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영웅’ 고(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전사 72주년 추모예배
‘6·25 영웅’ 고(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전사 72주년 추모예배
  • 육군영 기자
  • 승인 2022.09.22 17: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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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해군사령부 정보장교로 인천상륙작전 성공 기여
서울탈환작전을 위한 정찰 중 적 총탄에 맞아 전사
보훈처 관계자들이 ‘고(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를 추모하고 있다.

[대전=뉴스봄] 육군영 기자 = 6·25전쟁 참전유공자인 고(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전사 72주년 추모예배가 목원대학교에서 열렸다.

미국인 선교사 부부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한국이름은 서위렴(徐煒廉) 2세다. 그는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다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입대했다.

당시 22세의 젊은 나이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던 쇼 대위는 1947년 전역 후 한국으로 돌아와 현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미 군정청 소속으로 ‘조선 해양경비대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며 생도들을 가르쳤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이후 쇼 대위는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과정을 시작했으나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며 미 해군에 재입대했다.

그는 한국에 있던 부모에게 편지를 통해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다”며 “제가 흔쾌히 도우려 가지 않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선교사로 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심경을 전했다.

쇼 대위는 한국어와 한국의 지리에 능통했고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는 미 극동사령부 해군정보장교로 활동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이후 미 해병대에 자원, 5연대에 배속돼 서울탈환작전에 참전했다.

1950년 9월22일 오전, 적 후방정찰을 위해 녹번리(현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접근하던 쇼 대위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적 매복조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유엔군은 그가 전사하고 일주일 후 서울탈환에 성공했다.

쇼 대위의 한국 사랑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이성호 제5대 해군참모총장(당시 중령)과 나눈 대화를 통해 잘 나타난다.

그는 이 총장에게 “나도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한국 사람이다. 내 조국에서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겠냐”며 “공부는 내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전사 72주년 추모예배.
고(故)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전사 72주년 추모예배.

쇼 대위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충무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 은성무공훈장을 각각 추서 받았으며 국가보훈처와 목원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총 3000만원을 들여 목원대 채플 내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 흉상’을 건립했다.

그의 흉상은 2019년 12월 국가수호 현충시설로 지정돼 매년 그의 기일에 추모예배를 진행하고 있다.

대전지방보훈청 관계자는 “앞으로도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을 비롯한 6・25전쟁영웅을 알리는데 지속적인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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