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진짜 나쁜 여자, 들릴라
진짜 진짜 나쁜 여자, 들릴라
  • 백영주
  • 승인 2023.04.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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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주의 화가들의 수다] ‘삼손과 들릴라’의 배반의 장미
피터 폴 루벤스 作, ‘Samson and Delilah’, 1609~1610년, Oil on wood, 185 x 205.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다양한 사람, 문명, 문화만큼 많은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 그림, 춤과 노래로 전해져 오다가 문자 체계가 완성되면서 기록으로서 후세에게 전달된다.

15세기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활판 인쇄술로 근대 서구 문명에 큰 변혁을 가져다 줬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성경의 대중화다.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으로 서양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의 신과 인간의 수많은 이야기는 예술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과 소재를 제공했다. 물론 성경 속 여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구약 속 나쁜 여인의 대표로 꼽는 들릴라는 사랑을 무기로 이스라엘의 용사 삼손을 넘어지게 한 팜므파탈이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민족과 원수 관계에 있었다. 지리적으로는 이웃에 위치하고 있지만 당시 땅은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블레셋은 내륙 쪽 이스라엘의 땅으로 확장을 시도했다.

이러한 이유로 두 민족은 계속적인 갈등과 충돌을 겪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대표 인물인 삼손은 블레셋에 매수된 여인 들릴라를 사랑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원수지간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삼손과 들릴라의 결말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스톰 마티아스 作, ‘Samson and Delilah’, 1630년, Oil on canvas, 99 x 125.

삼손은 신의 특별한 선물인 용맹과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괴력의 용사였다. 그의 힘은 가공할 만한 것이어서 사자를 염소 새끼 찢듯 했고, 나귀 턱뼈만으로 천명과 싸워 이겼다. 이러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협이었고, 그가 존재하는 한 승산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삼손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머리카락과 여자였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은 삼손이 신에게 속한 용사라는 맹세였기에 이 맹세를 소중히 하지 않으면 그의 힘도 무용지물이었다.

즉, 머리카락을 지키는 행위로서 신에 대한 헌신과 괴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은 삼손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이보다 더 큰 약점은 들릴라의 사랑이었다. 자기 힘의 비밀인 머리카락을 원수의 여인에게 발설했으니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꼴이 됐다.

여자에게 약한 삼손도 삼손이지만, 들릴라의 지독함도 만만치 않다.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블레셋 사람들이 제안한 돈과 맞바꿨다. 네 번이나 삼손의 힘의 비결을 캐묻고 끝내 자기 손으로 그를 적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비밀을 지키려 한 삼손에게 들릴라는 말한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다뇨, 지금 장난하는 건가요?”

귀스타브 모로 作, ‘Samson and Delilah’, 1882년, Watercolor on paper.

그녀의 괴롭힘과 사랑의 번뇌로 고민하던 삼손은 끝내 굴복하고 말았고, 그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품에서 잘려나가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순간은 거장 루벤스와 마티아스의 그림 속에서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루벤스의 그림에는 억센 근육질의 삼손이 금발의 들릴라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잠들어 있다. 그를 내려다보는 풍만한 자태의 들릴라가 걸친 붉은 드레스는 사랑의 열정과 피의 파멸을 상징한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늙은 여인, 어둡고 사치스러운 배경이 사창가의 분위기를 연상케 한다. 이는 성적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한 들릴라의 팜므파탈적 면모를 암시한다.

루벤스는 17세기 유럽에서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화가다. 바로크 양식은 카톨릭의 위상을 선전하기 위해 웅대한 규모와 극적인 감정,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고전 미술, 문학, 신화, 성경을 주제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역동적인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의 ‘삼손과 들릴라’는 사건의 비극성에 침잠해 있지 않고, 풍부하고 다양한 색채로 생기가 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해 사실적 묘사기법을 추구한 카라바죠 화풍의 거장 마티아스는 등장인물들의 얼굴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촛불 하나로 불을 밝힌 어두운 가장자리 공간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배신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노파의 손동작과 사랑을 무기로 범죄를 저지르는 들릴라의 조심스러운 가위질은 아무것도 모른채 잠든 삼손을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아무리 아름다운 팜므파탈이라고는 하나, 들릴라의 표정은 수치심은 커녕 침착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모습이 삼손에게 앞으로 닥칠 운명과 극명하게 대조돼, 그녀가 얼마나 잔인한지 보여주는 듯 하다.

17세기의 두 거장이 요부 들릴라와 꾐에 빠진 삼손의 비극적 순간을 그렸다면, 19세기 화가 귀스타브 모로는 팜므파탈 들릴라를 표현하는 데 촛점을 뒀다. 낭만주의를 바탕으로 신화적인 주제를 관능적이고 불길한 분위기로 재창조한 모로는 당시 세기말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팜므파탈을 많이 그린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 속 들릴라는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세밀한 무늬로 짠 옷을 걸치고 있다. 이는 들릴라의 배신 자체보다 그림의 심미에 더 집중하게 한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作, ‘Samson and Delilah’, 1878년, Oil on canvas, 64.8 x 92.7.

잠들어 있는 삼손은 성경 속 묘사나 루벤스의 그림과는 달리, 여성의 몸과 큰 차이나지 않는 체구로 그려졌다. 이렇게 남녀의 몸을 거의 다름없이 그리는 것은 전통적 도덕과 관념을 거부한 태도였다.

말 그대로 무기력해 보이는 삼손을 점령하고 있는 들릴라의 시선은 오묘하면서도 대범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냉소적이고 신비로운 표정에서 모로 특유의 무기력의 아름다움(beauty of inertia)을 보인다.

초월적인 분위기의 모로의 그림과 다른 들릴라도 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그림에서는 삼손의 모습이 거의 화면 밖으로 밀려나 있다. 명실공히 들릴라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긴 머리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삼손은 잠들었고, 머리에 장식을 쓰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들릴라는 자신의 옆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곧은 콧대는 그녀가 미리 계획한 배반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의 시선과 눈 주위의 그림자는 한편으로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살며시 들린 들릴라의 손은 누군가를 부르려는 것인지, 가위를 집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번뇌하는 이의 손짓인지 모르겠다. 아마 이 모든 게 포함되지 않을까.

들리라는 끝내 자신을 사랑한 대가로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이 뽑힌 삼손에게 일말의 가책을 느꼈을까. 이 일이 있고 난 뒤의 들릴라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수 있지만, 성경은 들릴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삼손의 승리로 사건의 단락을 맺는다.

그녀가 벌을 받았는지, 사랑하는 남자를 판 돈으로 평생 별 탈 없이 살았는지, 아니면 또 다른 남자를 유혹하며 살았는지 알 수 없다. 여자 유다로 비교되는 들릴라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일말의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다.

비록 짧은 내용으로 등장한 들릴라였지만, 그녀는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림과 영화 속 팜므파탈로 영원히 자리잡았다. 오늘날 애욕과 돈을 따라간 요부의 상징이 된 들릴라는, 우리에게 양심과 도덕을 교훈하는 동시에 여자의 마성적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

“돈 앞에 장사 없다”, 가 아니라 “여자 앞에 장사 없다”가 들릴라의 계보를 잇는 팜므파탈의 모토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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