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고(故) 박용래 시인을 만나보고 싶어라
[평론] 고(故) 박용래 시인을 만나보고 싶어라
  • 류환
  • 승인 2020.05.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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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 그려내는 향토와 서정을 귀결하는 소묘…
류환 시인, 예술평론가, 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 예술평론가, 행위예술가] 꿈속에서나 생시에나 한 번도 선생의 생전 모습을 뵌 적은 없지만 사진 속에 비친 연약해 보이는 모습에서도 예감돼 듯 가슴속 뜨거운 눈물 한가득 울렁였을 우리 지역이 배출한 향토색 짙은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고(故) 박용래 선생(朴龍來 先生, 1925~1980)

빛바랜 사진 속 모습에 비친 배경으로 보아 건물과 집들이 나지막한 어느 골목 앞(시인의 오류동 집 앞으로 추정됨) 스산하게 바람 불어 을씨년스런 겨울, 하얀 목도리와 벙거지를 깊게 눌러쓴 조그마한 체구에 발 시리게 신은 흰 고무신과 헐렁한 바지를 입고 윗도리를 당신 맘대로 걸친 가녀린 몸매,

미치도록 사무치는 가슴에 청초한 인상으로 순한 어투를 자금자금 얘기했을 슬픔 가득 머금은 마음아린 울보시인,

상시 우리 곁에 오래전부터 머물러 있어 다양한 문학지를 통해 시의 성격을 짐작하고 있는바 시인의 쓸쓸한 외길인생을 돌아보며 작품을 따라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

선생이 펴낸 첫 번째 시집 ‘싸락눈’(심예사, 1969)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필자에겐 여러 가지 문학적인 짜임, 구성, 시어 등에서 시선을 고정케 하는 한편의 시(詩)가 상상을 넓히며 익숙하게 다가오는 ‘저녁 눈’이 대표적인 시로 읽혀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馬) 호롱불 밑에 붐비다’로 시작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저녁 눈발이 붐비는 4행의 길지 않은 시(詩)로 자연적인 순응을 기반으로 향토와 서정을 함축하는 시인의 관념 속에 펼쳐지던 생생한 상황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하는 흔치않은 시편이다.

다음은 시선에 잠겨있는 선생의 시 ‘저녁 눈’을 살펴본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 눈’의 전문이다.

위 시에서 보이는 입체적인 공간적 배경과 설정들은 목가적인 풍경들을 잘 드러낸 시이기도 하지만 앞서 한 장의 흑백사진이 연상돼 눈(目)에 선하게 드러나는 상황과 자연의 풍광들을 시정(詩情)으로 바꾸어 눈발이 내리는 일상적인 겨울 오후를 어렵지 않게 풀어내어 풍미를 한층 고조시킨다.

이런 현상들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말(馬)을 기르는 곳이라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스치고 지나칠 일이겠지만, 시인의 앵글에 잡히는 심상은 사사로운 자연현상조차도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는 평범함을 뛰어넘는 관찰력으로 잡다한 시상 전개를 배제하고 시적 압축으로 섬세하고 세련되게 간결한 함축미를 차용해 품격을 높인다.

요즘말로 표현하자면 당시의 상황 전개를 심미안적 내성으로 확대해본다면 혁신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승화시켜 하나의 훌륭한 작품으로 환치시키고 있는 시적 감흥에 충만히 젖어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도 충만하게 한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말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외엔 동일한 구분으로 4행의 반복에 불과한 이 시는 ‘저녁 눈’을 통해 사라져 가는 것, 소외돼 있는 것, 그리고 잊혀져가는 추억 등 자신의 시간을 뒤돌아보고 있는 시력도 크게 보인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을 반복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리듬의 효과와 함께 눈이 내려 쌓이는 시간의 흔적과 삶의 모습을 조응한다.

사실 ‘저녁 눈’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고 또한 위에서 밝히고 있는 네 가지의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대상물들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은 자연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으로 가미해 내려 쌓이고 있는 눈발을 연상 작용으로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문명이 밀어내는 거센 변화의 물결에 쓸려 사라져버릴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자연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기되고 ‘붐비다’로 축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시인의 심상을 잘 드러낸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 점차 사라지고 있는 변두리 즉 향토적인 사물 위에 타인의 시선까지도 과거의 시선으로 머물게 하고 있음이 역력하다.

비슷한 ‘겨울 밤’이란 시 한편을 더 음미해본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여기에서도 읽혀 드러나듯 선생은 역시 눈발이 내리는 겨울밤, 마음속으로 절실히 고향을 떠올리며 밤을 지세우고 있다.

그래서 선생의 시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향토는 즉흥적이거나 의식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고 상례적인 명상의 존재들로 떠올리거나 무심결에 그려지는 자연은 더욱 아니다.

또 작품에서 보이듯 시의 특징은 행간의 여백을 중시해가며 행간 속에 숨은 소묘법의 일환처럼 반복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반복적인 배열은 애상적인 분위기들을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해 더욱 선명한 풍경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도록 내리는 눈’도 ‘저녁 눈’과 같은 형식으로 마찬가지인 셈이다.

더불어 밤에 내리는 눈은 농민의 삶 속을 그리는 터전의 일부인 ‘마늘밭에 내리는 눈’이며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라는 달빛도 농민들의 보금자리인 초가집 추녀 끝에 쌓이고 있어 소년기 입력되고 저장돼 축적된 시간들을 끄집어내 눈(目)에 밟히는 풍경들을 재환류시켜 잘 드러나게 묘사한다.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마을’ 역시 향리 밖을 벗어난 옛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물장구치던 냇가에 다다르고 싶은 심정을 깊숙이 떠올리고 있다.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라고 한 부분에서도 초롱불이 꺼진 깊은 밤 마당 한구석에 ‘바람은 잠을 자리’라고 평온하고 순박한 농촌의 겨울밤을 서정의 한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음을 본다.

다음은 ‘연시’(軟柿)라는 시이다.

여름 한낮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작품의 이미지를 떠 올려볼 때 한 폭의 고고한 난(蘭)촉을 연상케 한다. 깔끔하고 꼿꼿하지만 부드러움도 물씬 묻어난다.

시인의 시선 속에 비친 그림은 14행으로 배열하고 있으며 뜨거운 여름 땡볕을 받아 돌담 위로 크게 자란 감나무에 매달려 붉게 익어가는 감을 가을 서리와 눈 내리는 겨울, 깊은 잠까지 그리고 겨울 어느 제삿날로 이어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연속성이 뚜렷하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거쳐 계절로 이어지는 현상을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밤 제사상에 ‘심지 머금은’ (필자의 입장에선 꼭지를 매달은) ‘흰 종발(종지 그릇에 위에 놓아진 감)로 빛나다’라고 간결하고 있다.

상위 시에서 보이는 구성과 심상의 이마주로 보아 시간적 추이 과정에 입각한 시상 전개에 맞춰 흘러간 흔적의 치밀한 현상을 꾀해 연동작용의 변화를 보여줘 세월의 흐름까지 시인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읽혀지는 계절은 역시 ‘눈’ 내리는 겨울밤이다. 선생은 유독 겨울과 깊은 밤, 내리는 눈, 비추고 있는 빛 등을 자주 차용한다. 이는 애상적 정서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재생적 감상에 힘입어 독특한 토속미학을 형성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그야말로 눈 내리는 고요한 겨울밤을 서정의 가슴으로 구가하는 생명력 깜박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에 독자의 감수성을 모으게 한다.

읽어보아 알 듯 선생이 특히 애정을 갖는 소재들의 특징은 현대문명 사회에서 사라져 없어져가는 것들이 대부분으로 농촌에서 태어나 이를 보고 자란 소년기의 기억들을 되살려 서민들의 애환들이 서린 풍경들을 그려내는 작품들로 이를 끄집어내어 차분하면서도 절묘하게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옹기종기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명체들을 붙잡아 향토에 깃들은 정한의 관점들과 리즘(흐름)들을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평소 필자가 선생의 글을 읽고 느껴오던 일사들로 삶속에서 체감하고 익숙해져 무의식 영역까지 시인에게 관계되는 구성과 내용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헤아려 본다면 세상 만물들에게 친근한 눈빛으로 다가갔을 몇 가지들을 나열하자면 아마도 이러했을 것으로 짚어진다.

눈물로 가슴속에 생명력 움틔우는 심상

앞산 강 건너 시집가 먼저 이승을 떠난 홍래 누이 보고프면 쪼그려 앉아 그쪽을 바라보면서 담배연기 허공에 날리며 울고.

싸락눈 내리는 겨울, 말(馬) 발굽에 쌓이는 눈雪을 보면 큰 눈 껌뻑였을 조랑말 발 시릴까봐 울고.

가난한 시인 부인과 사별해서 낙심하게 늘어트린 어깨를 보면 어찌할 바 몰라 흐느끼며 울고.

향리 친구들을 만나면 서연 했던 예 옛 시절 그리워 와락 껴안고 싶어서 울컥울컥 반갑도록 울고.

앞마당에 심어놓은 채소들이 시들면 시들었다고 울고, 감나무에 꽃이 피면 피었다고 울고,

빗물이 흘러 땅에 고이면 고였다고 울고, 옆집 갓난아이 배고파서 울면 왜 우냐고 보채듯 울고.

막걸리 한잔 한잔마시다 거 하면 퍽퍽한 가슴 다잡지 못해 세상살이 한탄하며 사무치게 또, 울고.

응어리져 떨리는 가슴가득 쓸어안고 허구 헌 날 맨 날 눈물만 훔쳤을 축축한 소맷자락에 스민 사연, 사연들을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보듬어 감싸는 그의 따뜻한 여린 마음이 잠에서 깨면 종일토록 눈물샘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돼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위로하며 평생 글을 써야하는 세밀함으로 예민하고 풍성한 타고난 시인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원고지를 채우는 일상이 지속됐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다.

시인의 잠재된 의식에 내제된 너울들과 상시 읊조렸을 떨리는 가슴에 현미경을 갖다 대보면,

슬픔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차갑게 멀어지는 이별처럼 눈물을 조아리며 싸늘한 바람은 머리채를 잡고 와서 구석구석 모서리에 쌓이고,

방황은 안주할 수 없어 밖으로 떠도는 집시의 이방인처럼, 유랑자의 팔자처럼, 광대의 풍각쟁이처럼, 나그네의 발걸음처럼 맴돌고, 맴돌고 또 맴돌다 지쳐 쓰러지면,

자신도 축축이 적셔져서 막걸리에 푸념이라도 하듯 술잔을 들이키며 원고지를 끌어 앉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기 위해 갈급한 고독했을 시간들,

지각은 감각이 흔들릴 때 비로써 움직인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 지워지고 비워지는 어둡고 외로운 밤이 돼야 묵은 해갈이 풀리듯,

세상 누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령에서 전체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애정이 닿는 앞, 뒤 안 뜰마다 눈시울을 붉히던 맘 여린 심성,

새벽 내내 나약한 허정도 애정의 시선으로 떨칠 수 없는 침잠된 그림자마냥 죽을 때까지 껴안고 다녔을 순수한 서정의 울보.

누가 무엇을 자랑할지라도 상관 않고 내 맘 편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길, 목숨이 다할 때까지 걸어 실천적 시학 혼 눈물로 흠뻑 적신 고(故) 백용래 시인을 만나보고 싶어라.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인식순환

뒤 돌이킬 수 있다면 막걸리 주전자라도 받아놓고 하얀 눈 내리는 겨울밤 지 세우며 흰 눈처럼 순수하고, 수채화처럼 선명하고, 유리처럼 투명한 55세 심안을 읽을 수 있었다면,

한참을 가야 비로써 다다를 먼 산과, 강과 들에서 보이는 곡선이 아름다운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에 마지막으로 선을 긋듯 붓끝에서 간결히 머물다간 돋보이는 여백의 그림들을 보았다면,

자연적인 향토색 짙은 ‘월훈’의 허전한 노인의 삶 속에 거울을 비추듯 자전적 생을 내다보는 ‘달무리의 뜻’을 절실히 그려냈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비쳤을 직관을 느꼈었다면,

훌륭한 경의는 허수름한 대포집 술 주전자를 올려놓은 조촐한 탁자 위로 건네받는 막걸리 잔속에 사물들이 소생하고 움터 글귀로 귀결되는 시학정신을 느꼈었다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잔상 속으로 스미는 연민들을 보듬는 시적 표정으로 떨리듯 술잔을 들고 촉각의 진원지에 물을 적시듯 밑으로 가라앉는 가슴을 들여다보았다면,

그것은 선생 인생의 사사로운 깊은 시름이기보다 또 무력이라기보다 문학을 향한 경건한 대응으로 수용하고 극복해 원고지를 채우려는 목적에 주력한 애정을 담는 슬픈 정서이었겠지만,

애착해 천착됐던 섬세한 지심들은 위업이 되고 시에서 시인으로 절제와 간결성을 노래하듯 군더더기 없는 대화라도 한번쯤만 나누었다면 흔치않은 글과 많지 않은 시인의 감각을 알아 차렸을 텐데….

6,70년대 한국 문학발전 토양에 자양분을 입김처럼 불어넣어 크나큰 족적을 남기는 시인으로 주목돼서 평가받는 문인으로 딸(박연, 서양화가)은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이라며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으로 운명 지워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 말한 것에서도 짐작되듯,

간과할 것 없이 자유분방했을 의식구조의 구조망을 가진 예지적 깊은 사유로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아 무엇인가 요구하듯 눈물짓는 어린아이 마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감성의 시인으로 우리 지역을 넘어 한국문단을 빛낸 고(故) 박용래 선생의 시울 겨운 눈치라도 흘깃 채고 싶은데,

야속한 세상은 낙엽 한 잎 떨어지는 이치라도 불변의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소멸이어서 사라져 없어지게 마련이고 사람은 망설이지만 세월은 망설이는 법 없이 흘러 지나가는 데 양보가 없는 법이고,

또 한번 흘러간 인생은 풀어진 태엽처럼 되감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은 대자연이 실행하는 가장 완벽한 섭리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어서 어쩔 수는 없는 통속의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소멸이 갖고 있는 역설적 의미를 다시 한번 숙고해보면 그것들은 사라졌다 다시 생명체를 갖고 태어나는 생성과 불과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 세월의 흐름과 지난 과거의 리듬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보고 있어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든 소멸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위업과 업적인 성과야말로 특히 예인들한테는 훌륭한 작품을 통해 재생되고 있다는 것은 소멸과 생성이 반복돼는 또 하나의 인식적 순환 고리로 되살아나 영원케 하고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아니 영원히 생성되고 재생돼 보문산 자락에 세워진 시비는 우리 지역 시인들의 이마에 손을 짚고 서걱서걱한 가을바람 서둘러 겨울을 재촉하는 당신이 부르던 호롱불의 혼 앞에 낙엽이 싸인 채 침묵하고 있는 선생의 시비(詩碑)를 우러러보며 그 위 손수건 한 장 올려놓는 마음으로 조용히 마무리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아들인 박노아가 ‘아버지를 회상하며’라며 활자로 남긴 글귀 한 구절을 옮긴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가을, 감나무 이파리, 감새의 수리성,

오래 전 일입니다.

방에서 큰 울음소리 들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쳐다본 아버지의 모습.

아…

전 시인을, 우수수 떨어진 청시사의 저녁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름의 행방을 묻지 말자”, “구름은 영원한 방랑자.”

두 줄의 시구를 읊고, 육 개월 후 구름이 되어 가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시인의 멀지않은 위급한 저녁놀을 예감한 문구다.

글을 마치며

오래 전 읽어봤던 소설의 지은이가 기억 속에 가물가물 맴돌다가 한참 만에 떠오른다. ‘잃어버린 지평선’의 작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말한 한 구절이 잠시 침묵케 한다.

“어차피 무의미한 삶이라면 오래 산다는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라고 뒤묻는 메시지가 긴 여운을 남기며 허상이라 여기던 실상들이 자신 뒷모습에 비추는 그림자가 마냥 조용히 바닥에 가라앉는다.

여기에 필자도 한마디 덧붙이며 다시 옷깃을 여민다.

“평범한 인생의 노선을 따라가는 안일무사 한 삶은 대체로 미진(微塵)에 머물다 그치게 마련이다”라고….

고(故) 박용래 선생을 생전 가장 많이 만나 뵙던 여러 문인 중 한 분이시고 평생을 우리 지역에서 언론인으로 전국지방신문연합회장을 엮임하셨던 안영진 원로선생께 다양한 비사들을 들은 바 있어 이야기가 충만하다.

또 문학을 비롯해 미술단체를 이끄는 리헌석 평론가께 고인이 발간한 시집들을 부탁해놓은 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리라 믿어 길지 않은 시일 내로 두 번째 글을 이어 정리하기로 하고 가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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