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후기
[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후기
  • 류환
  • 승인 2020.06.1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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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조선 후기(1550년~1700년)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우리 문화의 부흥기’라 부르는 조선 후기에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들이 그려졌다.

21대인 왕인 영조(제위 1724년~1776년)와 22대 왕인 정조(제위 1776년~1800년)가 훌륭한 지도력을 발휘해 다스릴 시기였는데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미술을 받아들여 조선적인 문화를 강조했다.

후기에는 중기 절파 화풍이 수그러들고 새로운 그림들이 그려졌다. 지금부터 후기의 그림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사람의 혼을 그린 초상화

조선시대 그림 중에서 자랑할 만한 분야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어떤 사람의 인물과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됐다.

그중에서도 윤두서(1668년~1715년)가 그린 ‘자화상’은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자기 모습을 스스로 그린 작품을 ‘자화상’이라고 한다. 초상화는 수염 한 올까지도 다르게 그려서는 안될 만큼 정확한 묘사가 요구된다. 겉모습만 닮게 그린다고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 상태까지도 그릴 수 있어야 훌륭한 초상화가 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윤두서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풍속화, 인물화, 동물화 등 여러 분야의 그림들을 잘 그려냈다.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도 그림을 잘 그렸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재 초상’은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이재’라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여 선명한 그의 그림솜씨를 말해준다.

초상화는 한사람이 그린 경우도 있지만 두 사람이 함께 그린 작품도 있다. 김홍도(1745년~1816년 이후)와 이명기가 함께 그린 ‘서직수 초상’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조선 후기에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동물화’도 크게 발전했다. 개와 고양이, 닭과 호랑이 등은 친근하면서도 한국적인 감정이 물씬 묻어나는 주제가 많은 화가의 사랑을 받았다.

‘긁는 개’를 묘사한 김두량(1696년~1763년), ‘고양이와 참새’, ‘어미닭과 병아리’를 그린 변상벽, ‘딱다구리’를 그린 심사정(1707년~1769년), ‘소나무 아래의 용맹스런 호랑이(송하맹호도)’를 그린 김홍도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남종문인화의 유행

조선 후기에는 절파화풍 대신 ‘남종문인화’가 성행하며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산수화는 그리는 방법에 따라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된다.

남종화는 화려한 색을 절제하면서 먹을 주로 써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며 북종화는 여러 가지 색을 쓰기 때문에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남종화는 선비 같은 문인들이 주로 그려서 ‘남종 문인화’라고도 불렸다.

앞에서 밝힌 ‘딱따구리’를 그린 심상정은 ‘깊은 밤에 떠있는 배(강산야박)’에서 남종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먹을 엷게 우려내서 짙은 안개와 구름이 내려앉은 강가의 풍경들을 차분하게 그렸다. 특히 그림 안쪽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남종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제들이었다.

그림을 통해 선비의 지조와 올곧은 마음을 표현한 ‘남종문인화가’도 있었다. 바로 겨울 ‘소나무(설송도)’를 그린 이인상(1710년~1760년)이다. 이인상은 그림 속에서 선비가 지켜야 할 이상의 세계를 담백하게 그려냈다.

강세황 作 벽오청서도, 개인 소장.
강세황 作 벽오청서도, 개인 소장.

평생을 벼슬 없이 살다가 환갑이 넘어서야 높은 벼슬길에 오른 강세황(1712년~1791년)은 ‘벽오동 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는 선비(벽오청서도)’에서 신선한 느낌이 드는 남종화의 세계를 열어 보였다.

이 외에도 끝없이 펼쳐진 ‘강산무진도’를 그린 이인무(1745년~1821년), ‘산수화’를 그린 김유성(1725년~?)과 이재관(1783년~1837년), ‘빈산에 바람은 없고(공산무인도)’를 그린 최북(1712년~1786년 이후) 등 여러 화가들이 남종화를 그렸다.

이렇게 남종문인화가 유행하는 가운데 간결하면서도 산뜻한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윤제홍(1764년~?)이 그린 ‘옥순봉’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전통과는 달리 수채화 같은 기법으로 맑은 느낌이 나타나도록 그림들을 그려 작품을 남겼다.

진경산수화

조선시대 후기 그림 중에서 가정 독창적인 그림분야가 바로 ‘진짜 경치를 그린 산수화’라는 의미의 ‘진경산수화’다.

그렇다면 실제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화’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또 진경산수화는 실제로 있는 실경산수화를 그리되 그것을 그리는 방법까지도 포함해서 특별히 부르는 명칭이 됐다.

특히 18세기에 정선(1676년~1759년)과 정선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린 그림들을 위와 같이 불려졌다.

실경산수를 그리는 전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리는 방법이 우리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중국식의 기법이 차용돼 있기 때문인데 정선에 의해 완전히 한국적인 산과 강이 그려지기 시작하고 한복을 입고 갓을 쓴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선이 어떻게 우리 산과 강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사람들은 유명한 산과 바다를 여행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정선이 그린 ‘금강산’은 금강산의 전체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려져 있고 뾰족뾰족한 바위산과 낮은 산이 서로 비교될 수 있도록 양쪽으로 배치하고 있다.

정선은 금강산뿐만 아니라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비 개인 후 인왕산(인왕제색도)’도 그중의 하나다. 정선이 이뤄 놓은 진경산수화의 세계는 많은 화가에 의해 발전됐다.

인물들로는 강희언, 김윤겸, 정황, 김응환, 김득신, 김석신, 심사정, 최북, 이인문, 김홍도 등 셀 수 없이 화가들이 개성 있는 작품들을 후대에 남겼다.

정선의 ‘비 개인 후 인왕산(인왕제색도)’을 참고해서 그린 강희언(1710년~1784년)의 ‘인왕산도’를 보면 두 가지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강세황은 ‘영통동구’에서 참신한 색과 구도로 진경산수를 발전시켰다. 강세황은 김홍도보다 나이가 33세가 많았었다. 그러나 늘 친구처럼 서로 친하게 지내면서 그림에 대한 의논하고 했다. 김홍도가 ‘사인암’을 그릴 때도 서로 논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겸재 정선의 미공개작 日서 발견

지난 2019년 겸제 정선의 미공개 ‘금강산 산수화’ 4폭과 그림 4쪽이 日서 발견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이는 필자가 언론사의 문화부 전문기자로 활동하던 경험으로 주요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작품들을 눈여겨보면서 흘리지 않고 정보를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 글에 첨부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긴다.

‘조선 진경산수의 대가’ 정선이 금강산을 여행한 후 그린 산수화 ‘만폭동’, ‘벽하담’ 등이 일본에서 발견돼 미술경매인 옥션에 출품된 겸재의 ‘진주담’은 ‘국내에 처음 나와’라는 부제목으로 전하고 있다.

보도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후기 진경(眞景)산수를 개척한 겸재 정선(1676년~1759년)의 미공개 금강산 산수화 4폭이 일본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고미술 전문 경매사인 마이아트 옥션은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진경산수화 4폭을 일본에서 찾았다”며 “도쿄의 소장자를 1년여간 설득해 최근 국내에 들여왔고 4폭 모두 2019년 10월23일 열리는 경매에 출품된다”고 15일 밝혔다.

그림은 “내금강에 있는 ‘만폭동’, ‘벽하암’, ‘진주담’을 각각 그린 3쪽과 외금강에 위치한 ‘총석정’ 1폭이다’라는 내용이다.

생전 겸재는 평생 세번 이상 금강산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수의 금강산 산수화를 남겼다.

1711년 신묘년 가을, 처음으로 금강산에 오른 그가 여정을 따라 금강산 일대의 풍경을 표현한 13폭의 그림 ‘정선필풍악도첩’은 보물 제1875호로 지정돼 있다. 겸재는 이듬해인 1712년과 노년에 접어든 1747년에도 금강산을 유람했다.

조선 후기 금강산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명승지 중 한 곳이었다. 당시 산수화가 주로 중국산수화를 보고 그린 것인데 반해 겸재는 우리 국토에 펼쳐진 ‘진짜 경치’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려냈다.

마이아트 옥션은 “그림 4폭 중 ‘진주담’은 기존 겸재 작품 중 전해진 게 없어 유일하다”며 “지금까지 ‘진주담’을 주제로 그린 그림은 18세기 선비화가 진재 김윤겸이 병자년(1756년)에 그린 것이 최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보다 앞선 겸재의 작품이 나온 것”이라고 했다.

넓은 바위에 쏟아져 내리는 폭포, 그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이 경쾌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너럭바위엔 선비 둘이 앉아 있고 한 사람은 화면 오른쪽 아래에 서서 흘러 내려오는 진주담을 바라보고 있다.

‘벽하담’은 나무가 붉게 물든 금강산 벽하담의 가을풍경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진준현 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벽하담을 금강산 일부로 그린 게 아니라 벽하담 하나를 독립시켜 전체 화면으로 그린 것은 처음”이라며 “가을 풍경인 풍악산의 풍경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금강산은 계절 따라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져 봄에는 금강산, 여름엔 봉래산, 가을엔 풍악산, 겨울엔 개골산이라 불린다.

그 중 ‘만폭등’은 근경에 보이는 너럭바위를 중심으로 대소향로봉과 좌선암봉을 좌우로 배치해 화면을 장대하게 표현했다.

기이한 돌기둥을 중앙에 표현한 ‘총석정’에선 외금강을 유람하는 화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실물을 살펴본 전문가들은 “겸재의 필치와 화풍이 드러나 보이면서도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수작”이라고 전한다.

겸재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소장(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은 “진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림과 보존상태가 다 좋다. 미뤄 미공개 겸재 진경산수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반면 홍성표 한국전통문화대 석좌교수는 “실물을 보지 않고 사진만 봤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겸재 정선의 이름에 비해 낙관이 너무 크고 낙관이 그림에 물려서 찍혀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이견을 제시했다.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사진으로 봤을 때 그 부분이 이상해서 실물을 직접 보니 겸재 작품이 맞다. 전형적인 필묵법이 드러나 있고 색감과 계절 감각이 풍부한 수작”이라며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진주담’이 발견돼 의미가 크다. 내금강 3폭이 한 세트, 총석정은 별도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신윤복 作 단오도,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作 단오도, 간송미술관 소장.

우리 삶 속의 풍속화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진경산수화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그림들이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여러 생활 모습들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어 우리에게 다양한 면에서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된다.

대표적인 화가를 꼽으라면 역시 김홍도와 신윤복(1758년~?)을 들 수 있다. 김홍도 이전에는 윤서두와 조영석이 풍속화를 그렸고 산수화를 그린 김두량, 이인상, 강희안 등도 풍속화를 남겼다.

김홍도는 ‘씨름’, ‘서당’, ‘자리짜기’, ‘대장간’, ‘점괘’, ‘주막’, ‘빨래터’, ‘나룻배’, ‘기와아이’ 등 당시 농민이나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그려서 ‘풍습화첩’을 만들었다.

배경을 거의 생략하고 주인공을 두드러지게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그림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김홍도는 산수, 풍속, 인물, 선비들의 모습 등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 있어 다양한 분야를 그렸다. 또한 많은 친구와 선후배 화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들인 김양기와 친구인 이명기를 비롯해서 김득신, 이한철, 엄치욱, 유숙 등 많은 화가가 김홍도의 그림기법과 화풍을 따랐다.

김홍도가 주로 서민들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면 신윤복은 ‘양반과 기녀’, ‘무속’, ‘주막’ 등 특수계층의 사람들을 많이 그렸다.

신윤복의 ‘풍속화첩’ 속에는 연못가의 여인들을 비롯하여 ‘단옷날 그네뛰기 하는 여인’, ‘칼춤 추는 여인’, ‘양반과 야외에 놀러가는 기녀’ 등 세련된 도시의 여인과 양반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미인도’는 신윤복이 여인을 얼마나 섬세하게 묘사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윤복은 이렇게 양반들을 풍자하는 그림을 너무 많이 그려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의 그림은 ‘무엇을 보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를 간단히 논해 보았다. 이런 그림 외에도 대나무를 잘 그린 유덕장, 매화를 그린 박동보, 포도를 잘 표현한 이이문 등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한 가지만의 그림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윤서두와 김두량은 초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수화를 그렸고 진경산수를 그린 정선은 풀과 벌레도 잘 그렸다.

남종화를 그린 심사정은 꽃과 새를 잘 표현했고 풍속화를 그린 김홍도는 주지하다시피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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