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抱石) 그는 왜? 돌을 가슴에 품었는가(1)
포석(抱石) 그는 왜? 돌을 가슴에 품었는가(1)
  • 류환
  • 승인 2020.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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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 조명희 선생의 선구자적 시대정신에 비친 예술혼 (전편)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포석(抱石), 조명희 그는 왜 돌을 끌어안고 가슴에 인감(印鑑)했는가?

아호(雅號)에서 보듯 그는 왜 단단하고 무겁고 차디찬 무지의 돌을 가슴에 묻었는가?

낭만의 시선에서 프롤레타리아 부로주아의 이념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망명하듯 넘어선 소련에서 왜,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어둡고 습습한 감방에서 총살형을 당해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까지 속살을 찢어가며 그는 왜, 이빨을 깨물고 정수리에 고통스런 돌을 꽂았는가?

충북 진천 벽암리 수암마을, 생긴 대로 그리움만 촘촘했을 산지(山地).

전통 유림 양반집의 4남3매 중 막내로 태어나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신명소학교를 마친 철부지 14살,

서울 중앙보고에 진학해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22살 때 일본에 의해 국권을 잃은 슬픔과 각박한 식민지의 현실을 가슴에 품고 고뇌에 찬 문학청년의 열정과 이상의 도약으로 비상을 꿈꾸던 작품이 지상에 발표되기 시작한 25세,

3·1운동에 가담해 대한독립을 부르짖다가 왜놈들의 총칼과 군화발에 채는 민족 수난을 맨몸으로 저항, 얼마 간을 투옥하다 출옥 후 27세에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르지만, 가난을 버티지 못하고 생활고를 참다못해 졸업을 앞둔 30세에 귀국,

<시대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글쓰기와 작품들을 본격적으로 발표하면서 많은 창작물을 남기던 1928년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하고 그다음 해인 35세가 되던 포석은 홀연히 러시아 해삼위로 망명길을 떠나 륙성촌에 거주하며 조선어교사로 또 한글신문 ‘선봉’의 편집일을 하며 소련작가동맹원으로 연맹하면서 다양한 작품들을 지면에 발표하다가 1937년 가을, 소련기관원인 비밀경찰요원(KGB)에게 체포, 이듬해 5월 하바로프스키 감옥에서 44세에 남몰래 총살형을 당하고 쓰러져 눈을 감는다.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그의 나이 44세를 손가락으로 헤아리다 현기증같이 어지러운 그래서 숨을 고를 수 없이 헤집은 짧은 인생은 무엇이 그의 뼈에 각인토록 하고 가슴에 새긴 돌을 자신 앞에 왜, 세웠는가?

수많은 작품을 통해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그의 업적과 궤적에 드러나 보이는 서슬 퍼랬을 불행에서도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계급사회운동의 전개를 지식인으로서 아니 시대정신이 이끈 선구자로서 인도주의와 궁핍한 현실 고발을 체감하며 실천해 항일영웅 59인에 혁명가로 입증되고 있는 바,

그의 삶과 문학과 선구자적 의식으로 불꽃보다 뜨겁고 강물보다 깊은 삶을 사는 동안 남들보다 더 뜨거운 피톨들이 가슴 속 심장에 휘돌았을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마감하기까지 날 선 억새 잎도 할퀴듯 눈자위를 부릅뜬 포석의 천리안적 혜안은 무엇을 보려 했었는가?

들어가기에 앞서

상위의 글은 필자가 조명희 문학관에 들렸을 때 느낀 감회를 산문의 형식을 빌려 기록해 뒀던 내용들로 언젠가 연구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인물로 문인이자 의인이었다.

그래서 다소 여유로운 시간이 되면 자료를 모으고 발간했던 작품집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을 때 더 치밀한 내용 속으로 접근할 계획을 마음속에 세우고 있다가 생활에 쪼들리고, 시간에 밀리고,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이것저것 꼼지락거리다가 훌쩍 시간이 지나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우한시장의 전염병이 나돌기 시작한다는 소식에 모든 회의와 모임 또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일상을 멈춘 듯 마비되고 침묵돼 여지가 되는 이쯤 메모장과 리플렛을 꺼내 보면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대전펜 문학기행 시 아물아물한 기억, 수면 깊이 가라앉은 듯 떠오르는 데자뷰의 감각을 살려 그때 적어놓았던 메모장과 리플렛을 들여다보면서 ‘포석 정명희’라는 생경함을 상기해 선생의 사진들과 여러 자료 또 그분을 기리는 포석문학회가 입구에 진열해 놓았던 안내문을 읽어보면서 선생의 진면모에 촉각이 곤두서는 감흥으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선생을 훌륭하다’라는 생각보다 대단하신 대문호로 또는 의인으로서 자료들을 펼쳐보는 내내 흔들리는 감정을 진정시키며 입력해 놓은 시그널을 확장하고 시놉시스를 펼쳤다.

그로 받은 적잖은 문학적 충격을 통해 비로써 깊은 감동과 함께 선생의 발자국에 시선을 고정하게 됐었고 가급적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입각해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돌이켜 보건대 문학관에서 처음 선생의 기록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그때와 같이 제일 먼저 필자에게 궁금한 것이 아호(雅號)였다.

까닭은 예나 지금이나, 선비 혹은 예인들에겐 두인(頭人)을 이름 앞에 붙이는 이유를 중요시 여겨왔고 거기에는 본인의 대표성을 상징하는 뜻이나 의미를 부여하고 피력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하는 누구나 작가의 의도와 일치해야 하는 운명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 시 하기에 더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름의 앞 문턱에 자리를 잡는 아호를 내의에 해석되도록 해 안내자 역할과 함께 소원, 미래, 희망, 이상, 반영 등 여러 역할을 하는 내적인 신조가 되기 때문이다.

옛부터 호는 조심스러우며 소중하게 다루어져 함부로 짓지도 안했거니와 어느 정도 수준이 돼야 비로써 스승이나 대가 계열에 계시는 선생한테 정중히 아호를 내려받아 이름 앞에 붙여 사용해왔다.

그래서 필자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 부분부터 풀어간다면 다소 도움이 되겠기에 출발점으로 삼고 그 이유가 궁금해 포석 조명희 문학관에 전화를 걸었다. 서너 번 전화 끝에 마침 아무 일면식도 없는 어느 분과 20여 분 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문학박사이자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라고 밝히며 2006년도 처음 선생에 대한 ‘포석 조명희씨에 나타난 고아의식 소고’라는 논문을 발표한 ‘강찬모 교수’라고 했다. 필자는 잘됐다 싶었다.

“포석(抱石)의 아호에 대해 알고 싶었다”, “누가 지었고 어떤 연유로 사용하게 됐는지”를 묻자 김 교수는 “본인이 알기로는 포석(抱石)이라는 아호는 자신이 스스로 본인에게 붙인 아호라고 알고 있다”며 “그 외에도 적로(笛盧, 갈대 피리라는 뜻으로 불렸다고 함)라는 포석 조명희의 필명과 목성(木星, 나무 위에 떠있는 별), 포석(包石, 쌀을 쌓아 놓은 돌) 등 서너 개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가장 많이 쓰이고 사용되는 호는 역시 포석(抱石, 돌을 끌어안은 뜻) 이다”라고 말했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궁금증은 해소됐으나 왜 포석이라 했는지는 여전히 의구심으로 남는다. 더욱이 그 돌은 상징적인 것일까! 육체적인 것일까! 아니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무기로 등장되는 돌일까! 또 모든 걸 수용하고 포용한 침묵의 돌이었을까! 하는 의문의 꼬리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미 세상에 없는 분에게 물을 수도 없으니 마음속으로 단념하고 다음 글을 이어 전개하고자 한다.

국제PEN문학 대전시위원회 문학기행

2018년 10월3일 가을 햇살이 조용하고 따듯하게 드리워지는 정오 쯤 이었다.

포석문학관에 도착한 국제PEN문학 대전위원회 회원들이 맨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거대한 문학관과 포석의 조각상이었다.

문학관이 세워진 그곳은 포석의 고향으로 포석선생이 살던 벽암리 뒷동산이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공원의 이름도 선생의 아호를 붙어서 포석공원으로 명명했다고 했다.

문학관은 말할 것도 없고 공원 중앙 입구에 역동적이고 거대한 금방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힘차고 위용 있는 입상의 부론조의 조각 동상이 하늘 높이 우뚝 서 있어 바라보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여타 문학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으로 대개는 흉상(상반신)으로 좌대를 만들어 기념하거나 기념비 성격의 시비 정도로 소박하지만 당당하게 위치해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술 분야 중 조각에서는 두상, 흉상, 좌상, 입상 등이 있음)

그러나 포석 선생의 입상의 전신조각상 제작 같은 경우는 드물게 보는 조각상이었다.

펜 문학 일행들은 탄성을 자아내며 경의를 표하는 이도 있었고 몇몇은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또 몇몇은 고개를 위로 들고 동상을 우러러보다가 문학관 내로 들어가고 있었지만 필자를 한참을 아주 가까이 또는 멀리서 위치를 바꿔가며 오랫동안 동상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을 스케치하고 머릿속에 하나둘 입력해 가며 사진을 찍고 보관하고 있어 지금도 선생의 부론조 입상 전신동상 사진이 카메라 메모리 칩 전자회로 속에 잠들어 있다.

당시를 회상하며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열고 들여다봐도 양팔을 힘차게 벌려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서서 응시하는 그의 찬란하고 웅장한 기상은 마치 하늘을 향해 금방이라도 박차고 비상이라도 할 듯싶었다.

황동 빛으로 번쩍이는 얼굴과 활짝 펼친 양손 그리고 맨발로 커다란 돌을 딛고 서있는 이유를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돌을 품은 상징처럼 커다란 돌을 디디고 두루마기가 바람에 휘날리듯 펄럭이는 자태는 순간 무거운 전율과 감동으로 온몸을 휩싸이게 했다.

서 있는 모습에서 동상은 바람에 나부끼는 형태이고 위풍은 지난 과거 흔히 우리 조상들의 모습과 흡사히 조각해 필자의 입장에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친근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포석 조명희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선제적 입장

우선 맨 먼저 그날 전신조각 작품의 형상을 자세히 보고 느낀 선재적인 입장부터 밝힌다면 필자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싶다.

조각의 제작자(조각가)는 아마도 선생을 시대적 배경과 환경 등을 짚어가며 두루마기를 입었을 것을 예상해 그 모습에서 당시를 고려해 고향에서 친구들과 어울릴 적 자주 입었을 두루마기를 상기해 선택했을 것이라는 게 우선 맨 처음 들었던 선입견이다.

이유는 가장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대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고 낮 설은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헤아려 어려 의미를 부여한 제작자의 마음도 큰 작용을 했으리라는 점과 더욱이 가족이라든가 주변인들의 생각도 그러하고도 남음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활짝 펼친 손과 맨발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펼쳐진 큰 손으로 표현하고 이미지를 극대화해 반가움과 받아들임, 모든 것을 내려놓음, 또는 우리 조국, 우리 강산을 우상화하는데 떠 바침을 묘사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맨발은 가고 싶은 고향 그 살갑던 생거진천(生居鎭川)과 조국을 연상해 바쁘고 멀리 가야 할 길이기에 서둘러 차마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서 있는 모습, 혹은 창공을 날아오르는데 불필요하다고 생략한 작가의 의도가 다분하게 견인돼 제작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조각부분 마지막에서는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엇인가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는 듯이 황금빛 표상은 조각상의 제작년도와 동상의 주인공 또 제작자 등을 알리는 청동에 새겨 붙어 떠받치고 있는 대형 좌대와 그 위에 2중으로 돌로 만든 기러기 상의 석(石) 좌대 또 3중으로 돌덩이를 맨발로 디디고 있는 거대하고 웅장한 조화들이 균형미를 한층 가미시키며 입체감을 이루고 있는 조형물이었다.

포석은 무엇 때문에 시간이 흐른 나중 먼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소멸될 때 까지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고 생각에 젖어있을까?

부릅뜬 눈은 무엇을 응징하기에 또는 회상하기에 사계를 잊고 맨발로 서있을까? 하는 의구는 추론컨대 민족의식에서 용솟음치는 굴욕적 수난기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의 식민통치와 소련에서 비밀경찰요원(KGP)에게 체포, 사형을 당한 것과 동시에 1925년도에 결성된 카프(KAPE) 프로문학운동 전개를 떠올리며 뛰는 심장을 짓누르는 감정을 청동으로 감싸 안고 있는 모습들을 동일시에 그려 넣은 것은 아닐까 관망된다.

본론으로 글쓰기에 앞서 동상에서 기러기가 떠바치고 있는 모습에서 필자의 눈에 비친 그 이유를 넌지시 알 수 있을 것도 같기에 간략한 글 중 몇 구절을 옮기며 이어간다.

-‘낙동강’- 작품 일부 중에서

“기러기가 떴다.

가을바람 부누나.

갈꽃이 나부낀다.”

-<중략>-

이 노래는 약 92년 전에 포석 선생이 쓴 소설 ‘낙동강’이란 작품 중에서 밝힌 내용으로 누구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탄식이 섞이고 한이 서린 노래 중 한 구절쯤으로 여겨진다.

나라를 잃은 슬픈 절망의 세상 속에서 자신 스스로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오랫동안 꿈을 꾸다가 낙심하지만 허망이 아닌 희망을 노래하고 이를 희구하며 기원하던 세상, 그런 이상과 꿈을 현실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런 고향의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것으로 읽힌다.

여기서 가장 먼저 떠 올리는 장면은 기러기의 연출법이다. 기러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기러기가 떴다’라는 의식에서 평범하지 않은 표현법이 드러난다. 누구나 어느 쪽이든 ‘기러기는 날아간다’로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글을 보자마자 필자도 당시 국민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멀리 멀리, 날아라, 우리 비행기”라는 우리가 많이 불렀던 ‘비행기’란 동요다.

이 부분에서도 주지하다시피 비행기가 날은 다보다 비행기가 떴다가 자연스런 표현이다. 그러나 포석 선생의 머릿속을 스친 것이 ‘기러기’는 이런 여유에서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순간적인 메타포의 묘사이다.

기러기라는 피사체를 본 선생의 시선에선 비유를 빌어 연상작용을 유도해 ‘떴다’라는 유효성과 자유라는 상상의 의지를 귀결, 희망을 내포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으며 이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여 개념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대상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이를테면 기러기의 자유로운 비상과 거칠 것 없이 창공에 펼쳐진 하늘을 직관적으로 개념화하는데 일관성을 찾고 있다고 판단돼 지며 ‘가을바람 부누나’에서도 자유라는 적절한 연상작용을 이 부분에서도 유도하고 있어 자유의 몸을 염원하는 감성을 전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람이 갖는 특성이고 이 또한 전달의 매개체로 차용돼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의지를 내포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다음은 ‘갈꽃이 나부낀다’라는 부분이다. 갈꽃이라면 가을 꽃 일수도 있고 갈대꽃이라든가 억새꽃 들을 상상할 수 있다.

계절적으로 보면 아마도 늦은 가을쯤으로 해석돼 지는바 자연의 풍광을 저 멀리 바라보며 현실적인 비애와 자신이 처해있는 절망감과 조국애의 상실감들을 표출하고 있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이를 돌아보는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사무치고 외로우며 고립되고 쓸쓸한 처지에 처해 있는지를 먼 자연을 응시하고 있는 정황과 심정을 드러낸다.

선생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파란만장한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본인의 업적과 궤적에서 드러나 보이는 일제 강점기의 불우했던 식민지의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사회의 전개를 지식으로써 철저히 실천해 이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삶과 문학과 선지적인 의식을 통해 불꽃 같은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마감한 포석은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우리는 선생을 보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젊은 나이에 쫒기 듯 삶을 사는 신세로 수만리에 있으면서 동경하고 그리워하던 고향과 조국애로 점철돼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 27세,

포석은 어떤 세계관으로 푸르른 이상을 꿈꾸고 그리워하며 상념에 잠겼었을까? 지금부터 포석 선생의 삶과 문학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형식들을 비춰 선생의 발자국을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조명희 문학의 혁명적 낭만주의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1894~1938년)는 민족수난기를 온몸으로 살면서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문학 사이를 오가는 총체의 궤도를 그리면서 문학적 역량과 민족애의 의협심으로 다방 면에서 자신의 족적에 수많고 선명한 선 굵은 자국을 짚게 남기게 된다.

동학혁명이 불타오르던 1894년 여름, 진천에서 태어나 1938년 ‘일제의 첩자’ 라는 누명을 쓰고 하바로프스키 감옥에서 총살형을 당하기까지 희극, 시, 시조, 소설, 수필, 논설 등 전체적인 장르를 문학을 빌어 지상에 발표한다.

포석에게 있어서 시를 발표한 ‘짓밟힌 고려’, ‘10월 노래’ 등과 같은 특색 있는 시편들과 1930년 발표한 8편의 동요를 포함, 1923년 초에 리얼한 자전적 소설 ‘땅 속으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서 시선을 끈다.

1924년 그는 ‘마음을 가라먹는 사람들’, ‘저기압’ 그 다음해에는 ‘농촌사람들’, ‘새 거지’, ‘同志’, ‘한여름 밤애’에 이어 문제작 ‘洛東江’을 발표하고 1928년엔 단편 ‘春先伊’, ‘이쁜이와 룡이’를 발표한 후 러시아로 망명한다.

이 작품은 많은 연구자들이 조명하지 않았으나 1928년 작 ‘이쁜이와 룡이’가 조명희 문학의 원형성을 보여주고 있는 문제작으로 필자에겐 비친다. 그것은 포석의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거칠고 투박한 식민치하 조선민중의 생활과 감성이 잘 표현돼 있으면서 해방을 열망하는 민족주의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사상성이 무엇보다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고 그의 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서정성의 원형을 볼 수 있다고 보는 시점에서 그렇고 또 포석의 작품에서 흔치 않은 서정성은 초기 시에서 보이는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의 갈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조이기에 그렇다.

대체로 한국문학사에서는 울분에 찬 개인은 사라지고 현실의 각성된 하층계급 내지는 노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의지가 드러난 ‘낙동강’이 카프(KAPE)의 목적의식적 창작방법론을 가장 잘 구현한 문제작으로 해석돼어 지는 바 자연 발생적인 반항적 요소를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계급문학으로 전환했다는 점과 식민지시대 일제 강점기의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이 그 이유이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둔 자료를 들여다보면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프로문학의 맹장 김기진은 ‘감격으로 가득한 소설’, ‘눈물겨운 소설’, ‘조선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기록’이라고 높이 평하고 있다.

반면 조중곤은 자연생장적 특징만 있을 뿐이며 목적의식적 문예운동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정치투쟁의 형상화에도 현저히 미달한다고 혹평하는 등 작품성을 두고 문학인들의 해석은 분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조중근이 말하고 있는 자연생장이라는 것은 감상적, 감성적, 우연한 사건, 의식부재 등 신경향파의 자연발생적 저항의식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도 생각하건대 이는 당연한 논제이고 해석해 볼만한 부분이 분명하다.

시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혁명가적인 인식이 다분히 내포돼 있는데 글에서 나타내 보이는 핵심적 실체는 명백한 논리이기 때문에 이유가 되고 더욱이 시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작가의 심리지수가 위축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이유가 된다고 판단된다.

필자도 같은 생각으로 감상적이고 감성적이라는 것은 정치의식과 계급투쟁과 같은 사상, 이성, 목적, 논리 등과 대치되는 부분으로 서정성, 낭만성, 우연성, 감상성 등을 예시로 들고 싶다.

한편 조종곤이 감상성을 강조한 반면 조선에서는 10월 오히려 혁명의 영향으로 인한 현실적 낭만성을 강조하고 있다. 1928년 2월 동아일보에 발표된 단편소설 ‘이쁜이와 룡이’는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낙동강’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드러낸 작품이지만 다소 낙관론 적이다.

이를테면 ‘낙동강’이 문제적 인물의 역사적 전망이라는 프로문학의 창작방법론을 구현하면서 구조적으로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라 한다면 ‘이쁜이와 룡이’는 식민지 시대 농촌출신 두 인물을 삶과 배경을 통해 조선의 순진한 이쁜이가 끝내 부르조아 자산가의 셋째 첩이 되고 그를 사랑했던 남편 룡이는 울분으로 혁명운동의 길을 간다는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의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아날로그 시대 필자의 시각에서도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될 때 자주 목격하던 드라마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처럼 어렴풋이 그런 장면들이 머리를 스친다. 농촌을 배경으로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자주 드러나는 지고지순한 서정성이다.

둘째 이쁜이와 룡이의 만남으로 시작해 야반도주를 하고 도시 노동자로 살다가 결국 파국을 맞는 이야기의 서사성 전개다.

셋째 이런 소설미학의 예술성과 부조화를 이루면서 가장 강렬하게 표현되는 프롤레타리아적 혁명의 사상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럼 왜 그런 상이한 논제들을 이야기하는지 이유를 들춰본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서정성의 텍스트

주지하다시피 ‘이쁜이와 룡이’는 최첨지의 외동딸 일생을 그린 전기체적인 작품이다. 출생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나이든 아버지를 모시는 아름다운 처녀 이쁜이를 묘사하는 서술의 시선은 읽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감동을 줘 심금을 울린다.

다음은 소설의 일부 내용을 들여다 본다.

-‘소설 이쁜이와 룡이’- 중에서

“이때 마침 들에서 풋 베를 비어 한 짐 잔뜩 짊어지고 주춤주춤하며 밭 뚝 길로 지나던 룡이가 이 꼴을 보고 달려오더니 빙글빙글 웃는 낮으로 ‘내가 저가지’ 하고는 두 둥구미를 한 참에 번쩍 들고 일어선다. 수줍기도 하고 미안스럽기도 하여 어쩔 둘 모르는 이쁜이는 햇살에 익은 두 볼이 더욱 붉어지고 눈과 입가에는 웃음이 방글방글 돌며 부끄러운 태도로 서 있을 뿐이다. 만일에 룡이가 이때, 이쁜이의 모양을 눈여겨보았을 량이면 이때껏 그를 보았던 가운데서 제일 귀엽게 보았으리라.”

여기엔 청춘남녀의 수줍은 사랑 이야기를 목가적으로 서술한 대목이다. 소설의 앞부분은 대체로 이러한 서정적 정조가 주류를 이룬다. 이 서정적 정조는 작중 인물의 서정성과 작가 그리고 독자의 서정성을 동시에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조명희 문학에서 서정성은 ‘낙동강’에서부터 서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해 장례식 장면까지 ‘낙동강의 노래’와 어울리면서 드러나게 묘사시키고 있다. 대체로 모든 작가들의 글의 시원은 서정성에 기인해 글을 펼치므로 조명희도 예외는 아니지만 서사성의 위시로 인해 서정성이 오히려 둔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서정은 인간의 정이 끌리거나 울리는 것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음악을 의미하는 시의 특징으로 보는 서정(lyric)을 위조로 하지만 이런 서정성과 아울러 동양에서는 경이와 정이 어울리는 정경교융(情景交融)의 마음으로 본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따라서 작중 인물들이 서로 정에 끌리고 마음이 움직이는 묘사와 함께 독자의 정이 발하는 것을 서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정은 감상과 감흥을 전제로 하며 희노애락과 같은 인간의 심상을 발하게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성으로 통제되기 전의 감성이 발현되는 것이므로 거칠면서 질박하고 직설적이고 단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감성의 본질이 어떤 대상으로 인해 발현되는 서정은 감상성과 즉흥성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하겠다.

따라서 조명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서정의 전반을 관류하는 격정, 분노, 폭력, 울분, 비애, 절망, 불안 등이 원형적 감성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후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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