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말기
[평론]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 조선 말기
  • 류환
  • 승인 2020.06.22 09: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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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조선 말기(약 1850년~1910년)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조선 말기에는 나라 안팎으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 수난을 겪고 있었다.

나라 안으로는 안동김씨가 세력을 잡아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행위를 끝없이 자행하고 있었다. 그러자 살기 어렵게 된 백성들이 동학운동을 비롯한 크고 작은 민란을 일으켰다.

나라 밖에는 일본, 영국, 미국 등 군사력이 막강한 나라들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강제로 우리나라와 무역 등 교류를 강요했고 결국 우리나라는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런 혼란스런 시기에 우리 화가들은 어떤 그림들을 그렸는지 알아본다.

김정희의 새바람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 놓인 만큼 그림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추사 김정희(1786년~1856년)를 중심으로 청나라의 새로운 학문인 금석학과 고증학을 받아들여 답답한 학문세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김정희는 그림을 그리려면 단순한 재주로서 그림을 그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해서 학문이 깊어져야 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추운시절(세한도)’은 실제로 있는 집과 나무가 아니라 마음속에 상상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김정희는 그림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추사체를 스스로 창안했는데 ‘난(부작란)’은 서예글씨의 사용 방법으로 완성된 그림이다. 따라서 김정희의 작업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함께 공부한 양반들은 물론이고 중인들까지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서 추사 김정희의 문향과 양반론을 잠시 짚어보기로 한다. 추사의 고택은 무기가 서린 바위가 보이지 않는 대신 솜이불처럼 포근한 야트막한 둔덕이 에워싸여 있다. 바로 이런 곳에서 문기가 무르녹아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를 발산하게 된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 김정희(1786년~1856년) 선생의 고택이 지금도 나지막이 자리하고 있어 필자가 고향에 가면 자주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도에 산재한 많은 명택 가운데 제일 먼저 추사고택을 찾는 이유는 그가 추사체라는 서예를 통해 조선 후기 예술의 정수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역시 추사 김정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정조시대 조선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를 이끌던 세력중심에 추사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만큼 그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추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서예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 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와 서권의 기에 무르녹아 손끝에서 피어나야 한다”라고 설파한 내용이 그것이다.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학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써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 향과 서권기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음이다.

특히 추사가 고안한 추사체는 서권의 기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의 향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다시 이어서 앞서 나온 조희룡의 ‘매화꽃이 핀 집(매화서옥도)’은 김정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김정희에게서 난을 치는 기법을 배웠지만 그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은 홍선대원군 이하응(1820년~1898년)은 고종의 아버지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이하응처럼 한 가지 분야를 전문적으로 작업세계를 이어가는 화가들이 많았다.

나비를 잘 그려서 ‘남나비’라고 명칭을 얻은 남계우(1832년~1888년), 특이하게 생긴 바위만을 그린 정학교(1832년~1914년), 갈대와 기러기를 많이 그렸던 양기훈(1843~?) 등이 대표적인 화가로 불렸다.

새로운 그림들의 등장

김수철과 김창수는 조선 후기의 작가인 윤제홍의 영향을 받아서 수채화처럼 느끼는 맑은 산수화 그림들을 선호했다.

김수철의 ‘소나무 아래서의 대화(송계한담도)’와 김창수의 ‘여름산수도’를 비교해보면 작품의 세계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그림보다 산뜻하고 깨끗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생각들이 이런 작품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김수철과 김창수는 산수화에서 색다른 그림세계를 추구했다면 홍세섭(1832년~1884년)은 ‘동물화’에 관심을 가지고 개성을 드러내는 작가였다. ‘헤엄치는 오리(유압도)’는 무척이나 이채롭고 재미있는 위트가 숨어있다.

또한 얼음을 깎아 놓은 듯한 산을 배경으로 파도치는 물가에서 두 마리의 오리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물가의 오리’도 예전에는 볼 수 없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는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민화와 마음을 달래주는 그림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대부분의 그림들이 선비 화가나 화원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혀 이름 없는 화가들에 의해 작업된 그림들도 많이 있다. 바로 민화가 그렇다.

민화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특별히 훈련된 화가들이 아니라 그저 그림을 좋아하거나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 그려서 서민들에게 선물로 주거나 팔거나 하던 그림들을 말한다.

어느 정도의 돈을 받고 주로 장터에서 거래하던 그림들이기 때문에 주로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들을 그려서 팔았다.

그래서 민화를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그림들을 원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어려운 산수화나 남종문인화보다 마음을 달래주고 힘을 줄 수 있는 그림들을 좋아했다.

과거 급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잉어 그림을, 돈이 많이 생기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란꽃 그림을, 오래 장수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연꽃 같은 그림들을 선호했다.

또 다치거나 병이 들어 돈을 잃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도 하고 희망을 주기도 하면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림들이 성행했다.

채용신 작 황현 초상화. 구례 매천사 소장.
채용신 작, 황현 초상화. 구례 매천사 소장.

조선 시대 마지막 초상화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채용신(1850년~1941년)은 흔들리지 않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초상화에 매진한 화가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라 불리는 채용신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려서 군수를 지낸 화가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가 노년을 보내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의병들의 모습을 표현해 그려냈다.

채용신이 그린 ‘황현 초상’의 ‘황현’이란 사람은 나라가 망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해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다.

이를 반영하듯 꼿꼿하게 앉아 있는 황현의 초상화에서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의 모습을 수염 한 올까지 세밀하면서도 밀도 있는 작업으로 꼼꼼하게 그려 완성한다.

장승업

조선시대의 마지막 그림을 이야기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가가 바로 장승업이다.

장승업(1848년~1897년)은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그림을 하는 집에 들어가 집안일을 하면서 보냈다. 비록 가난하고 배운 것이 없어도 타고난 그림솜씨를 가지고 태어나서 그림으로 명성을 떨쳤다.

장승업 작, 호취도. 호암미술관 소장.
장승업 작, 호취도. 호암미술관 소장.

장승업은 배운 것이 없어서 이인상이나 김정희 화가처럼 멋진 분위기에서 나타내는 남종 문인화를 그릴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뛰어난 그림실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렸다. ‘세 명의 신선이 시간을 묻는 그림(삼인문연도)’은 장승업만의 그림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평이 나있다.

거친 듯하면서도 힘이 있는 붓질은 상상 속에 등장하는 신선들의 모습을 생생히 느끼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달라는 요구대로 그림을 그려준 장승업은 어디 한 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자유롭고 자연스런 본성대로 술을 즐기며 마음대로 붓질의 기승전결을 살려 자기의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구축한 작가이자 괴팍한 성격을 가진 말 그대로 예술의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낸 소유자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졌다.

또한 장승업을 따른 제자로 안중식과 조석진이란 화가가 있는데 장승업 작업을 좋아한 이 두 사람에 의해 ‘한국근대미술’의 시대가 열리는 중요한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이때 안중석, 조석진 화가는 ‘서화미술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낸다.

그 단체에서 유명한 화가들이 태어나는 시발이 되는데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화가들로 ‘김은호,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이 한국을 대표하는 훌륭한 작가들로 명성을 얻고 작품들이 알려지는 계기가 형성된다.

따라서 이들이 모여 그림공부를 지속적으로 연마했고 그 당시 그 화가들에 분투와 노력에 의해 아직까지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시대의 그림은 근대로 이어져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의 족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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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창호 2020-07-01 14:18:25
좋은 기사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