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은 희로애락을 싣고…
자화상은 희로애락을 싣고…
  • 백영주
  • 승인 2023.05.2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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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주의 롸가들의 수다] 렘브란트 반 레인_자화상
렘브란트 作, ‘자화상’, 1629.

[대전=뉴스봄] 백영주 갤러리봄 대표 =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바로 앨범을 보는 것이다. 아기 때부터 유치원에 들어갔을 때, 입학식, 졸업식, 소풍, 가족여행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우리는 사진으로 줄곧 남기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이를 초상화로 대신하기도 했는데, 대화가 인생의 분기점마다 자화상을 그려 그 족적을 남겼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부터 초상화로 유명한 화가였으며, 초기에는 연습을 위해 자화상을 그렸다. 거울을 통해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하고, 거지로 분장하기도 했다. 그는 요청으로 그린 그림은 자기 생각과 재능을 마음대로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면의 세계를 그리는 열쇠로 자기 자신을 택했다.

일생동안 총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으며, 빛의 화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자화상에서도 명암 기법이 돋보인다. 특히 1629년 그린 23세 때의 자화상은 별다른 효과 없이 명암의 강약조절만으로 인물의 감정까지 묘사해낸 수작이라 할 수 있다.

28세 때의 자화상은 옷의 주름과 질감 묘사에 초점을 맞췄으며, 30대가 돼 인생의 전성기에 도달했을 때는 귀족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그렸다.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같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영향이 구도에 반영돼 있다.

하지만 1656년에 파산을 겪으면서 소위 ‘잘 나가던’ 화가 렘브란트의 부유했던 생활은 종지부를 찍고 만다. 1658년의 자화상에서는 왕실의 복장을 입고 있지만 얼굴에 자리한 우울은 쉽게 가려지지 않는다. 생을 마감하기까지 10여년 동안 그는 자화상에 더욱 몰두했으며, 노년의 자기 모습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묘사했다.

마지막 해였던 1669년에는 두 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두 점 모두 고독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으며 냉소적일 정도로 사실 그 자체를 담고 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작품은 1967년의 X-ray 검사를 통해 그림 속에 2개의 펜티멘토(다른 디자인으로 이루어진 흔적)가 드러나기도 했다.

먼저 베레모의 크기와 색상의 변화로, 원래는 붉은색이 아닌 흰색이었고, 훨씬 더 컸다. 또 하나는 손의 원래 위치와 모양이다. 원래는 손이 모아져 있지 않고 붓을 들고 있었다. 손을 모은 상태로 다시 그리면서 붓을 없앴는데, 이를 통해 그림의 역동적인 힘이 줄어들었다.

파산 후 찾아온 경제적 위기와 더불어 아내의 죽음까지, 말년의 고통스러운 황혼기를 날것 그대로 그려낸 1665년의 ‘웃는 자화상’은 그동안의 사실주의적인, 균형 잡힌 초상화들에 비하면 붓의 터치도 거칠고 색채마저 단조롭다. 그럼에도 흐린 눈으로 자조하듯, 짙게 묻어나오는 웃음이 시선을 사로잡고 있어 그의 초상화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젊었을 때부터 부와 명예를 얻으며 승승장구했지만, 말년의 파산과 가족들의 죽음으로 고통받다 세상을 떠난 렘브란트의 삶을 우리는 자화상을 통해 볼 수 있다.

한창 승승장구할 때도 자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삶의 마지막엔 더욱 그 의지를 불태운 화가의 예술혼은 지금도 우리 앞에서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렘브란트 作, ‘34세의 자화상’, 1640.
렘브란트 作, ‘지팡이를 든 자화상’, 1658.
렘브란트 作, ‘63세의 자화상’, 1669.
렘브란트 作, ‘웃는 자화상’,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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