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최초 민주화운동, 3·8의거 인창원 유공자를 만나다
대전 최초 민주화운동, 3·8의거 인창원 유공자를 만나다
  • 육군영 기자
  • 승인 2020.03.08 1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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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과 부패에 저항하며 강산을 흔든 학생들의 메아리
- 대전에서 피워올린 4·19 혁명에 불씨를 찾아서
인창환 3.8기념관 건립추진 위원장.
인창원 3.8기념관 건립추진 위원장.

[대전=뉴스봄] 육군영 기자 = 대전지역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3·8 민주의거가 어느덧 환갑을 맞이했다.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8일부터 10일까지 대전고학생을 중심으로 대전상고, 대전여고, 대전공고, 보문고 등 고등학생 1600여 명이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를 규탄하며 진행된 학생운동이다.

대구 2·28의거,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으며 충청권 최초로 고등학생이 중심의 학생운동이자 대전지역 최초로 발생한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이에 정부는 2018년에 3월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으며 현재 당시 유공자들의 도움을 받아 3·8기념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60년 전 그날 대전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창원 3·8기념관 건립추진위원장과 만나 60년 전 그 생생한 현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 3·8 민주의거가 60주년을 맞이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지난 60년간 3월8일 아침이 되면 가슴이 떨리고 흥분이 된다. 그때의 상황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니 여전히 큰일을 앞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 3·8 민주의거는 어떤 배경에서 출발했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하던 자유당의 부정부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선거부정이 만연해 있던 시기였다. 자유당 강경파에는 일제식민지 시대부터 편승한 출세주의 인물이 많았고 권력과 밀착해 미국에서 보내는 원조금도 횡령하는 사례도 만연했다.

지역에선 일부 지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가난한 시기였고 대학교를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중간층이 없었으며 대부분 국민이 도시영세민, 저임금 근로자 등 고난한 삶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 시대상황이 있다보니 거기에서 나오는 불평등과 모순이 있었으나 먹고살기 바쁘던 시기에 제대로 된 시민단체 하나 없었고 유일하게 단체를 형성하는 조직이 학생들이었다”

- 3·8 민주의거의 전조는?

“항상 집을 같이 다니던 농구부 주장을 맡은 친구가 하나 있는데 이 친구가 6일날 갑자기 집에 같이 가기 힘들겠다고 언질을 주더라, 왜 그러냐 하니 대구에서 경북고학생들이 데모를 하는데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학생회 간부들에게서 나왔다고 고민하더라 그래서 언제 만나기로 했냐 물어보니 3·8일 날 맞춰 연습하기 위해 다른 YMCA랑 학교 학생 간부들과 만나볼 예정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막상 8일이 되니 어디서 정보가 새었는지 학생회 간부들이 전부 학교 앞 교장 사택으로 불려가 연금상태에 놓이게 됐다”

- 계획한 학생들이 잡혔는데 어떻게 추진할 수 있었나?

“3·8일로 날짜를 잡은 이유가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야당대동령 후보였던 ‘장면’이 선거연설회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아침부터 반장 부반장이 연금되고 3학년 선생님들이 출입문 앞뒤를 막고 감시를 시작했는데 남은 학생들이 의기투합해 전 교실에 사발통문을 돌렸다. 5시 시작종이 울리면 다 함께 뛰쳐나간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양수희라는 친구도 2층에서 청소할 때 쓰는 양동이를 밖으로 집어 던질 테니 그걸 신호탄으로 뛰쳐나가자고 이야기를 했다.

5교시 시작벨과 함께 물이 든 양동이가 떨어지면서 유리창과 문으로 학생들이 다 뛰쳐나오기 장관이더라, 교문에 도착하니 자물쇠가 잠겨있는데 학생 300명이 구령을 맞춰 두 번쯤 밀어붙이니까 순식간에 열렸다.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 거리에서 외쳤던 구호 중 기억나는 내용이 있는지

"그때 외쳤던 구호가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마라, 정부기관지였던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결사반대한다, 학원의 자유를 달라 이렇게 3가지 정도였던 기억한다"

- 의거는 어떻게 전개됐는지?

“대전공설운동장에 거의 다 도착하니 이미 경찰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진압봉에 총까지 있더라 거기서 학생들이 맨손으로 정면을 돌파하려 해서 첫 육탄전이 벌어졌다.

서로 치고받고 개머리판과 곤봉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는데 당시 한 친구가 경찰들에게 밀려 논두렁에서 인분통으로 빠졌다. 그래서 경찰들이 멈칫멈칫하는 틈을 타 인동으로 우회했다.

일부 학생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톱밥에 들어가거나 다른 가정집에 도움을 받아 숨기도 했는데 나는 도청으로 가기 위해 선두에서 원동네거리를 통해 중앙시장으로 갔다.

그런데 소방차가 길을 막고 콜타르를 뿌리더라 가까스로 돌파해 목척교에 도착하니 거기서 기마경찰이 나타났다.

당시 몸이 약한 친구가 있었는데 개처럼 머리를 잡혀 질질 끌려가더라. 김대덕이라는 친구가 경찰을 넘어트리고 그 친구를 구했는데 그걸 본 경찰이 독이 올라서 악을 쓰고 덤벼들어서 결국 빠져야 했다”

- 어떻게 됐나?

“우리는 학교로 돌아와 시위를 계속했고 경찰에 잡힌 80여 명은 그대로 붙들려 갔다. 어느정도 정신을 차린 뒤에 잡혀간 애들을 구하러 나가려 했는데 선생님들이 만류했다. 책임지고 데려올 테니 다치지 말고 학교에 있으라고 설득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학교에 남아 연좌 농성을 이어갔고 3월10일에는 다른 학교들도 참여해 대전경찰서 등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이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창원 위원장은 아직도 그날의 함성과 설레임이 손에 잡힐듯이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인창원 위원장은 아직도 그날의 함성과 설레임이 손에 잡힐듯이 느껴진다고 회고했다.

- 지금과 달리 정치에 관한 관심이 매우 높은 것 같다.

“고등학생이 혁명이 단초가 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케이스인데 앞서 말했듯 다들 먹고살기 바쁜 시절에 유일하게 조직을 이루고 있는 것이 학생뿐이라는 점도 있었고 당시 대전고는 시험을 쳐서 선발되는 일종의 엘리트 집단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쓰지 못하면 민망해서 품속에 숨기고 다녀야 할 정도로 교육열도 뜨거웠고 매일같이 신문에서 정치에 대한 문제점을 쏟아내니 여기에 학생들도 무엇이 문제인지 항상 고민하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 3·8기념사업회에서 중책을 맡고 계시다. 앞으로의 계획은?

“우리가 세상 떠나기 전에 우리의 정신을 이어가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게 최종 목표다.

대전의 3·8이 대구의 2·28이나 마산의 3·15의거에 비해 상당히 늦게 조명을 받았다. 기념회 설립이 아직 20년이 안 됐고 유공자라고 5명 남았던 사람도 세상을 떠나고 있어 추진에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우선 기념관을 빨리 설립해 거점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금년에는 설계비 6억3000만원을 반영해 용역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부지선정과 관련된 간담회가 예정돼 있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

건물에는 지역주민의 편의시설을 포함한 4층 정도 건물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어린이들이 민주주의를 한눈에 배울 수 있는 편의성이 높은 휴식공간, 아카데미 토론장과 교육시설 등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리고 교육청과 함께 3·8민주의거에 대한 교육과 홍보도 병행할 계획인데 구체적인 내용이 확정되면 말씀드리겠다”

- 오늘날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청년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해방 이후 6.25를 겪으면서 매우의 빈곤한 시대의 청소년기를 보냈으나 서로를 위하며 문제가 분노하는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입시 위주의 교육만을 받는 청소년을 보면 보기에 안타깝다. 학교는 학생의 인성을 닦는 데 집중하고 학생은 불의에 뜨거운 가슴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줬으면 한다. 3·월8일 우리가 보여주고 싶었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러했듯 말이다”

인창원 유공자는 인터뷰를 통해 60년 전 그날의 젊은 청년으로 돌아간 듯이 보였다.

대전고등학교 3·8 민주의거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1960년 3월8일 순정한 정의의 함성이 침묵하던 강산을 흔들어 깨워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하였으니 그 의기가 높고도 장하다.

여기가 거쳐가는 대능의 젊은이여!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아는 그날의 용기를 되새겨 항상 깨어있어라’

3·8 민주의거 기념비.
3·8 민주의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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