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들여다보며 키우는 예술에의 깊이
‘나’를 들여다보며 키우는 예술에의 깊이
  • 백영주
  • 승인 2023.03.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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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고흐 作 ‘자화상’
고흐 作, ‘자화상’, 1889.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좋아하는 명언 중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면 100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승패를 가르는 싸움에서도 중요한 ‘나 자신 알기’는 철학은 물론 예술에서도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사물과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고 이를 자신만의 예술적 기준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화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자화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인 동시에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첨예한 형태의 예술인 셈이다.

화가들은 자화상을 그릴 때 대부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주로 화폭에 담아 정체성을 드러냈다. 혹은 렘브란트처럼 화려한 의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도 했다. 뒤러의 경우 1500년의 ‘자화상’에서는 예수를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본래 모습이 아닌 성인, 즉 예수의 이미지로 자신을 형상화해 종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뒤러 作, ‘자화상’, 1500.

 

고흐는 자화상에 렘브란트의 어두운 말년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 자화상처럼 자신의 독특한 심리상태를 반영했다. 후원자 겸 남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는 ‘스스로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야.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그의 풍경화보다 더 많아. 그 자화상들은 일종의 자기 고백과 같은 거지’라고 쓴 적도 있다. 그는 무려 43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중 1888년 고갱과의 교류를 기대하며 그린 ‘고갱을 위한 자화상’은 흔히 볼 수 있는 고흐의 자화상들하고는 확연히 다르다. 짧게 깎은 머리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야윈 얼굴은 옥색의 배경 덕에 더욱 튀어 보이는 느낌을 받는다. 슬프거나 우울한 것과는 약간 거리가 먼 묘한 표정이 고갱을 기다리던 설레는 마음과, 그가 오지 않을까 불안해했던 심리가 뒤죽박죽 섞여 있음을 알게 한다.

자화상으로 이미 고갱과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동거를 암시했던 것일까,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얼마 가지 않아 고흐가 귀를 스스로 자르고 정신병원에 스스로 입원하면서 고갱과의 관계는 파국을 맞게 된다.

1989년의 ‘자화상’은 그가 끊임없는 망상과 발작에 시달렸던 때 그려졌다. 정신병원에서 자화상이 6점이나 탄생했는데, 그중 가장 격렬한 감정을 표현한 이 그림에서 고흐는 평소 옷차림이 아닌 단정한 양복을 입고 있다. 작품에 주로 쓰인 색채는 옅은 청록색으로 고흐의 머리와 수염에 쓰인 주황색과 보색대비와 같은 효과를 준다.

이로 인해 주황색 머리카락은 더욱 강조됐다. 반 고흐 특유의 소용돌이 무늬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시기부터 주로 나타나며, 이는 그가 당시 겪고 있던 고통과 불안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갈색이 주를 이루는 초기의 사실주의적 자화상에서부터 인상주의적 색채와 기법을 거쳐 자기만의 개성이 돋보이는 후기작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쳐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는 단순히 렘브란트 등 과거의 화가들로부터 받은 영향에만 그치지 않고, 예술을 향한 강한 욕망의 발현이나 기대, 우울 등 심리적인 요소를 그대로 자화상에 담고자 했다.

그는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자신의 모습, 모든 다양한 자아를 샅샅이 그려내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의 상태로 예술의 초극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던 것이다.

고흐 作, ‘고갱을 위한 자화상’, 1889.
고흐 作, ‘고갱을 위한 자화상’,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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