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상편)
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상편)
  • 류환
  • 승인 2020.07.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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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기행으로 문단에 남긴 굵고 짧은 단편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천재적인 고(故) 김관식 시인의 글을 쓰기 전에 앞서 가늠하는 몇 가지의 체험이 있어 그를 상기하며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는 필자도 선천적으로 보통사람들보다 견줄 수 없는 뛰어나 벗과 오랫동안 같은 향리에서 자라며 작품들을 주고받고 교류와 소통을 나누던 비슷한 사례가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끌려 서두에 벗을 고려해가며 이를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거나 너무나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는 것도 호기가 잔뜩 요동하는 일임엔 틀림없어 잔잔한 미동이 인다.

재주가 아주 특별히 뛰어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천재적으로 독보적인 사람을 대하며 이를 탐구하는 입장은 마치 미지의 어떤 대륙을 발견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궁금증이 가일층 밀려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간의 크기는 그 대륙의 크기보다 무한한 크기의 비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어떤 신대륙의 크기보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륙은 아무리 크더라도 측정이 가능한 유한성에 머물러 있지만 천재적인 인간두뇌의 한계는 불가측한 무한한 사정 밖의 것으로 단박에 읽어내는 것이 아니어서 무한의 존재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사람이 예측불허한 차원에서 역사적인 흐름의 대명사로 또는 대가나 거장에 이를 때엔 그이의 드러난 발자취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처음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가슴이 더욱 설레는 일로 심리적인 가중이 실리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지면을 통해 필자가 탐구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벗도 김관식 시인과 흡사 비슷한 상황 속에서 존재하다 떠난 인물이어서 다음 기회에 발표하기로 한다.

이번엔 주제에서 보듯 충청도 논산, 강경이 낳은 인물로서 이미 몇몇의 문인들이나 평론가들이 평가한 글들이 있으나 이에 연연하지 않고 필자는 기록자의 잣대에 맞춰져 눈금 속에 나타나는 표시대로 선을 잇고자 한다.

다만 밝혀진 큰 범주에 벗어나지 않는 경계에서 그의 활동상들을 보지 못한 필자의 입장에선 성장과정과 행로들은 자료를 통해 확인하고 주지시 되는 그의 작품들을 분석하고 이를 나열하는데 중점적으로 비중을 두고 해석하기로 한다.

물론 어떤 이가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소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며 평론의 내용 또한 이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인의 방식과 공식을 토대로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위에서 밝혔듯 최대한 대상자의 본질과 내면을 지배하고 확장되는 정점에 다다른 작품들을 위시하는데 진입하여 역점을 두고 이를 필하고자 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유는 오랫동안 그에게 골똘하고 생각에 머무는 어떤 상들을 그려가며 완성하는데 시일이 걸리더라도 무엇보다 겉모습 정도를 눈으로 스케치하듯 그리기보다 가능한 한 그의 속내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주인공의 의식적 소양들을 내외, 상하, 좌우를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귀결시키는 것이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는 방법이고 각자의 상상을 다소 유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그동안 필자가 다양하게 글을 쓰는 작업을 해오면서 짧은 필력이지만 느껴오던 하나의 방법으로 글을 쓰고 읽는데 평소 견지하던 생각들을 감안해 가며 그의 지난 행로에 광기(狂氣)들로 점철된 궤적에 손전등을 비춰 천천히 따라가면서 조명해 보기로 한다.

프롤로그-

한국문단에서 천제시인으로 불리며 기행적인 언행과 파행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문단 일각에 그야말로 파격적인 도전과 돌출들을 일관하다 짧은 인생을 살다간 고(故) 김관식 시인,

그는 과연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고 무슨 작품들을 남겼는지 또 당시의 상황들을 어떻게 전희(前戱)됐었으며 어떤 작품들로 심경을 토로했는지 뒤따라 투영되는 그의 파란만장 했을 일사들을 펼쳐보고자 한다.

앞서 필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인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었으며 이에 대해 의문과 호기로 그의 행로를 언젠가는 따라가 볼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천재적인 기인들의 행적들이 필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기 드물게 태어나 주변에 이목을 받으며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어서 궁금증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신경을 유발하거니와 일반인들에게도 상식을 뛰어넘는 예측하기 어려운 언행들로 주변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대반사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이러한 천재적인 이들의 사례들은 드물지만 한둘이 아니고 이들의 행위들과 앞서가는 시냅스의 연결고리는 많은 부분에서 화제를 낳는다.

더불어 일반인들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추측과 예지적 돌출은 추종을 불허하는 면에서 어쩌면 일반인들이 따르지 못하는 한계에서는 바라뵈는 이들에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정상적인 증상이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으나 그중 하나가 이들을 굳이 의학적인 용어를 빌어 비유하자면 인체를 4차원에서 촬영해 영상으로 볼 수 있는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같이 뇌파가 움직여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판단된다.

마치 자기공명장치를 갖춘 생화학의 기기들처럼 전파를 전사한 후 자기장을 측정하여 확인되는 것처럼 표시로 나타나는 것이 이들이 갖고 있는 놀라운 부분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들은 필자의 체험으로 경험한 시각이고 견해다. 이들은 이러한 기기들처럼 움직이다가도 사고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휴식과 안정을 위해 스스로 정신적 육체적 쾌락을 찾아 열중하고 잠잠하다가 또다시 광적인 기행을 나타내는데 거리낌 없는 것도 두드러진다.

특히 이들의 독특한 행위들은 무의식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며 남들의 의식과 무관하게 행동을 자행하고 이들의 본령이 마치 예술의 영역인양 이를 추구하는 천재들 다수 대부분이 예술분야에 자리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는 무에서 유를 경작해내는 과정을 거쳐 세상에 없는 논리와 이치로 새로운 경지에서 창작이란 산물의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고(故) 김관식 시인(1934~1970)의 일대기

고(故) 김관식(金冠植) 시인의 본관은 사천(泗川)이고 호는 우현(又玄)으로 충남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라는 한적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서원의 전교와 향교의 제관을 맡아오던 부친 김낙희(金落羲)와 모친 정성녀(鄭性女)의 차남으로 넉넉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1934년 산수유와 철쭉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화창한 봄 첫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나온다.

태어나면서부터 심상치 않은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1940년 7세 때 강경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유년기부터 뛰어난 모습을 보여 한학과 서예를 익히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배워 주변을 놀라게 하는가 하면 이즈음 시를 외우기 시작해 한시와 현대시를 포함해 약 1000수를 외웠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에 김관식은 강경의 좁은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해의 반년씩 괴나리봇짐을 지고 인근의 공주, 부여, 청양 등지를 다니며 외부의 문물을 익히는 비범함을 어린나이 학창시절부터 나타낸다.

그런 김관식의 괴이하고 돌출된 행적 때문에 사람들은 ‘신동’이라고도 하고 ‘미친 아이’라는 호칭을 이름 앞에 붙이기 시작한다.

타고난 재질로 1952년 강경상업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며 이미 그는 고교 시절부터 최병심, 정인보, 최남선, 오세창 등 당대의 한학 대가들을 찾아다니며 다방면에 폭넓은 학문을 섭력한다.

더불어 이때부터 동양적인 감성과 습성을 지니게 되며 이를 계기로 의식 깊숙한 내면에 전통사상의 뚜렷한 의식이 잠재력 속 깊게 물들기 시작한다.

강경상고를 졸업한 뒤 충남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고려대학교로 적을 옮긴 후 다시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으로 편입하지만 4학년에 중퇴하고 만다.

이는 천재적인 사람들의 대부분이 독특한 기질로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으며 세상과 상관하지도, 연연하지도, 고민하지도 않고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상당수로 이런 절차를 밟는데 그도 역시 이 길을 선택한다.

문단의 벗으로는 ‘현대문학’에 추천된 시인 박재삼을 비롯해 천상병, 신경림, 고은 등 한국문학에 정점에 다다를 당대의 최고 시인들과 교류를 맺으면서 경기도 여주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사회에 출발한다.

1954년 서울공업고등학교, 서울상업고등학교의 교사와 세계일보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재직한다.

그러던 중 1960년 서울 용산 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

이듬해 세검정에 있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울 홍은동 산 1번지로 이사해 무허가 블록집을 지어 가난한 이들에게 팔기도 하며 한동안 소일한다.

이때에도 호방한 성격과 희귀한 동양적 예지, 한시적 소양 그리고 남다른 기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지만 끊을 수 없는 시와 술로 지내다가 1970년 간암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본격적인 문단의 활동은 1955년도 ‘현대문학’에 서정주의 추천으로 시 ‘연」(蓮)’, ‘계곡에서’, ‘자하문 근처’로 문단에 등단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단활동 이전에 이미 처녀시집 ‘낙화집’(1952)을 조지훈의 서문을 받아 출간하게 된다.

이형기, 이응로와 함께 펴낸 ‘해 넘어가기 전에 기도’ 공저(1955)와 김관식 시선(1956)이 발표된다.

이미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시의 경향은 일찍이 한학을 익힌 탓으로 동양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 인생을 폭넓게 읊어 내려가는 웅혼한 경지를 보이며 눈길을 끌게 된다.

1960년대 후반의 그의 시 세계는 그 시대적 사회의 부조리와 정치적 모순에 대해 꾸밈없이 갈구한 철학적 사상과 의식이 매도당한 듯 시로써 적나하게 표현했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정이 복합된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때의 시로 ‘강동(降冬)의 서(書)’, ‘자다가 일어나 보니 배추밭에서’(1967), ‘가난한 예찬’(1968), ‘호피(虎皮) 위에서’(1970), ‘폐가에 부쳐’(1970) 등이 연이어 발표된다.

고(故), 김관식 시인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대표적인 시로 널리 잘 알려진 ‘이 가을에’는 그의 모교인 강경상고에 세워진 시비에 새겨져 있는 시구이다.

시인의 또 다른 시비는 대전의 대표적인 고(故) 박용래 시인과 더불어 대전 중구에 위치한 보문산에도 세워져 있다. 우선 그의 시 한편을 탐색해본다.

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가을이던가.

녹차(鹿車)에 가구를 싣고

가랑잎 솔솔 내리는

이끼 낀 숲길

영각靈覺소릴 쩔렁쩔렁 울리며

어디로든지

떠나고 싶다.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순채 나물

노어회(鑥漁膾)

강동으로 갈거나

구양수(鷗陽修)

글을 읽는

이 가을밤에

‘이 가을에’ 전문 중에서-

이 시에서 읽히는 특징들 중 하나는 현실과 과거를 뒤돌아보며 몸에 스민 동양적인 정서와 감정을 담담하면서 찹찹한 심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기저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상위에서 밝혔듯 그가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혔고 성리학과 동양학을 터득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해석하면 어느 가을날 ‘창 밖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신령을 깨닫는 영각(靈覺)소리에 고단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니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충동에 머뭇거리게 된다.

마침 계절도 낭만과 쓸쓸함을 더하는 낙엽이 지는 가을이라서 혼란했을 시인의 기질을 더욱 발동케 한다.

마침 ‘녹차(鹿車)에 가구를 싣고/ 가랑잎 솔솔 내리는’ 광경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는 사슴이 이끄는 수레는 가구를 싣고 가랑잎이 떨어지는 숲속으로 난 길을 향하고 있어 그 뒷모습을 보니 어디론가 더불어 떠나가고픈 마음 심란한데 ‘그러나 내게는 아무도 없네./’ 반겨 맞아 줄 고향도 집도’ 라고 허탈해 한다.

이미 고향도 떠나온 몸이려니와 반길 사람도 없는 고독에 사무친 자신을 한탄하고 있어 쓸쓸하고 외로운 심상을 그리고 있으며 반길 사람 아무도 없는 혼자된 자신의 고립된 상황 한가운데에 시선에 머물고 있음이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다.

1연에서는 작자의 눈앞에 펼쳐지는 심상을 보고 느낀 자신을 그리고 있다면 마지막 2연에서는 옛적 고향에서 어울리던 사람들과 함께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당시의 모습들을 취하고 있어 그리움이 짚게 묻어난다.

‘순채나물/ 노어회(鑥漁膾)/ 강동(江東)으로 갈거나/’ 에서도 흐르는 지난 시절 논산강경의 나룻배들이 오고 가던 때 강가에서 어울리던 사람들과 지내던 모습을 역력히 회상하며 회한에 잠긴다.

나물종류의 푸성귀들과 생선회를 먹었던 시절 순수했을 당시의 모습을 돌아보며 ‘글을 읽는 이 가을밤에/’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은 절박함과 아련함을 시화화해 회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는 화자를 보는 대상에서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는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 것으로 명암이 극명하게 드러나 당시의 아련한 옛 모습을 그리워하는데 초점을 모이게 한다.

다음은 시인의 ‘석상(石像)의 노래’- 전문이다.

석상을 소재로 해 가슴속에 사무치도록 한없는 그리움을 갈망하며 읊고 있는 시로 읽힌다.

“노을이 지는 언덕 위에서 그대 가신 먼 나라를 뚫어지도록 바라보면 해가 저물어 가는 밤은 깊은데 하염없어라 출렁거리는 물결소리만 귀에 적 시어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 들어 어룽진 동정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 벙어리 가슴 쥐어 뜯어낸 혓바늘일래 말을 잃었다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 열리지 않은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

이 시는 보다시피 산문시이다. 행이나 연을 구분 없이 나열함은 물론 구두점까지 철저히 배제시키고 있다.

그리움이 원인이 돼 돌이 되었다는 내용들은 의식을 파고드는 시어들로 실감을 더하고 있어 상황적 분위기를 한 장의 흑백사진을 보듯 읊조리고 있음이 선연하게 표시된다.

우선 생각에 떠오르는 것 중 이 시의 내용은 백제가요 ‘정읍사’나 신라시대에 박제상의 아내가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의 설화와 접맥이 상통된다.

또한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라는 김소월 시인의 ‘초혼’에서도 그와 유사한 내용의 그리움이 적적한 상황으로 감미처럼 드리워져 있다.

첫째 문장에서 화면으로 그려지는 것은 노을이 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작자의 마음이 선하게 전달돼 진다.

‘그대 가신 곳 먼 나라/’는 ‘죽음의 세계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미 떠나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멀리 가버린 임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도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연이어 투시되고 있으며 ‘출렁이는 물결소리/’에서는 외로운 자신이 어느 바닷가에 머물러 마음의 동요를 내적인 음결로 연을 잇고 있다.

‘출렁이는 것을 마음’으로 ‘물결소리를 울음소리’로 병치하는 심상적인 배경으로 볼 때 한곳을 끝없이 응시하고 눈시울을 적시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문장에 차용한 ‘눈썹 기슭에 번지는 불꽃 피눈물/’이란 비유에서는 눈에 밟히도록 빨갛게 충열이 되도록 사무치는 그대를 그리는 마음이 얼마나 가슴속에 머무는지 눈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번지는 어룽진 동정이라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작자가 그리는 그대의 슬픔에 찬 마음은 통한의 속념으로 불꽃 피눈물로 적시하고 있어 그야말로 뼈아픈 귀로에 처한 자신의 토로함이 또렷하다.

덧붙어 여기에 나타나는 ‘동정’이란 단어는 남의 어려움을 딱하게 여기거나 가엽게 여길 때 쓰이는 동정(同情)이 아니라 대상자의 분위기에서 느끼는 화자의 모습을 강조하는 어조로 읽힌다.

우리 전통의 한복 저고리로 목깃에 꿰매어 달아 입는 흰 헝겊을 뜻한 동정의 의미로 보이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에서도 ‘그대’로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은 여성임을 표하고 있음이 선선하다.

마지막으로 절망 때문에 대상자인 피사체는 ‘그리운 사연 아뢰려 하여/’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아도 말할 수 없는 ‘벙어리 가슴 쥐어뜯어도 혓바늘/’이라고 하소연하고 있는 자신을 원망하며 책망하고 있는 본연을 모습이 여실히 보인다.

석상이 됐음을 구조하고 있는 과정에서 ‘땅을 구르며 몸부림치며 궁그르다가/’ 다시 일어나지만 열리지 않는 말문이련가 하늘 우러러 돌이 되었다./’고 결론 짓는다.

이것이 이 작품의 원형을 완성하는 사무침의 극치이고 이 시의 핵심이자 작자의 솔직한 상황적 표현일 것이다.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시인은 어느 한 곳에 머물며 심상이 머물 때까지 그 어떤 사사로운 이면에 눈 돌리지 않고 화자의 대상물을 노을이 질 때까지 뚫어지도록 바라보며 있다.

드디어 한편의 시상들을 카타고리에 완성해 가는 과정을 끝까지 시선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시화해 그리움을 사무침으로 귀결하는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철저히 주력해 보인다는 점이 위력이다.

이 시는 1957년도의 작품으로 그이가 1934년도 태어났으니 23살 때의 작품이고 보면 동양적 감성과 고전에 능통한 정감을 가미한 시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뛰어난 유학자다운 면모를 다분히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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