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화칠을 제대로 전승할 수 있기를…”
“채화칠을 제대로 전승할 수 있기를…”
  • 김창견 기자
  • 승인 2019.01.28 14: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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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독보적 거장의 재발견’ - 채화칠장 양유전 옹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이 옻칠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이 옻칠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대전=뉴스봄] 김창견 기자 = 우리나라 속담에 ‘조리에 옻칠한다’거나 ‘부러진 칼자루에 옻칠하기’란 표현이 있다. 소용없는 일 또는 하찮고 쓸데없는 일에 가장 공(功)이 많이 들어가는 옻칠을 최상급으로 대비해 표현한 말이다.

옻칠은 시간과 공력(功力)이 온전히 깃들여져야 비로소 진가를 발현하게 된다. 그래서 옻칠을 입힌 가구며 공예품이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간다는 주목(朱木)에 견주어 버금간다고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독특한 천연성분으로 인체에 이로움을 주는 옻칠은 방부성과 내열성·내습성이 탁월해 평범한 목재나 철기류를 수 대에 걸쳐 온전하게 보존되는 특별함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공을 떠나 은근한 깊이와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색채는 오로지 옻칠만이 지닌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옻칠의 가치에 빠져 오롯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옻칠이 전부’라는 명장(明匠)이 있어 옻칠의 가치를 재발견해 보고자 한다.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 그는 우리나라 정통 채화칠(彩畫漆)의 맥을 잇는 유일한 장인으로 홀로 우뚝 서 있다.

채화칠은 옻칠 위에 또다시 옻칠로 그림을 그려내는 고도로 숙련된 공력이 필요하다. 특히 옻의 특성과 칠에 대한 이해도가 축적돼야 진정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손길에서 한 호흡으로 피어나는 유려한 곡선과 사선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문양으로 그림으로 예술혼을 그윽이 담아내고 있다.

가히 칠(漆)이 있는 한 채화칠의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그.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이력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란 호칭이 없다.

이미 그로부터 사사 받은 제자들이 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올라 있는데도 그는 아직도 무관(無冠)이다. 무관의 거장이라는 칭호 아닌 칭호를 되뇌며 원주옻문화센터에서 그의 발자국을 거슬러 따라봤다.

자타가 채화칠장(彩畫漆匠)의 거장으로 공인하는 양유전(70) 옹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자타가 채화칠장(彩畫漆匠)의 거장으로 공인하는 양유전(70) 옹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채화칠의 대가 양유전 옹, 숙명처럼 접한 옻칠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옻칠 문화가 단절된 시기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원주산 옻이 동양권 최고품질을 지닌 것을 간파한 일본이 전량 수탈해 가던 시기다.

이어 값싸고 작업이 간편해 옻칠 대용으로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킨 캐슈도료가 판을 치던 1950~1970년대, 상대적으로 고가인 옻칠이 대중적으로 외면받던 시기도 옻칠의 전승을 더디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시기인 1967년 캐슈칠로 입문했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옻칠장인이라면 숨기고픈 부끄러운(?) 과거인데도 말이다.

그의 본향은 전통 공예의 본산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통영이다. 이곳에서 캐슈칠을 처음 배운 그는 우연찮게 부산에서 옻칠을 접하곤 온통 시선과 마음을 뺏겼다고 한다.

캐슈칠에 비해 은근하면서 품위와 무게감이 느껴지는 옻칠의 자연미와 오묘함에 매료됐던 그는 한달음에 캐슈칠을 때려치고 당시 옻칠의 독보적 대가였던 김봉룡 선생의 칠부(漆部)에 입문한다.

옻칠은 신라 때 당나라에서 들어와 제기용이나 궁궐에서 사용하던 귀하신 몸이었다. 특히 고려 땐 무관들이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 앞다퉈 장만하는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채화칠기는 단절이 되고 화려한 문양의 나전칠기가 더욱 발달하게 됐단다.

옻을 정제하고 나뭇결에 칠을 입히는 감동의 떨림이 익숙해질 무렵 그는 옻칠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채화칠을 복원해보리라 다짐하고 채화칠기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채화칠기는 옻칠에 안료를 혼합해 다양한 색을 만들어 칠면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낙랑시대 칠기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채화칠기의 맥을 하나하나 재현하며 우직스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그.

이로부터 50여 년 한길을 채화칠의 단절을 잇고자 열정을 불태우고 혼신을 기울여 이미 진즉에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옻칠을 아는 장인들의 정평이다.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격이 살아있는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의 작품.
화려하면서도 고귀한 품격이 살아있는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의 작품.

“후세를 위해 바로 가야 한다”

그의 작품에는 원주산 옻칠처럼 자연산만 고집한다. 중국, 베트남 등 값싼 수입 옻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옻은 국내외를 망라해 원주산만을 최상품으로 꼽기 때문이다.

작품에 임하는 장인의 자존심이려니와 도료로 쓸 수 있는 옻은 원주산이 유일하다는 실증에서다. 원주산 옻은 우루시올(Urushiol) 함량이 월등하다. 때문에 주로 식용으로 이용하는 옥천산이나 화칠(火漆) 또는 약용으로 사용되는 지리산 인근 옻 등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원주산 옻은 고가다. 4㎏ 1통에 약 280만원 정도다. 그것도 1년에 약 200㎏ 정도만 생산된다. 그래서일까 원주칠의 산증인들은 “옻은 사람 보고 사야 한다”고 말한다.

초기 원주에는 옻을 채취하는 사람이 대략 300여 명 정도 됐다고 한다. 그런데 이중 정직한 사람은 단 2명 밖에 없었다는 주지의 사실에서다. 원주산 옻에 단 몇100g의 수입 옻을 희석해 판다면 상당한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가 옻을 구입할 때 (정직한) 사람을 보고 하듯 그의 작품도 이러한 그의 고집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은 불문가지.

그의 작품은 단순한 공예 이상의 예술혼을 담고 있다. 특히 천문 지리와 우주관 등 철학적 가치를 우리의 일상에 펼쳐 놓는다. 최근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 천문도의 방위를 수호하는 주작, 현무, 백호, 청룡, 황룡을 그려 넣는 대작을 시작했다.

그는 보통 2~3년의 계획을 잡아 겨우 1점의 작품을 완성한다. 인고의 시간일 수밖에 없는 기간을 거쳐서 전세계에서 단 하나의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완성한 작품은 지난해 11월 중순 완성한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재현한 것으로 그림만 그려 넣는데 꼬박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그는 칠기의 계통도를 나전칠기는 손주뻘이고 칠화는 아버지뻘, 무문칠기는 할아버지뻘이라고 설명한다. 즉 무문칠기에서 칠화가 파생되고 칠화에서 나전칠기가 파생된 후 또다시 수많은 영역으로 파생됐다는 의미다.

단적으로 “칠(漆)이 없으면 나전칠기도 있을 수 없고 거꾸로 말하면 나전칠기는 장식에 불과하다”는 것인데, 실제 칠(漆)이란 글자는 옻 자체를 뜻하고 있다.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작품의 도안을 뜨고 있다.
채화칠장(彩畫漆匠) 양유전(70) 옹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작품의 도안을 뜨고 있다.

“죽기 전 명예만 돌려주오”

“배운 게 옻칠이라 한평생 옻칠만 했다”는 그. 웬만한 장인의 공력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채화칠장의 독보적 경지에 있으면서도 한가지 바람이 있다고 한다.

바로 후계자를 키울 수 없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재료부터 온전히 배워야 하는 칠의 특성상 도제방식이 아니면 가르칠 수 없는데 재정적 뒷받침이 전무하단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되면 재정적 지원을 받아 후계자를 양성하고 우리의 정통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데 제도권의 몰인식(沒認識)은 그를 방치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16년 전 정말 제대로 자질을 갖춘 제자가 있었는데 넉넉지 않은 살림에 다른 길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회한을 안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누군가 한 사람은 지켜야 하기에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며 재정적 어려움에도 묵묵히 정직한(?) 채화칠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저녁 무렵이면 지친 심신과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남들처럼 재료의 원가를 낮추거나 비교적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작업을 해보려는 것 등이 그것인데, 아침이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냐는 듯 또다시 올곧은 옻에 빠져 있기를 반복하곤 한다고.

“시대사조에 따라 전통(傳統)은 혁신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화가 바로 서려면 정통(正統)은 바뀌면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의 그.

올 연말쯤 채화칠의 진수(眞髓)를 보여줄 작품전시회를 계획하며 정통장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텨가는 그가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향해 단호하지만 나직한 울림을 던진다.

“죽기 전에 명예만 돌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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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8 15:17:14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계승 전수하고자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장인 정신을 존경합니다.
나즈막한 울림이 세상에 큰 울림으로 퍼져 나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