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전기
[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전기
  • 류환
  • 승인 2020.06.1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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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조선 전기(1392년~약1550년)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우리 역사에서 지난 과거 그림의 변천사와 흐름은 어떠했는지, 또 그림을 가장 활발히 그리고 수준 높은 작품들을 화업(畵業)으로 이어간 화가들은 누구이며, 가장 많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인 때는 언제였는지 살펴본다.

그림을 그리는 필자도 항시 이러한 부분들을 궁금히 여겨오던 터 우리 그림의 실상들과 변천사를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되겠기에 시간을 내어 탐구해보기로 한다.

더불어 당시 어떤 화풍들의 그림들이 성행됐으며 우리 역사에서 글과 그림, 인물 등의 작품완성도를 높인 것은 언제였는지도 들여다본다. 유추컨대 가장 활발한 화원들과 그림들이 성행한 것은 바로 조선시대가 아니었을까?

이유는 궁중 안에 도화서(圖畵書, 그림을 그리는 작업 공간)가 만들어져 궁중에 필요한 그림을 그린 곳이 생겨난 것이 조선시대 초기이고 화가 또한 가장 많이 활발한 활동을 한 시기 정도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그림과 관계되는 내용들을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조선 전기부터 중기, 후기, 말기로 나눠 그림의 작품들과 성향 또 화원(화가)들을 알아본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왕족들과 선비 중에서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과 전문적으로 그림만을 그리는 화원들이 많았었으며 그림에 대해 이를 기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대체로 그림의 주제는 산수, 인물, 동물, 꽃과 새 그리고 궁중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궁중기록화와 장식화, 초상화, 민화 등 다양한 그림들이 이때 가장 많이 그려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의 다양한 그림들의 기법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극적이었으며 그것을 조선시대의 화원들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승화시키고 시대적 배경에 맞게 발전시켜왔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그림의 역사는 특성상 4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조선 전기(조선건국 1392년~약1550년), 중기(약1550년~약1700년), 후기(약1700년~1850년), 말기(1850년~1910년)으로 나눠지는 것을 짐작할 수 있어 이를 나열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전기(1392년~약1550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조선 초기에는 4대왕인 세종대왕(재위 1418년~1450년) 때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시효가 된다.

세종대왕 때 문화는 9대왕인 성종(재위 1469년~1494년)을 거쳐 11대 왕인 중종(재위 1506년~1544)년과 13대 왕인 명종(재위 1545년~1567년) 때까지 이어지며 조선 전기 문화는 조선시대 문화의 핵심적 뿌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뛰어난 화원들과 화가들이 활발히 활동을 했다. 반면에 남아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아 아쉽지만 당시의 대표적인 화가들이 누구였는지 탐색해 본다.

안견과 강희안 그리고 이상좌 화가의 등장

안견(15세기)은 세종대왕 셋째아들인 안평대군(1418년~1453년)의 도움으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된다. 시인이자, 음악가이며, 서예가이고, 화가인 안평대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의 그림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안견이 좋은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있도록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여주며 조언을 해줘 안견은 시야를 넓힌다.

어느 날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복사꽃이 만발한 복사꽃 마을을 꿈꾸고 나서 이야기를 배경으로 안견에게 달려가 그림을 그릴 것을 권고한다.

이때 탄생한 그림이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몽유도원도’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사이좋은 우정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안견의 작품으로는 ‘사계절의 산수(사시팔경도)’가 지금도 대표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안견은 산수뿐만 아니라 초상화, 꽃, 말, 집, 기러기 등을 잘 묘사했다. 특히 안견은 중국 복송의 이성과 곽희의 그림기법인 ‘곽희파 화법’을 인용해 자신만의 산수화 세계를 이뤘다.

곽희파 화풍은 사람이나 동물은 아주 작게 그려 넣고 산과 바위 등 주변배경은 아주 크게 그리는 특징을 보여줬다.

강희안(1417년~1464년)은 세종대왕 때 활동한 선비 화가이다. ‘물을 바라보는 선비(고사관수도)’라는 작품이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무성한 덩굴가지가 늘어진 절벽 아래서 바위에 기댄 채 물을 바라보는 선비의 모습을 묘사한 한가하고 태평스러운 작품으로 비유했다.

꿈속을 여행한 복사꽃 마을을 그린 ‘몽유도원도’처럼 산 천체를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인물을 가까이에서 보듯이 그리는 방법이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기법으로 여겨졌었다.

이런 그림기법을 ‘절파 화풍’ 이라고도 한다. 바위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강하게 대조를 이루고 나무에서 덩굴이 늘어지게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의 명나라의 대진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절파 화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유명해지기 시작하는데 강희안은 조선 초기에 이미 ‘절파 화풍’으로 작품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상좌(15세기 후반~16세기 중엽)는 어느 양반집 노비였는데 그림을 그리는 솜씨가 남달리 뛰어나서 도화서 화원이 됐다.

뿐만 아니라 이상좌의 아들인 이숭효와 이흥효 그리고 손자인 이정이 모두 그림을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상좌는 ‘소나무 아래 달구경(송하보월도)’을 잘 그려냈다.

구부러진 소나무 아래 한 선비가 노비를 데리고 걷고 있는 그림으로 그림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한 작품이다. 이상좌는 중국의 남송의 마원과 하규가 그린 ‘마하파’ 화풍을 즐겨 그렸다. 그러고 보면 조선 초기에는 다양한 그림방법의 화풍이 화가들의 손끝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법산수 화풍과 안견의 영향

화법의 다양성은 이뿐만 아니라 ‘미법산수’ 화풍도 성가를 이뤘다. 대표적인 화가로 최숙창(15세기)이 그린 산수그림을 보면 넓은 강을 배경으로 산과 언덕이 온통 구름 속에 잠겨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비가 개이고 난 산수의 고요한 모습을 말끔하게 느낄 수 있도록 산에 짧은 점을 찍어서 단정하고 간결하게 그리는 화풍이 유행했다. 이런 방법이 바로 중국 북송 때 미불과 미우인 이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미법산수 화풍’이다.

최숙창의 산수도, 15세기 후반, 야마토문화관.

‘미법산수 화풍’으로 그림을 남긴 화가로는 최숙창 외에도 이장손, 서문보 등이 있고 이밖에도 최경, 석경, 안귀생, 배연 등의 화가들이 동의적인 화풍을 잘 표현했다고 전해졌지만 이들의 실력을 확인할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근거가 되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16세기 초반에는 많은 화가들이 안견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산과 바위 등은 크게 그려 넣어 화선지를 채우고 사람과 동물들은 작게 그리거나 한족으로 치우치게 배치해서 그림을 그리는 안견풍의 그림은 후배들이나 지망생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친다.

조광조의 친구인 양팽손(1488년~1545년)의 산수그림을 보면 안견의 영향과 양팽선의 독창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의 화가들

안견의 영향은 모임 장면을 그린 ‘계회도’에도 두드러지게 잘 나타나 있다. ‘사간원의 친목모임(미원계획도)’은 사간원(왕이 하는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신하들을 탄핵하는 일 등을 담당하는 행정기관) 관리들의 모임 장면을 그린 작품들이다.

소나무가 서 있는 언덕 아래 선비들이 모여 있고 다리 위에는 모임장소로 짐을 들고 가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바로 안견의 ‘사계절의 산수(사시팔경)’의 영향을 받은 그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계획도와 같은 그림은 특별한 형식이 있게 마련이어서 쉽게 눈에 뛴다. 맨 윗부분에는 계획도의 이름을 큰 글씨로 각인한다는 것이다.

그림 중간에는 모임장면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과 관직 직급 등 개인에 대한 정보를 기록해둔다. 다시 말하면 계획도의 그림은 그날의 만남을 기념하는 그림이면서 정보를 담은 기록화인 셈이다.

이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년~1551년)은 조선 초기의 화가들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신사임당은 글, 그림, 글씨뿐 아니라 자수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줬다. 그림은 산수, 포도, 대나무, 매화, 풀과 벌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작품성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과 벌레를 소재로 한 그림은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워서 친근감을 더해준다.

또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 중에 이암(1499년~?)이 있다. 왕족출신인 이암은 ‘어미 개와 강아지’에서 천진난만한 강아지의 모습을 사랑스런 붓질로 살려내고 있다.

어미 등에서 잠든 누렁이와 젖을 빨고 있는 강아지 두 마리를 어미 개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너무 사랑스럽고 다감한 모습의 작품이다.

조선 초기에는 동물을 잘 그린 고운, 원숭이를 잘 그린 최수성, 대나무와 포도 그림을 잘 그린 신잠 등이 있다. 그러나 지금엔 작품이 거의 남지 않아 그들의 훌륭한 솜씨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더욱이 조선 초기의 그림들을 논하려 하는데 있어 중요한 사실은 우리 그림이 일본그림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이다. ‘대나무 화첩’을 그린 이수문은 일본에 건너가서 ‘소가파’라는 화파의 시조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문청이라는 작가는 국적이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가 문제가 되지만 그가 그린 누각산수에는 안견의 영향이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있어 조선 초기의 그림들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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