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봉지 속에 담긴 정체성을 찾아라
비닐봉지 속에 담긴 정체성을 찾아라
  • 백영주
  • 승인 2023.02.04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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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빈 터크의 비닐봉지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 봄 대표 = 슈퍼마켓에 가서 “봉지에 싸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가장 자주 받는 검은 비닐봉지. 오랫동안 썩지 않아 환경파괴의 주범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휴대가 간편하고 무거운 짐을 담아도 튼튼하게 버텨주는 덕에 여전히 일상 속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잇 아이템(?)을 현대미술가들이 놓칠 리 없었다. 그중 제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개빈 터크의 ‘비닐봉지’였다.

진짜 쓰레기 봉지처럼 보이지만 채색된 청동 조각이다. ‘비닐봉지(Bag)’, 2000, 터크.
진짜 쓰레기 봉지처럼 보이지만 채색된 청동 조각이다. ‘비닐봉지(Bag)’, 2000, 터크.

영국 현대미술의 주역인 YBA의 대표작가 개빈 터크는 ‘비닐봉지’ 연작 이외에도 앤디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초상화, 말라비틀어진 사과, 항상 기발한 오브제들로 자신의 정체성과 예술의 가치, 이 세계에 대한 의문을 제시해 왔다.

그는 데뷔 초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1991년 런던의 왕립미술학교(Royal College of Art)를 졸업하며 ‘개빈 터크, 조각가, 여기서 작업하다 1989-1991’라고 쓰인 둥근 기념패 ‘cave’만 달랑 설치해 교수들로부터 맹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다소 건방져 보이는 졸업작품 때문에 이 대학 역사상 최초로 학위를 받지 못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그러나 본인은 이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대학시절이 막 끝났음을 알리는 동시에, 아티스트로서 이제 예술의 본질을 파고들 때가 왔음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이 작품은 교수들에겐 외면받았지만 미술계에선 단연 주목을 끌었고, 아트 딜러였던 제이 조플링의 눈에 띄어 YBA 중심작가로 도약할 수 있었다.

‘cave’, 2000, 터크.

개빈 터크의 ‘비닐봉지’는 보이는 것처럼 진짜 쓰레기 봉지가 아니라 채색된 청동 조각이다. 서구 사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선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가 ‘쓰레기 봉지’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불법으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를 자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버린다.

그래서 꽉 찬 비닐봉지는 소비주의 사회와 환경에 대한 관심의 부재, 그리고 변하는 개인의 충성도 등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청동조각은 실재에 대한 환영을 강조하고, 눈을 속이며, 과거의 미술, 특히 바로크 시대에 찬양된 트롱프뢰유 회화를 상기시킨다. 개빈 터크는 사람들이 버리는 것과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 우리의 문화를 정의한다고 믿는다. 이 작품으로 그는 미술관의 진지함을 비웃는다.

터크는 사람들이 익숙한 사물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왜 어떤 물건은 소중히 다뤄지고 어떤 물건은 경시되는지에 대해 고찰했다. 사실 어떤 미술품은 우상화되고, 다른 것은 무시되는 이유를 고찰하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였다.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술 작품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 작품을 지나갔다고 한다. 터크는 비닐봉지를 다양한 버전으로 제작하고 여러 미술관에 전시했는데, 대체로 무례하고 모멸적인 대접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기대한 것이었다.

‘비닐봉지’ 연작 이외에도 다양한 설치, 평면, 조각 작업을 통해 저자성, 진위성,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슈를 제기해온 터크는 현재에도 남다른 재치와 참신한 비주얼을 무기로 정체성, 팝 문화, 예술의 가치와 본질에 대해 신랄한 의문을 던지며 독특한 개념미술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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