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중기
[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중기
  • 류환
  • 승인 2020.06.1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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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부터 말기까지… 조선 중기(1550년~1700년)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조선 중기에는 전쟁이 많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년)은 일본의 침략으로 전쟁이 반발하게 됐고 정묘호란(1627년) 과 병자호란(1636년)은 중국 후금과의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살기 힘든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화가들의 그림은 꾸준히 그려졌으며 화가들의 특색 있는 작품들의 많은 변천사를 꾀하는 시기가 됐다.

계속되는 절파화풍

조선중기에도 안견의 영향은 계속됐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김시(1524년~1593년)의 ‘눈이 그친 겨울의 숲(한림제설도)’를 참고해 작품을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시의 개성은 조선 중기에 유행하게 된 ‘절파 화풍’의 그림을 눈여겨보면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나귀를 끄는 아이(동자견련도)’에서 표현을 보면 소나무 뒤의 왼쪽 바위가 마치 도끼로 찍은 듯 하얀 부분과 검은 부분이 강하게 대조돼 있다.

김시의 ‘절파화풍’은 후배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김시의 손자인 김식과 김집은 물론이고 이흥효와 이경윤 등이 김시의 절파 화풍을 많이 따라 그렸다.

그중에서도 이경윤(1545년~1611년)은 조선 중기에 김시 만큼 활발한 작품을 창작한 화가였다.

이경윤이 그린 대표적인 ‘산수 인물’도 비스듬하게 솟은 부분에서 이경운의 개성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그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이를 가늠하는 화풍과 작의를 엿볼 수 있다.

이경윤의 아들인 이징(1581년~?)은 반면 ‘안견의 화풍’을 선호했다. 이징이 그린 ‘금으로 그린 산수도(이금 산수도)’를 보면 안견 작품의 화풍을 거의 흡사하게 그려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절파화풍’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함윤덕의 ‘당나귀를 탄 선비’를 보면 확연하게 그림의 화풍을 볼 수 있게 한다. 곧 쓰러질 듯 힘들어하는 나귀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이 그림은 지금까지 본 그림과 달리 사람을 아주 크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기까지 하다. 사람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산과 바위만 크게 강조한 안경의 작품이나 김시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선비를 감싸듯 뒤에 크게 배치되는 그림의 표현과 나무 그리고 잡초들이 우거진 화풍으로 보아 ‘절파화풍’의 그림임을 알 수 있다.

김시와 이경의 뒤를 이어 ‘절파화풍’을 파격적으로 그린 작가가 김명국 화가이다. ‘달마도’의 그림으로 잘 알려져 있는 김명국은 일본의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두 번이나 다녀올 만큼 당시에도 인기가 많은 작가였다.

‘눈 속에 길 떠나는 선비(설경산수도)’는 거침없는 붓놀림과 힘 있는 작품들은 김명국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어 개성이 넘친다.

그림으로 가풍을 잇는 집안

그렇다고 해서 조선 중기에 안견파 화풍과 ‘절파화풍’만이 유행했던 것을 아니다. 이정의 산수화 화첩을 보면 ‘남종화 화풍’의 그림도 등장하고 있다.

‘남종화’는 선비가 먹과 엷은 색으로 자기만의 마음세계를 담아내는 그림을 말한다.

이상좌의 손자이고 이숭효의 아들인 이정(1578년~1607년)은 비록 30세라는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남종화풍’을 받아들인 화가였다.

조선 중기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림을 화업으로 대대로 그림을 그리는 집안이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부분이다.

선비 집안 혹은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원의 집안에서 형제 또는 자식, 손자가 그 전통을 이어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이어온 화가들을 보면 김시- 김기- 김식- 김집과 이경윤- 이영운- 이징 또 이상좌- 이숭효- 이흥효- 이정, 윤의립- 윤정립, 조속- 조지운 등이 대표적으로 대를 이어온 화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경우도 있다. 한시각, 이명욱 화가는 집안끼리 전통을 이어가는 경우였다. 화원으로 교수를 지낸 한시각(1621년~?)은 김명국 화가처럼 일본에 다녀올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였다.

한시각은 ‘함경도 지방의 과거 시험(북새선은도)’이란 기록화에서 정확하게 짜임새 있는 구도와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기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173×94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중기 이명욱의 ‘어초문답도’ 173×94cm, 간송미술관 소장.

그런데 사위인 이명욱의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어초문답)’는 전혀 다른 느낌이 나타나게 표현했다.

그림을 보면 신나게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바람에 나부끼듯 거침없이 내려그은 옷 주름과 무성한 갈대가 조화로운 대비를 이루게 잘 표현시키고 있다.

한 집안의 식구들로 그림을 그렸지만 서로의 그림세계는 각자의 개성과 독특한 화법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대를 이어 화업에 종사한 경우이다.

한 가지만 그리다

조선 중기에는 여러 가지 분야를 모두 소화해내는 화가들도 많았지만 한 가지 분야만을 잘 그리는 화가도 있었다.

이런 특징은 산수나 인물보다 동물과 꽃, 새들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 특정 분야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김시의 손자인 김식(1579년~1662년)은 소를 즐겨 그렸고 조속은(1595년~1668년)과 그의 아들 조지운(1637년~?) 까치를 잘 그렸다.

김식이 그린 ‘소’는 눈과 뿔과 콧등에서 조선적인 정감이 물씬 묻어난다. 조속은 ‘나무위에 앉은 한 쌍의 까지(노수서적도)’에서 화면 가득 나무와 새들을 그려 넣었다.

네 마리의 새를 그려 넣기 위해 나무들을 배치 있게 그린다음 새들의 모습에서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도록 각기 다른 자세로 그렸다. 역시 새를 많이 그려본 화가의 솜씨임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세종대왕 손자의 손자(현인)인 이정(1541년~1622년 이후)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타고난 기질을 발휘해 뛰어난 선비화가로 알려졌다.

이정이 그린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풍족)’는 댓잎 끝에 점을 찍어 날카로운 대나무의 성질을 잘 드러낸다.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의해 오른팔을 다쳐서 왼팔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 이후로 더욱 그림에 매진해 뛰어난 그림들을 완성한다.

참고로 동명이인이지만 이상좌의 손자인 ‘이정’과 대나무를 잘 그린 ‘이정’은 이름은 같지만 다른 화가들임을 알린다.

어몽룡(1566년~?)은 뛰어난 솜씨로 매화를 잘 그리는 화가였고 황집중(1533년~?)은 포도를 잘 표현해내는 화가였다. 어몽룡이 그린 ‘달밤에 핀 매화(월매도)’는 구부러진 매화 가지와 새로 싹트는 가지를 하늘높이 뻗어나가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곧게 뻗은 매화가지에 매화꽃을 단출하고 운치 있게 그린 것이 매력적이다. 이정과 어몽룡과 황집중은 당시 ‘세 가지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화법으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에서 삼절’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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