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한국시단에 빚어놓은 토속적 언어미학의 절창
[평론] 한국시단에 빚어놓은 토속적 언어미학의 절창
  • 류환
  • 승인 2020.05.0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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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재삼 시인이 구가한 한의 시정과 정한
류환 시인, 예술평론가, 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 예술평론가, 행위예술가] 선생과의 인연과 만남

정확한 때가 기억 속 확고한 자리에 못 미치지만 어림잡아 25년 전이니까 1990년대 중반쯤으로 필자는 화단과 문단에 데뷔해 한참 시 작업을 하겠다고 기를 쓰고 있을 때인 것 같다.

날씨가 좀 쌀쌀해지는 초겨울 어느 날인가 박재삼 선생께서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병문안 가서 뵙게 된 것이 마지막이 됐다.

어느 교육기관이 주최한 백일장에서 작품들을 심사하던 도중 심부전증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고 계실 때였다.

그 이전에도 고혈압으로 고생을 하셨다는데 “가난을 비킬 수 없어 성장기에 가난 때문에 허기진 배를 못 채우고 고생을 많이 하고 자라서 약골이라 그렇다”라고 했다.

바짝 마른 몸에 링거를 꽂고 있었음에도 그냥 누워 계시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손으로 악수를 청해주며 필자에게 건강을 당부했던 것이 어렴풋하다.

이것이 두 번째이고 마지막이 될지는 생각도 못했는데 2년 후 타계 소식이 중앙언론에 실린 것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었다.

첫 만남은 1990년대 초반으로 문학을 추구하는 기성시인들과 시를 좋아하는 문학생도 70여명이 둘러앉아 시를 발표하거나 낭송을 하는 문학단체 행사에 초청강연을 하러 오셨을 당시에 뵌 선생은 마른 몸매에 키는 적당한 체구로 미소를 머금은 채 조용조용한 경상도 사투리로 현대시를 강의하시던 일이 안개처럼 떠오른다.

지금도 흐릿하게 낡은 필름처럼 떠오르는 것은 문학을 좋아하는 문학회원들 한분 한분을 작품설명과 함께 시인 특유의 사투리를 섞어가며 진솔한 시세계를 형상화해 친숙하고 폭넓게 설명해 공감을 자아내도록 안내 했었다.

그 당시 필자의 시 ‘가을의 계절’ 외 몇 편들이 괜찮다며 당신 스스로 추천해 1995년도 ‘한맥문학’ 12월호를 통해 필자를 첫 문단에 데뷔토록 이끌어 천명했고 간단한 심평을 직접 쓰셨기 때문에 그때 마주했던 선생의 덥수룩한 머리와 얼굴 모습이 머릿속에 남는다.

필자는 연이어 다음해인 1996년 ‘문예한국’에 ‘모티브가 있는 테마’란 연작시를 통해 또 다시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됐고 선생은 그 시기 왕성하고 다양한 문학활동과 더불어 ‘한맥문학’ 문학사에 간사로 일하고 계셨을 때였으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러간 셈이다.

당시 선생은 서정시가 갖는 본연의 정서와 미감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현실적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떠올려 우리 삶을 비추는 시대정신과 진실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인이었다.

지금은 이미 이승에 없지만 한국문학에서 이를 계승하고자 하는 후학들과 한국시단에 큰 별로 많은 업적과 성과를 거두어 놓고 가신 시인으로 생전 맺었던 인연과 더불어 멀리서 존경하던 분으로 가슴에 남아있기에 선생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으로나마 생전의 고마움을 미흡한 글이지만 지면을 통해 남기고자 한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이것저것 찾다보니 여러 글에서 거의 한 맥으로 이어지는 선생의 시의 세계를 구체적이면서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가 선생의 과거를 더듬기 위해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몇 가지 걸어온 길을 최소한으로 인용한다는 것을 미리 밝히며 시평을 논하고 이를 전개하기로 한다.

들어가기에 앞서

이광호(문학평론가)에 따르면 “1950년대에 한국문학은 폐허의 위기에서 언어를 잃어버린 채 암중모색하고 있을 무렵, 우리나라의 문학에 신경을 쓰지 못한 혼돈의 연대가 저물어가는 한국시단은 비로써 선생이 빚어낸 토속적 언어의 미학을 만나 활기를 띄는 동기가 된다”고 쓰고 있다.

우선 선생의 시에 대해 외래어와 관념어를 남발했던 당시의 유행적 경향이 “박재삼 시인의 생기 있는 어조와 구어(口語)에 대한 친화력을 돋보이게 했다”고 분석하고 “박재삼의 시는 한국 현대시가 참된 형상과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한국의 내재된 언어 감각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내제되어 있다” 고 설명한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김소월, 서정주로 이어지는 토속적이면서 질박한 우리의 전통적 언어를 되살려 절창의 서정시를 뽑아낸다. 특히 선생의 서정시는 대다수가 자연교감의 삶과 정한(情恨)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시성의 토착화에 매진한다.

이는 재래적인 정서가 결코 일방적으로 배제됨으로써 이를 수용되고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는 전환으로 가능케 하고 있어 시인이 줄기차게 읊조린 서정시의 정서적 근원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래서 박재삼 시인은 ‘한의 정서’에서 비롯되는 시조 및 가사에서 흘러나와 김소월과 서정주가 이어온 한국 전통시에서 하나의 맥락을 이어가고 있는 정서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특히 그의 시는 외래어와 설익은 관념어에 의해 오탁 돼가는 모국어의 순결성을 눈부시게 되살려낸 것으로 높이 평가됐다.

더욱이 시에 있어 중추를 이루는 ‘한’은 시인의 생활환경과 성장과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시인이 유년기를 보낸 경남 삼천포 시절에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해서 어머니는 생선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고 아버지는 지게 품팔이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조금도 움츠리지 않고 성장하는데 이는 타고난 낙천성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워낙 쪼들리는 생활고 탓에 책도 사볼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는 동료의 책을 빌려다가 공책에 베껴 외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어린 시절 내내 시골의 바닷가 자연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자란 것이 그에 시의 한과 응어리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뒷날 그가 의식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이런 면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글을 전개하며

박재삼 선생은 1933년 4월10일 일본 도쿄에서 막노동을 하던 아버지 박찬홍(朴贊洪)과 어머니 김어지(金於之)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다.

3년 뒤 귀국한 그의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인 경남 삼천포에 자라를 잡는다. 삼천포에서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막일을 나가고 그의 어머니는 두부나 생선을 떼어다가 파는 도붓장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간다.

1946년 선생은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제때 못하고 삼천포여자중학교의 사환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때 마침 삼천포여중의 교사로 있던 시조 시인 김상목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끄는 운명적 계기가 된다. 선생은 이듬해 해삼천포중학교 병설 야간부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2년 뒤 주간 중학교로 옮긴 그는 제1회 영남예술제(개천 예술제) ‘한글 시 백일장’ 에서 ‘촉석루’로 차상을 받는다. 이 때부터 그는 같은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형기와 친분을 맺고 교류를 쌓게 된다.

4년제 중학과정을 마치고 1951년 삼천포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한 그는 1953년 같은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같은 해 그의 시조 ‘강 물에서’가 모윤숙의 추천으로 ‘문예’ 문학지 11월호에 발표된다.

선생은 곧 김상묵의 소개로 잡지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현대문학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그는 ‘현대문학사’에 다니게 되면서 시 쓰는 일에 더욱 열정을 쏟는다. 그의 시는 날로 기량과 빛을 발해 1955년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에 ‘섭리’, ‘정적’ 등이 실린다.

이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 시인은 1956년 ‘춘향이 마음’을 발표하고 1957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학창시절부터 수재적인 면모를 드러내면서 주목을 한 몸에 얻으며 각광을 받는다.

1961년도엔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60년대 시화집’에 참여한 선생은 이듬해인 1962년 ‘신구문화사’에서 첫 시집 ‘춘향이 마음’ 을 펴낸다.

이 시집에 수록된 노래 가운데 하나인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3연 12행의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토속적인 민속주의 정서에 녹여 매우 유려하게 보여준다.

토속의 정한을 노래한 가난한 심상들

시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살펴본다.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 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물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마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이 시에서 드러내는 핵심은 친구를 걱정하는 그의 따뜻한 애정 어린 우정으로 친구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 이야기를 토속적인 어조로 들려주는 서럽고 슬픈 심상을 노래한 것이 주된 내용으로 시인의 감성적 관조를 느끼게 한다.

가난한 가족보다, 배고픈 자신보다 친구의 가슴 아픈 심경을 해가 지는 가을, 울음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듯 흐르는 강물에 비유하고 있다.

해 저무는 가을날 산등성이에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듣는 까닭모를 천연한 슬픔이 직접적인 시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더 깊은 내면에는 순결과 무구한 심성의 근원 속에 깃들어 있는 ‘한의 정서’가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너도나도 기쁘게 뛰어놀던 산골에서 흐르던 물소리마저 사라지고 사랑할 때 나누던 밀어 같은 약속도 녹아 사라져 없어지니 말없이 흐르는 강을 바라만 보고 있는 처지를 산등성이 아래 나지막한 자연의 풍광을 통해 적절하고 한스럽게 묘사해 아름다운 서정을 드러낸다.

시의 전반부를 감싸고 있는 마음, 친구, 울음, 첫사랑, 눈물 ‘흐르는 강’ 에서도 나타나듯 시인은 있는 그대로 기교(craft)나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세련미보다 진실성을 사투리어 그대로 투박한 정서를 껴안고 말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는 광경을 스케치하듯 표현하고 있다.

또 ‘가을 햇볕’과 ‘불빛’은 ‘울음’과 ‘서러움’ 등도 드러내고 있지만 이를 환기하는 인식으로 시를 따뜻하고 밝음으로 가슴 한쪽에 간직하는 정서로 틔우는데 온기를 나눈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도 정금을 빚어내는 이미지로 표현된 ‘울음’과 ‘서러움’으로 시의 전반부에 그리고 있는 안과 밖의 이미지와 분위기에서도 슬프도록 자아내고 있는 ‘햇볕’과 ‘불빛’에서도 우리 겨레의 삶을 토해내듯 보편적 한과 슬픔을 등원으로 하여 나타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과거 우리 민족적 고달픈 가난과 짓밟히는 서민적 삶을 그대로 받아들인 시대적 배경에 겪던 애환의 풍토와도 닮아있어 일맥상통한다고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과정들은 대를 물리듯 과거와 현재에 처해있는 애환들의 기저에는, 시인은 이미 1960년대 후반에 결혼해서 슬하에 딸과 아들까지 둔 가장의 몸이었지만 가난과 배고픈 때문에 설움을 뼈저리게 체감한다.

이 무렵 오랫동안 다니던 ‘현대문학사’를 그만두고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춘추’와 ‘바둑’ 등의 잡지사에 취직했지만 이도 수월치 않아 ‘대한일보’사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게 된다.

이때가 1967년도 당시 그는 30대 중반으로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간이 떠들썩했던 공판을 보고 나오던 길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여섯달 가량 입원하고 있다가 다행히 병상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3년 뒤인 1970년 두 번째 시집 ‘햇빛 속에서’를 발표한다.

민족정서에 뿌리내린 시정들

먼 나라로 갈까나/ 가서는 허기져/ 콧노래 부를까나/ 이왕 억울한 판에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보다/ 더 서러운 일을/ 뼈에 차도록/ 당하고 살까나/ 고향의 뒷골목/ 돌삼 사이 풀잎모양/ 할 수 없이 솟아서는/ 남의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나는 살까나.

상위는 ‘소곡’(小曲)을 노래한 시편이다. 여기에서도 보이는 대로 시인의 의식 속에는 각오와 체념이 혼용돼 있으며 여전히 ‘서러움’에 물들어 있다. 그 ‘서러움’은 ‘당하고’만 살던 억울함의 누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난다.

끊을 수 없는 가난, 거듭된 피침으로 강요당한 수난 그리고 크고 작은 이별이 겹치며 서민적 삶의 수심들을 떨쳐낼 겨를이 없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시인은 시적 한의 미학을 바로 밖에서 강요하는 슬픔과 서러움 등 능동적 수용을 기저의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이에 거부하거나 저항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에 순응하며 살려는 서민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애상성을 길어 올려 구가하고 있음을 보인다.

시에서 “남에 손에 뽑힐 듯이 뽑힐 듯이” 살아보려는 태도는 지나치게 피동적이고 나아가 피학적이기까지 하여 미뤄 짐작컨데 자생적이고 수용적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탓하기 전에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기 받아 때문에 자기수용의 느낌, 생각, 행동 등 여러 심리적인 행동까지 인정하고 책임지며 성숙하게 자기의 심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시인의 시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이 원한과 복수로 진행하지 않는 것은 ‘한’을 마음속으로 삭히며 울음으로 풀어내는 것이 시인의 시에 특징으로 보이고 수용의 방식으로 읽힌다.

흐르는 물은 큰 연못을 이룰 때 비로써 소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점이 ‘시인의 시에서 다시, 시인의 감성과 시정의 정한’으로 언어미학의 절창으로 이루고 있는 시편들 속에서 역점을 두고 있음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시의 역점에서 ‘춘향이 마음’이나 ‘햇빛 속에서’가 주로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과 생활 형편에 바탕을 둔, 한의 정서를 형상화한 것이라면 제2기에 나온 ‘천년의 바람’이나 ‘어린 것들 옆에서’는 구어체로 풀어낸 애달픈 한의 심정을 주변의 나무와 풀잎과 바다와 바람 같은 자연을 통해 투사하고 있다.

시 ‘아득하면 되리라’ 중에서-

해와 달, 별까지/ 거리 말인가/ 어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제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수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위에서도 보이듯 이 무렵 작품에서는 막연하고 추상적이던 시점의 주체가 ‘나’ 로 복원돼 있다. 그러면서도 한의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동양적 달관과 허무주의적 체념이 정서의 바탕을 이루고 있어 시 세계의 색다른 이미지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민족 정서에 뿌리를 내린 채 심상의 깊은 공간에서 출발한 시인은 현실적 구체적 공간으로 환기해 일상의 체험을 품어 안는다.

‘아득하면 되리라’에서 화자의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아득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해와 달과 별’ 거리만큼 떨어져 있노라면 그것이 응어리가 돼 원한이나 복수심으로 맺힐 만도 한데 시적 화자는 그저 담담할 따름이다. ‘그 아득한 거리’를 어쩔 수 없어 ‘냉수 한 사발’ 마시는 것으로 체념하고 본인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의 노래를 지속하는 시인은 신문에 바둑 관전기를 쓰거나 출판사 등에서 일을 거들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 시인은 1972년께부터 직장생활을 완전히 벗어나 홀가분하게 지내며 다시 갖게 되는 여유와 자유로운 집중 속에서 시 작업 일에 혼신을 다하며 심혈을 기울여 거의 한 해에 한 권씩을 발표하는데 결실을 일군다.

결실을 나열하고 글을 맺으며

발표된 시집을 나열하면 제3시집 ‘천년의 바람’(1975), 제4시집 ‘어린것들 옆에서’(1976), 제5시집 ‘뜨거운 달’(1979), 제6시집 ‘비 듣는 가을 나무’(1981), 제7시집 ‘추억에서’(1983), 제8시집 ‘대관령 근처’(1985), 제9시집 ‘내 사랑은’(1985), 제10시집 ‘찬란한 미지수’(1986), 제11시집 ‘사랑이여’(1987), 제12시집 ‘가을 바다’(1987), 제13시집 ‘해와 달과 궤적’(1990), 제14시집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1991), 제15시집 ‘허무에 갇혀’(1993), 제16시집 ‘다시 그리움으로’(1996) 등의 시집과 10권의 수필집을 발표하지만 여기에 수필은 적시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가장 치열하게 창작품을 이어가며 거둔 결과물이고 열매들이다.

그 뒤 시인이 타계한지 한 해 뒤인 1998년에는 ‘민음사’에서 ‘박재삼 시 전집’이 간행됐다. 그는 시에 매달려 사는 동안 문교부 주관 문예상(1967), 제10회 한국문학 작가상(1983), 인촌상(1991) 등을 받는다.

‘허무(虛無)의 내력’ 전문 중에서-

늘 돈은 조금만 있고/ 머리맡엔 책만 쌓이고

그 책도 이제는/ 있으나 마나한데

땅 밑에/ 갈 생각만 하면/ 나는 빈 것뿐이네.

굳이 해설이 필요 없는 일상을 표현한 푸념 섞인 나른한 허무 속을 덤덤한 심상으로 그려놓은 한편의 글이다.

시인은 이렇게 고단한 삶과 작품을 이어가던 중 1967년에 갑작스런 고혈압으로 쓰러지지만 또 다시 병마를 이기고 일어서 작품에 전념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은 오래가지 않고 1980년께 다시 고혈압과 위궤양이 겹쳐 한동안 입원한다.

시인은 이때도 병원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해 불편한 몸이지만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바깥활동을 소홀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지병조차 죽을 때까지 함께 가야할 벗으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워낙 가난했지만 태어날 적부터 타고난 낙천성과 무욕한 마음이어서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후배들에게 늘 소탈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던 시인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아로 남는다.

그런 시인은 1995년 백일장 심사 도중에 신부전증으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 ‘한의 미학’을 유려하게 제련해 내놓던 시인은 2년여에 걸친 힘들고 괴로운 투병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1997년 6월8일 64세로 순수했던 열정적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고 이승을 떠난다.

그러나 시인은 갔어도 그의 체온과 숨결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며 유년기를 보내고 자란 경상남도 사천(삼천포)에 박재삼 문학관으로 다시 탄생해 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창공에 자유로운 날개짓으로 비상하는 갈매기와 함께 뜨거운 호흡으로 숨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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