달라서 당차고 힘 있는 진한 초록으로 자신을 물들인다. 이파리에서 풀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진한 초록색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생명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여름하면 농밀한 초록의 색감과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런데 작은 텃밭을 가꾸면서 알게 된 것은 멀리서 본 산의 초록이나 논밭의 초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멀리서 보면 산과 밭은 초록으로 가득한 듯이 보이지만 그 안에서 꼼꼼하게 살피고 가꾸다 보면 얼마나 다양한 색들이 향연을 펼치고 있는지 경이로운 감동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오이라도 아직 익지 않은 작은 오이는 연한 연두에서 시작해 진한 초록이 됐다가 조금 더 놓아두면 점점 노란색으로 변해가면서 초록에서 노랑 사이의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 옆의 토마토는 연두빛으로 시작해서 점점 초록으로 변하다가 붉어지고 나중에는 토마토 특유의 진홍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가지가 보여주는 향연은 또 얼마나 멋지게 눈을 호강시켜주는지 모른다. 연한 보라에서부터 검은색이 돌 정도의 진한 보라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보라색의 변주를 보여준다.

이것들을 종류별로 몇 개씩 따서 바구니에 담아 넣으면 그 색채의 조합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하다. 각종 열매와 야채들이 바구니 하나 가득 담기면 마치 자연이 정물화를 한 폭 그려 보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색의 조화가 자연스럽고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 낸다. 수확한 이것저것을 바구니에 담아 놓고 보면 그 안에서 형태와 색채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렇게 잘 그린 정물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백향기 作. 자연의향 30x30cm mixed media 2019.

정물화(靜物畵)는 영어의 still-life painting을 번역한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정물화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바구니에 담긴 오이, 가지, 참외, 토마토 등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가만히 있어서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물건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림을 보는 것과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실물이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림 속의 과일에 비해 훨씬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얌전하게 가만히 있는 고정된 물건들이 아니고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과 운동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구니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까? 끊임없이 빛과 교호하면서 색의 변주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반짝이는 빛을 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색들이 대비되면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약동한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난다.

고정된 물건들을 늘어놓고 이것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정물화는 17세기부터 본격적인 하나의 장르로 시작된 그림형식이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가 중심이 돼 본격적으로 그려졌다고 하는데 정물화의 시조라고 불리는 샤르댕을 거쳐 근대적인 회화에서 정물화하면 떠오르는 화가는 역시 폴 세잔(Paul Cézanne)이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교탁 위에 꽃병이나 이런저런 물건을 올려놓고 수채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이는 정물화를 미술교육의 중요한 요소인 색채, 빛과의 관계를 살피는 명암, 구도의 고려, 형태적 긴장감이나 안정감 등 통상적인 회화 기초교육에서 다룰 만한 내용들을 세잔의 실험적 정물화들이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바구니에 담긴 과일과 야채들의 절묘한 색이나 형태의 조화로움을 보면서 이것이 그냥 죽은 듯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폴 세잔이 떠 오른 것은 그가 그린 정물화의 원근법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투시도적 원근법과 전혀 맞지 않는 원근법 무시의 화법을 즐겨 사용한 화가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확립된 투시적 원근법은 어느 한순간, 어느 한 지점에서 보여지는 고정된 하나의 장면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래서 건축적 투시는 정면이 중요하고 정해진 소실점이 있으며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고정돼 있는, 확립되고 확전된 장면인 경우에만 성립하는 원근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물을 그렇게 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리저리 살피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아도 눈동자가 움직이며, 부분부분 보기도 전체를 조감하면서 보기도 하고, 조금 멀리 떨어져 보기도 하며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기도 한다. 고정된 장면이라는 게 정의되지 않는 것이다.

바구니에 담은 가지, 오이, 토마토, 참외, 고추 등속들이 뚜렷한 색과 형태의 대비를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장면으로 고정된 것으로 표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구니 속의 과일과 야채들이 그림 속의 고정된 대상과 다르게 보인 것은 아마도 과일과 야채들이 스스로 움직여서가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가 움직이고 이리저리 살피고 가까이 또는 멀리 보면서 스스로를 어느 한 지점에서 고정시켜 놓을 수 없는 것 때문일 것이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 조금 위에서 조금 아래에서 본 모습을 그냥 기존의 원근법에 매이지 않고 하나의 그림에 담는, 소위 다시점(多視點)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에서 유연함을 보게 된다.

세잔의 원근법 무시, 다시점의 그림은 우리가 항상 어느 한 가지 생각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고정된 것으로 경직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중심과 주변이 고정돼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 수 있고, 오늘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보면 그렇게까지 집착할 일이었나 싶은 일들도 많고, 어느 곳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라고 으쓱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조연이나 엑스트라이기도 한 일들을 늘 겪지 않는가?

바구니에 담긴 온갖 과일과 야채들이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한군데 머물지 말라, 상대적 가치를 바라보라, 다양한 시각들을 포용하라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여기 강둑에 있어 보면 다양한 그림의 모티프들이 막 떠오르는데, 같은 주제라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탐구해볼 만한 환상적인 것들이 떠오른단다. 이것들은 너무나 다양해서 앞으로 몇 달 동안 꼼짝 않고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른쪽을 보면 오른쪽대로, 왼쪽을 보면 왼쪽대로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된단다. (1906년 9월 8일 폴 세잔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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