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抱石) 그는 왜? 돌을 가슴에 품었는가(2)
포석(抱石) 그는 왜? 돌을 가슴에 품었는가(2)
  • 류환
  • 승인 2020.05.0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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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 조명희 선생의 선구자적 시대정신에 비친 예술혼 (후편)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전편에 이어)

혁명의 카테고리와 낭만주의 낭만성

조명희 문학에서 나타나는 주된 내용들 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상당수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조명희의 처음 문학작품들은 대체로 감상적 낭만주의로 보인다.

초기 낭만적 감성은 그의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신의 방황, 의식의 과잉, 패배와 좌절감 등의 퇴폐적 감성이 항의와 더불어 여러 가지 격분에 찬 목소리로 여과 없이 분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월의 노래에서’-

“우리의 무장은 원수를 물리치고야 만다.

망치여, 더 힘 있게 내려쳐라!

바퀴여 더 빨리 굴러라!

태양이여, 더 빛나게 내리쪼여라!

우리의 걸음은 한 시가 급하고,

우리의 팔 다리엔 힘줄이 뛴다.

오직- ‘앞으로!! 앞으로!!”

위 글에서 보듯 시의 주제와는 상이하게 포석은 상황에 따라 낭만성을 강조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요소들을 짙게 담아낸다.

그래서 글을 쓰는 창작행위가 민족의식적 염원성의 상황들을 엄정한 고발정신에 기인하는 의지적인 사명이 격분에 찬 모습으로 직·간접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삶과 죽음을 뚜렷하게 각인하고 있는 사회주의적인 혁명성은 식민통치와 항일 저항운동이 두 바퀴가 축이 돼 혁명적 낭만성에 맞닿고 있음을 보인다.

반면에 다른 이면에 내다보이는 감성적 과잉의식이 영혼의 방랑으로 상징되는 퇴폐성으로 드러나게 해 좌절감, 절망감을 과장되게 표출하는가 하면 낭만적이고, 관념적이며, 종교적 신비주의 분위기도 드러내고도 있다.

1920년대초 박영희, 박종화, 이상화 등 ‘백조파’ 동인들은 낭만주의적 패배감을 극단적으로 저항하며 이를 역전시키고 프로문학운동으로 투신해 카프의 맹렬한 동인이 된다.

이것은 필자가 갖고 있는 자료에서 김윤식은 ‘식민지적 절망과 예술적인 저항’이라고 분석하면서 ‘그 미적 형식이 낭만성을 지닌 퇴폐적 작품을 낳았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가장 데카당한 깊이까지 도달한 시인일수록 가장 깊은 계급 혹은 저항적인 이데올로기로 이행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포석 조명희 역시 박영희, 나도향, 이상화와 다르지 않다.

3.1 운동으로 수감을 당하고 영웅 숭배열에 흡수돼 만주로 탈출하게 됐으며 가난한 동경 유학생활을 하면서 조명희 자신이 반동의 현실도피라는 매우 심각한 슬럼프적인 심연에 이른다. 당시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비의 문을 두드리자’라며 당시의 환경에 처한 고뇌를 토로한다.

“타고르류(流)의 신낭만주의(新浪漫主義)냐? 그러치 안으면 고르끼류(流)의 신현실주의(新現實主義)냐? 현실주의(現實主義)다 현실에 부다치자. 뚫코나가자! 하얏다 이제껏 나는 생활사실(生活事實)이 사상(思想)을 난는지는 모르고 사상(思想)이 생활(生活)을 난는줄만 알엇다” -‘포석, 생활기록의 단편’(조선지광, 제65호, 1927년 3월 16쪽) 중에서-

이것은 당시 그가 시 창작 위주에서 소설 창작 위주로 바뀔 무렵인 1927년 전후의 생활고들을 애절한 심경으로 글을 빌려 토로한 것 같다. 회상형식과 결의로 구성된 이 단상은 작품을 논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작용된다고 보여진다. 이를 전후해 조명희는 가난한 생활로 인해 조선의 현실을 재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회고처럼 부르주아적인 것과 보헤미안을 자처하는 퇴폐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궁핍에 쫓겨 길거리에서 팥죽 장사까지 했으나 여전히 감상성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작품 곳곳에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처자를 굶기는 처참한 현실로 인해 조명희는 식민조선의 현실을 재인식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무산자의 고통을 절감하는 한편 혹독하고 가혹한 현실을 통해 사상적 변화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위기의 시기에 처해 있거나 자신감이 적거나 넘치거나 어떤 용기가 필요하다고 본 상태로 의식을 짓누르는 지배적인 막다른 골목쯤에서 탈출해야 하는 심정쯤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정의감과 조국애가 감상적으로 표현된 작품들로 민족주의적 경향을 다분히 노출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철저한 현실의식을 거쳐 마르크스주의로 전이되면서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택하도록 하는 요인을 갖게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낭만주의 경향을 탈피한 것은 아니며 이분법적 구조로 귀결하고 있다는 것으로 봐야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에서는 서정적 정조라고 해야 하는 감상성과 낭만성이 여전히 문학의 기저에 촘촘한 그물망처럼 짜여있기 때문이다. 가령 ‘낙동강’에서 앞서 조중근이 지적한 감성의 표현들이 그대로 펼쳐져 있고 ‘이쁜이와 룡이’에서도 감성적 격정이 오히려 서정적으로 묘사돼 그들 사건의 일련들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주목한 필자는 자료를 보면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조명희의 삶과 문학, 낭만성과 혁명성을 이정숙은 ‘시적 낭만주의와 소설에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보면서 그런 그의 심경이 혁명성의 구체적인 실현으로써의 창작활동으로 승화됐다’고 분석하고 있다(국제한인문학연구, 제4호 2007년 181쪽)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명희는 자신의 회고에서 밝혔듯이 자연 생장적 울분, 격정, 감성의 시로부터 목적의식적 논리와 철학, 계급의식의 소설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고 창작방법론으로 고리끼의 현실주의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고리끼의 현실주의는 혁명적 낭만주의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상징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전제군의 봉건체제에서 산업혁명을 거친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나아가고자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왕족을 포함한 봉건계급, 신흥 부르주아, 반동계층이 자기 이익을 지키고자 사회변동을 거부하고 나아가 반혁명을 선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로 가장하고 있는 부르주아 독재를 배제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어렵고 고통스럽다. 현재 사회를 유지하고 고수하려는 힘이 강해서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현재 사회를 사실적으로 분석하고 묘사하는 한편 낭만적 희망을 가지고 미래사회를 낙관적으로 그려야 한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며 이런 혁명적 낭만주의 의식은 아래와 같이 문학의 텍스트 구조를 생경하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이를 다시 살펴본다.

“별수 없어, 우리가 다 공장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팔린 놈들과 새로 주서다 논 놈들을 모다 내쫒아 버리고 다시 우리가 기계를 타고 앉아서 다시 투쟁을 하세나 그려” (중략)

“그야 물론 희생자가 나겠지. 나부터라도 당장 각오를 하네. 감옥을 우리네 아랫목으로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무서워서야 우리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뿐이와 룡이’ 중에서-

여기서 주인과 손님이 대화형식을 빌려 노동자와 계급투쟁의 결의를 설교조로 쓰고 있다. 인용문의 주인공인 룡이는 바로 직전까지 이쁜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회상하다가 갑자기 노동자와 계급투쟁의 설교를 한다.

작품 구성으로 볼 때 아주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인과적인 개연성이 미흡하다고 읽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상상력이 미흡해서가 아니라 조명희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나열하고 배치한다는 것이 중론적인 핵심이다.

굳이 이유를 든다면 조명희는 노동자와 계급투쟁의 현실사회를 고발하고 싶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시선이다. 그러나 당시 검열제도를 고려했어야 했기 때문에 우회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알레고리와 같은 기법으로 처리하지 않은 것은 혁명적 낭만성이 그만큼 강했다는 뜻이며 사회주의 사상성이 텍스트에 직접 개입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주인공 룡이의 이런 성격 변화나 신념의 설교는 작중 인물을 제압하고 직접 작가가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모양새를 갖춘다.

이런 현상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현실부정에 대한 격정과 열망이 강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렇게 볼 때 조명희의 낭만성은 사회주의의 계급투쟁의식 즉, 현실주의와 더불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창작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고리끼를 택했고 프로문학의 맹원이었으며 작품 곳곳에서 사회주의의 계급투쟁을 그리고 있다. 포석이 택한 고리끼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서의 고리끼라기 보다 혁명적 낭만주의로서의 고리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포석 조명희는 여러 조건상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잘 구현할 수 없었고 작가 또한 격정과 신념의 강렬성으로 인해 낭만적 혁명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작품 속에 잘 반영돼 있다.

다시 강조한다면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는 동경과 사상의 초월을 통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데 반해서 혁명적 낭만주의는 현실을 토대로 예술가들이 현실보다 나은 미래를 묘사함으로써 현실을 탈피 또는 변화를 추구하는 희망적 표현에 중심을 두는 낭만주의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포석 조명희의 세계관과 창작방법론의 기저에 혁명적 낭만주의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고 작품 전편에도 혁명적 낭만성이 짙게 드러나 있다고 판단한다.

특히 그의 작품 저변에서 드러나는 격정, 울분, 신념 등이 끝없이 표출되는 것은 작가의 내면에 질풍노도의 격정이 마치 충만처럼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의 의식기저에는 민족해방에 대한 절박하고도 철저한 자기 확신의 열정적인 갈망이 잠재돼있어 그 낭만성으로 인해 예술적 영감과 낭만적 창의성이 다분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

-‘이쁜이와 룡이’- 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그 꿈은 무슨 꿈인가? 어떤 분통같이 꾸민 방 속에서 박 감독과 같이 재미있게 살판에 룡이가 칼을 들고 들어와서 배를 타고 앉아 칼로 겨누며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한다. X는 사람의 원쑤, 더구나 남편의 원쑤놈과 한가지 배가 마저 사는 년은 용서 할 수 없다 죽어보아라”

이를 보면 룡이를 낭만적 인물로 그리고 있으면서도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룡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혁명가이다. 그런데 그의 견고한 사상성은 꿈이라는 현실초월의 장면으로 재현해 묘사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작가의 서사전략으로 룡이가 보는 것처럼 3인칭 관찰자로서 입장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꿈이 꿈으로 처리하기보다 현실과의 불화나 초월현상으로 드러나고 또 현실 속에서 자생능력이 부족한 패배자의 전형인 것으로 그래서 꿈으로 이입은 낭만적으로 분노를 해소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면서 낭만적인 해결 방법은 꿈으로 깨달은 후 실제로 작품을 전개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그리고 난 뒤, 그들은 꿈과 같이 되고 말았다. 룡이는 감옥으로 이쁜이는 박가에게로”

여기에서도 보듯 꿈은 현실의 반영이거나 기대일 수는 있으나 현실과 비현실을 동일화시키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낭만성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비극적 결말의 극적 대비는 현실을 낭만적으로 인식한 결과이기에

그렇다. 또한 이쁜이의 인물 변화와 성격 변화는 시골 머슴출신 룡이가 혁명가로 변화한 것에 비례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이 역시 작가의 서사전략으로써의 낭만성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의 플롯은 계급투쟁을 향한 직선형 전진구도로 구성돼 있으며 주인공들의 내면적 갈등이 없는 무갈등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런 소설 구도나 파국적 결말은 조명희 자신의 절박한 의식에 기인한다고 풀이돼 진다.

조선의 현실을 혁명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작가의 간절함에서 그의 의식이 정제되기 전에 낭만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한다.

조명희 시에서 나타나는 선구자적인 문학 혼

다음의 선생의 시들을 살펴보며 우선 ‘무제’라는 제목의 시를 관찰해 본다.

“주여! 그대가 운명의 저(著)로

이 구더기를 집어 세상에 떨어뜨릴 제

그대도 응당 모순의 한 숨을 쉬었으리라

이 모욕의 탈이 땅 위에 나불거릴 제

저 밝은 햇빛도 응당 찡그렸으리라

오오 이 더러운 몸을 어찌하여야 좋으랴

이 더러운 피를 얻다가 흘려야 좋으랴

주여, 그대가 만일 여영 버릴 물건일진데

차라리 벼락의 영광을 주겠나이까

벼락의 영광을!”

위 시는 1920년대 초에 포석 조명희 이름으로 ‘봄 잔디밭 위에’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시집 속 내용이다.

상위 시를 연세대학 석좌교수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신 유종호 선생은 같은 시기에 주요한, 변영로, 김안서, 박종화 등의 시집도 발표됐다고 쓰고 있다.

그즈음 김안서의 시편들은 일찌감치 퇴색됐고 박종화의 시편들이 습작수준에 머물러 있음에 반해 포석은 식민지 현실의 암울함과 절망감을 반어적으로 노래한 작품 가운데 가장 포석다운 ‘무제’는 시대적 증언이 되는 동시에 문학의 위엄을 잃지 않고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끈다고 평하고 있다.

필자의 시선으론 시 1행에서 밝히고 있는 구더기라는 시어는 ‘식민지의 곤충’ 쯤으로 여겨지는바 조선인 모두 또는 자신과의 조응관계를 그렸다고 읽힌다. 이를테면 자신의 정의는 한결같은데 자신의 모멸감이나 조국애의 혐의로 환치시키는 차용의 일환으로서 견디기 힘든 모욕적인 탈과 자신의 소멸을 위해 차라리 벼락을 맞는 영광을 달라고 저주하듯 하는 자조적인 내뱉음은 호소이자 애원이기도 하다고 보인다.

지식인으로서 지식인이 벼락을 달라는 그래서 그 더러운 피를 어디에다가 흘려야 좋으랴 라고 자학하며 추악한 현실에 대한 저주로 변주돼 나온 것은 아닐까 분석해보며 다음 시를 음미해본다.

“순실(純實)이 없는 이 나라에

아픔과 눈물이 어디 있으며

눈물이 없는 이 백성에게

사랑과 의(義)가 어디 있으랴

주여! 비노니 이 땅에

비를 주소서 불비를 주소서!”

-‘불비를 주소서’ 중에서-

이 시는 굳이 해설이 필요 없어 한눈에 바로 이해되는 한 편의 시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은 다소 냉철한 울분에서 생성되는 시대정신이 낳은 소산적이고 결의에 찬 시다.

이런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과 격정은 편향된 시인으로 멈추지 않고 천지자연의 이치와 생명력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동력을 얻고 용기를 얻어 가슴을 열어놓고 있다. 이러한 노래들은 어떤 특정한 순간이나 기간들을 기록하여 읽히는 독자들에게는 드믄 성취감으로 동시대를 대비시켜 내다보는데 성과적이면서 상황적이어서 선연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다음은 ‘경이(驚異)’라는 작품의 전문이다. 읽어보자.

“어머니 좀 들어 주세요

저 황혼의 이야기를

숲 사이 어둠이 엿보아들고

개천 물도 더 한층 가늘어졌나이다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어머니 좀 들어 주세요

손잡고 귀 기울여 주세요

저 담 아래 밤나무에

아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뚝’하고 땅으로 떨어집니다.

우주가 새 아들 낳았다고 기별 합니다

등불을 켜 가지고 오세요

새 손님 맞으러 공손히 걸어가십시다”

포석의 작품에는 주(主)와 어머니를 부르는 대목이 유난히 많다. 대자연의 앞에서 혹은 속박된 사회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명하는 것은 한갓 여리고 고독한 어린아이의 심성을 가진 순진한 소유자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기지만 이 작품에서는 기실 조국과 백성을 호칭하는 것으로도 풀이된다.

“나무 나무들도 다 기도를 드릴 때”라고 염원하고 있다. 이는 산, 천, 지 생명체들의 모든 근원들이 식민지의 자유로운 해방을 위해 기도를 드릴 때가 됐다고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아람이 땅에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 부분에서도 새로운 유토피아 이를테면 신세계를 꿈꾸는 작의가 농후하며 “우주가 새 아들을 낳았다”고 기별하니 “어머니 등불을 켜가 지고 공손히 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거스를 수 없는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따라 인용한 새 아들은 광명, 해방, 자유 등으로 은유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느끼기에도 때론 강인한 정신과 모습을 발휘해 단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곳곳에서 그의 여리고 열린 마음이 포착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시기적으로 1920년대를 상상해 보면 어떠했을까. 그의 작품들이 당시에 주로 발표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척박한 농토를 일궈 수확하고 성취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른 오늘 당대의 작품은 당대보다 호소력이 약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후 많은 작품이 수준 높은 수작을 낳고 반복적으로 당시의 시대상과 현상계들을 그려보고 불러 모으기에 충분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

다음의 작품은 낙동강을 노래한 시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 보이듯 작가가 창작한 우리 전통 민요를 인용해 작의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시선을 끈다.

-‘낙동강의 노래’ 중에서-

“봄마다 봄마다

불어내리는 낙동강 물

구포(龜浦)벌에 이르러

넘처 넘처 흐르네

흐르네 -에-헤-야-

철렁처렁 넘친 물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의

젖이 된다네

젖이 된다네 –에-헤-야”

이 민요적 율격을 통해 강조되는 부분은 “봄마다 낙동강물이 불어서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 젖줄이 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중에서 “넘쳐 넘쳐와, 철렁 철렁”이라고 반복돼진 어법은 일종의 전이적인 화제로 우리 민족 문화의 가락조의 한과 풀이가 적절하게 계승된다는 면에서 문장을 아우르는 문체를 충만하게 보이는 시각적 확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으며 “젖줄이 된다네”라고 한 내용에서도 식민통치의 현실부정 의식으로써 억압당하고 있는 조국의 곤비한 백성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함으로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러한 정적인 민요가 지면을 통해 호소해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의 효과를 크게 부각된다는 사실을 시인으로서 이를 크게 여겼을 것이고 독자에게는 새로움을 유발하고 향수를 촉발하고 있어 당대적 문학의 충실성과 성취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그의 일면을 잘 나타내주고 있어 시선을 끈다.

따라서 독자들에겐 개인사적인 작가의 시선을 넘어서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과 특성에 경의를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생생한 증언이 되기도 함은 물론이고 민족의 수난을 상징하는 한 시대의 희생자로서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뒤돌아보게 한다.

연도별 주요 활동 시기와 문학작품

그는 민족시인이며, 극작가이며, 수필가이자, 소설가로 그야말로 문학의 총아를 다루고 거기에 심취하면서 식민사회의 현실에 반항했던 저항의 작가, 아니 의인이었다. 특히 우리 겨레 인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문학인들의 활동은 이미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예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만해 한용운은 일제 조선총독부에 체포돼 3년형을 살았고 육사는 중국에서, 청마 유치환은 일본과 만주에서, 윤동주와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서, 포석은 소련에서 등등 많은 문인들과 의인들이 정당성 없는 지배 권력의 박해로 불행에 처한 겨레를 위해 불우한 생애를 마감했던 사건들은 한둘이 아니다.

이들은 겨레의 비운과 통치가 계속될 때마다 우리 명운의 상징으로서 투쟁을 지속적 행동으로 실천해 전력을 다해 싸워왔으며 단언컨대 주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국운과 미래는 있었을까? 진지하지 않을 수 없다.

1937년 5월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마감하지만, 국내보다 망명지에서 문학적 평가가 지속되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그의 업적과 발자취를 더듬는 노력은 저조하다는 느낌이다. 몇 년 전부터 그를 기리는 사업들이 시작해 불씨는 낳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들의 입장에서는 아직까지 미진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선생의 전면적인 성과들을 집대성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미 필자의 글에서도 밝혔듯 불우했던 식민치하의 상황에서 온 몸을 던져 치열하게 싸우던 지식인의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 우리는 부족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곱씹으며 문학관이 만들어지고 동상이 세워졌어도 아직 해야 할 숙원의 문제들이 많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주요활동과 문학작품들을 나열한다.

1. 전기(1920~24)- 동경 유학 이후 희곡과 시 중심으로 창작활동 시작, 희곡집 ‘김영일의 사’(1920), ‘파사’(1924), 시집 ‘봄 잔디밭 위에’(1924) 등 탐색기인 초기작품들은 실험적인 요소가 많다.

2. 중기(1925~27)- 귀국한 이래 시집을 펴낸 이후에는 왕성한 소설을 창작해 발표함, 단편 ‘땅 속으로’(1925), ‘낙동강’(1927) 등의 소설작품을 발표함, 이 무렵부터 개성 있는 작품들을 구사, 가장 강한 프로성향을 보였으며 왕성한 문학실적을 거뒀다.

3. 후기(1928~37)- 소련에 망명한 뒤 현지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지도를 함, 손수 산문시 ‘짓밟힌 고구려’(1928), ‘10월의 노래’(1931) 동요 등을 발표, 검열체제와 생활의 불안정 등으로 집중력이 떨어져 작품성향이 고르지 않다.

맺으면서

장시간에 거쳐 시간을 탐독한 포석 정명희의 문학 속에 깃든 발자취를 멈추자니 애정이 잔뜩 묻은 선생의 영정과 존엄이 가슴에 잔잔히 얹힌다. 몇 일간은 연속 희뿌옇게 초상들이 남아있을 것 같다.

정의에 불타오르던 시절 작품을 발표하는 내내 문학의 전 장르에 걸친 작품들은 식민통치에 처한 민족 수난의 현실 속에서 거사를 치루는 과정들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간과할 수 없었다.

이는 핏줄이 거꾸로 솟는 죽음을 각오한 저항이자 정의롭지 못한 시대적 배경을 통해 선생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몸부림이었고, 치열하고 뜨거운 투쟁이자, 호소력 짙은 하소연이자, 민족운동의 횃불이었다.

특히 작품에서 드러나듯 일종의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경향들은 자신의 저항적 투쟁이 자신만의 위기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를테면 배곯는 민족들을 위해 민족의 영웅으로 자처했을 것으로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문학작품 활동의 이모저모와 선생의 의식을 지배한 정준을 살피느라 많은 양의 자료들을 수집해 읽으면서 이를 통해 필자에게도 연구와 공부에 크나큰 이점이 부여됐음을 밝히며 확실한 것은 ‘언어의 핵심은 행동’이라는 것을 또다시 체감하면서 컴퓨터를 덮고 오디오 리모컨을 집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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