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중편)
천재시인 고(故) 김관식, 그는 누구였나?(중편)
  • 류환
  • 승인 2020.07.1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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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기행으로 문단에 남긴 굵고 짧은 단편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다음은 ‘거산호’(居山好)라는 작품을 살펴본다.

산(山)에 가 살래.

팔 밭을 일궈 곡식(穀食)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거산호’(居山好). 2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 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데다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이 뻗혀 있어 다리 놓은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향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같은 산정기山精氣를 그리며 산다.

상위 작품도 시인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손꼽히는 작품 중의 하나인 ‘거산호’(居山好) 라는 시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산이 좋아 산에 칩거하고 눌러앉아 있을 때의 글인 듯 읽힌다.

2연으로 쓰고 있는 글에서도 주변인들과의 교류가 없는 듯 홀로 산속에서 지내며 외로움을 달래고 있는 상황들을 드러내고 있어 산에 살면서 산을 그리워하고 이를 위로받고자 하는 단면들이 역력하다.

짐작컨데 1960년도 국회위원에 출마하지만 큰 차이로 낙선한 후 이를 감당키 어려운 곤경에 빠져있을 당시 돌파구를 찾는 해결책으로 정신적인 위안을 찾는 하나의 방법을 모색하고 산을 선택한 부분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상황들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에 출마한 상대자는 장면 박사로 정치계에서 너무 잘 알려진 거물이자 당시 차후 총리가 될 사람으로 선거에서 최대의 강적과 대적한 셈이었다.

김관식은 출마에서 학식 있는 언어와 말 잘하는 달변으로 명함에 ‘대한민국 시인’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다녔을 당시였지만 정치판은 그리 손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젊은 패기로 위용을 유감없이 떨치던 27세의 나이었지만 남다른 판단과 용기에 앞서 그의 잦은 폭음으로 선거의 한 복판인 명동과 인지도가 높은 곳에 드물게 나타나 대중들에게 지명도를 알리는 선거운동을 소홀히 한 이유도 패배의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이러한 근거는 자신이 선택한 산을 찾은 이유와 근거 외, 글에서는 구체적인 표현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의 스토리처럼 부조리한 현실들을 몸소 체험해 비현실적인 상황들을 통렬하게 체감했을 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산속으로 칩거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까닭으로는 자신이 생각컨데 억울하고 치욕스럽게 당한 일들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압을 누르고 산으로 낙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해 빗장을 걸어 잠그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판단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스스로 ‘팔 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먹고’ 라고 자급자족하는 자생을 다짐한다.

이는 곡식을 거둬 양식하고 질그릇에 곡기를 끓여 먹으며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라고 다짐하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라며 찹찹하게 다친 마음을 달래고 에둘러서 쓰라린 마음을 비우고 씻어내는 시간으로 흐르는 세월을 이겨낼 양 미래의 자신의 앞날을 작심한다.

또 벼슬을 누리는 작록도 싫다며 푸념하듯 당시의 일상을 날씨 좋으면 동해에 나가 낚시질로 물고기 몇 놈이랑 데리고 노는 누구의 눈치도 없는 한가한 산에 가서 살겠다는 현실에 초점을 맞추는 자취를 취하며 경각심을 온건히 의지에 주지하며 이에 임하고자 하고 있는 입장을 밝힌다.

‘거산호 2’(居山好)에서도 드러나듯 1연과 비슷한 내용들을 담고 있으나 1연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사회의 비판적인 내용의 성격을 주로 띠고 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는 산을 비유해 현실적으로 처해 있는 부정적 요소들로 자신이 받아들여야하는 비현실적인 부정과 부패를 의인화해 거대하고 우직하게 서 있는 한결같은 산을 느낄 수 있어 이를 묘사하고 환치한다.

시인은 한가로운 날 북쪽으로 난 창을 열고 고심에 잠기게 돼 푸념이라도 토해놓는 심경을 밝힌다.

‘멀리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이라 쓰고 있는 부분에서 시각의 입장으로 대상들을 고려해 들여다본다면 ‘장거리는 도회지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산을 바라보고 앉아 지난날들을 뒤돌아보며 그 의미를 곰곰이 짚어 생각에 잠겨있다’라고 풀이된다.

돌아보건데 ‘태고로부터 푸르러온 산이 아니냐/’란 표현에서도 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양 그대로여서 천년만년 오래도록 수(壽)가 다하도록 변치 않아 요원토록 유지된다고 전망한다.

이유는 산을 총력적으로 믿음으로 또는 자각으로 변함없이 끝까지 이어 가는데 사람들은 자꾸 변해가고 있어 안타깝게 등을 돌리는 인간관계를 산에 비유해 허탈감을 느끼는 박탈감을 상징적으로 돌이키며 산의 믿음과 자신의 믿음적인 다짐에 총력을 다 하는 의지를 엿보인다.

그 안타까움이 자신을 산으로 불러들인 까닭으로 결론하고 답답한 심정을 그 누구 없는 산중생활로 이어나가고자 하는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는 점이 당시의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돼 진다.

특히 산은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하지 않는 겸허한 산’이란 시어엔 자신의 중심 한 가운데에 산을 신중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변증을 극대화하고 있다는데 주력을 다하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이 산을 통해 자신을 반추하고 있음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라는 대목에서도 믿음직하고 변치 않는 산이야말로 자신 본래의 태생적인 본심을 긍정적인 응시로 이를 바라보며 변치 않음을 밝히는 시인은 그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거울과 같아 자신의 걸어왔던 지난 행로를 뒤돌아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더불어 자기반성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는 점도 기회를 통해 근신하고 있음을 글 속에 비추고 있고 상황의 전개들을 비중 있게 서술한 부분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 품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려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이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의 표현은 ‘거산호(居山好)’작품의 결정체로 관망된다.

본시 거짓 없고 변치 않는 산에서 산을 보고 배우는 본래의 시인의 솔직한 내면을 열등감 없이 투영하는 여과를 숨 고르듯 그 품에서 낳고 자라는 고향으로 여기고 이승이 다하면 묻히려 한다는 점이 시인의 결성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시인이 일상을 지내는 눈에 확인돼 보이는 이승의 낮과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저승의 밤으로 잇고 있는 점은 높고 높은 이상과 현실 사이를 연결하는 있음을 아아(峨峨)라이 뻗쳐 있다고 다짐한다.

그 신념의 다리에 시인은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라며 마지막까지 생의 진지함과 삶의 진솔함을 솔직히 전하려 애쓰고 있으며 ‘산에서 있어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그 산정기(山精氣)에 혼혈을 다하고자 하는 굳은 믿음을 갖고 이를 낙관한다.

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바라본 천재시인 김관식

시의 전문에 앞서 간단히 일랑 화백을 짚고 넘어가며 다음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일랑 이종상 화백은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전 서울대 동양학과 교수를 지내고 현재는 오래전 퇴임해 작업에만 열중하지만 독도그림으로 이미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우리나라 오만원권 지폐에 신사임당 초상을 그려 넣은 현존하고 있는 화백 중에 한 분이다.

1938년생으로 충남 예산출신의 동양화가이고 호를 ‘일랑(一浪)’으로 쓰고 있는 이종상 화백은 화단에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김관식 시인과 네 살 아래인 터울을 갖지만 두 사람의 교분이 두터웠던 것들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으로 김관식 시인의 이면들을 한층 승화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돼 울력을 높인다.

일랑 화백은 시인과 닭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산과 교감하는 매체로 미당 서정주 시인과 동서지간인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이 닭을 친 모습을 알겠다’라며 장문의 시를 유려하고 웅혼하게 적절히 그려낸다.

또 시인을 비유하는데 있어 탁월하게 공감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시인의 절실함을 신중함으로 가미해 연연을 덧붙이며 그의 심상을 고려한 고백과 입장을 신(神)과 교감하는 천재성을 빠짐없이 담아내고 있다.

일랑 화백의 작품을 정독하면서 상황적인 분위기를 살피며 이를 관찰해 분석해 해보고자 한다.

시인은 닭과 교감한다.

비록 하늘이 내려준 야성 잃고 답답한 닭장에 갇혀

퇴화한 날개 푸드득거려 때 아닌 홰를 칠망정

신성마저 잃은 건 아니다.

어둠이 더 깊은 어둠으로 닻 올려 항해할수록

막막한 어둠, 그 알을 쪼아 빛 불러내는 것은 시인

벼슬살이보다 긴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닭을 치며

바닷가 강진에 묶어 있던 자신을 보았을 게다.

아침마다 닭을 잡는 대한민국 김관식 시인은

오지도 않는 아침이 온다고 거짓부렁 일삼는

닭이 미웠던 것일까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생계형 양계장을 차렸던

김수영 시인이 하필 닭을 쳤던 것은 닭만이 지닌

신성만은 배우려는 뜻

모두 잠든 어둠속에서 신이 속삭이는 음성을

저만 홀로 알아먹고 되받아 어김없이 아침을 불러오는

신 내린 무당도 일내 갖지 못한 신성을

빠짐없이 수신하는 안테나가 닭에게만은 있다.

하도 많은 날짐승 가운데 오직 닭에게만 주어진 볏은

늘 반쯤 솟아난 아침 해를 머리꼭지에 이고 살아

하늘에 남겨둔 반쪽을 통해 닭은 산과 교감하고

시인은 닭과 교감한다.

‘대한민국 김관식 시인이 닭을 친 이유’ -전문-

시에서 느끼는 감성 그대로 김관식 시인의 의식이 하늘에 맞다있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공중파와 송신하는 안테나와 이를 교신하는 닭과 소통하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 닭과 교신하는 김관식의 천재성을 ‘하늘이 내려준 야성’으로 인지하고 써내려간 한편의 헌사 시(獻詞, 詩) 같은 성격을 지닌 내용으로 시인이 거산해 칩거해야 하는 이유를 이미 잘 알고 있는 터, 당시에 썼던 글로 읽히는 것도 확연하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연마다 해석과 주술을 달아가며 내용들과 성격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시인은 닭과 교감한다./

비록 하늘이 내려준 야성을 잃고 답답한 닭장에 갇혀/ 라는 첫 연을 해석하면 시인은 동이 트기 전 새벽을 알리는 닭의 인지를 시인과 감성적 인지를 나누고 있다고 동일시한다.

어김없이, 빠짐없이 여명을 알리는 닭의 천성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늘이 내려준’에서는 천재를 인지하게 되는 도입부이다. 여기서 ‘야성을 잃고’는 천재성을 잃고 ‘답답한 닭장’은 깊고 깊은 산속으로 이해하여야 타당해 보인다.

모든 일사를 뒤로하고 가정까지 접고 고뇌에 찬 야인으로 산속에 기거 한 모습을 보았으니 답답해 보이는 건 당연하지만 표현하기까지는 녹록치 않은 ‘일랑’ 또한 사려 깊은 면목이 돋보이는 안목이다.

퇴화한 날개 푸드득거려 때 아닌 홰를 칠망정/ 신성마저 잃은 건 아니다./에서가 이 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김관식의 의식과 사상을 강조하고 있는 시어다.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산속에 칩거하는 천재를 화자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으로는 ‘퇴화한 닭의 날개’로 비유하고 ‘때 아닌 홰를 칠망정 신성마저 잃은 건 아니다’라고 보고 있다.

이를테면 신과 같은 성격을 직시한 표현으로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거룩한 시인의 타고난 천재성을 의인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마저 잃은 건 아니다’라며 언젠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사회참여를 유도하는 심정이 드러나 보여 그의 아쉬운 천재성과 작자의 안목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글이라 볼 수 있다.

어둠이 더 깊은 어둠으로 닻 올려 항해할수록/ 막막한 어둠, 그 알을 쪼아 빛 불러내는 것은 시인/으로 이 연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앞 연에서 어둠이 더 깊은 어둠으로 닻 올려 항해할수록 막막한 어둠은 그 다음 연을 해석해보면 한결 쉽게 풀이된다.

여기서 어둠은 바닷가의 어둠이 아니라 알(달걀)에 핵심을 가리키고 있다. 알의 껍데기인 포진은 어둡다가 차차 병아리로 생성되면서 날이 차면 부리로 알을 쪼아 세상 밖으로 나와 빛을 보게 되는 이치를 절묘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 어둠은 산속에 칩거하는 동안을, 어둠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때 까지를 빛으로 병치하고 있는 것으로 김관식 시인도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다시 빛처럼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라는 기대심을 피력한다.

다음 연으로 이어간다.

벼슬살이보다 긴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닭을 치며/ 바닷가 강진에 묶여있던 자신을 보았을 게다/로 쓰고 있다.

바닷가로 유배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다산 정약용을 김관식과 연계해 의미를 한층 부여하고자 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목민심서, 경세유포’로 유명한 다산(茶山) 정약용은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서산 해미를 시작으로 18년간의 경상도 장기와 전라도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를 대비시켜 깊은 산속이나 외로운 바닷가 외딴 섬이나 사유는 달라도 고독과 쓸쓸함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와 분통을 갖은 입장은 매한가지여서 익히 알고 있는 다산과 동일한 처지를 이렇게 빗대어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닭을 치며 자신을 뒤돌아보고 있는 상호 처했던 상황적 관계성을 동일시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닭의 날개로 환치시켜 날지 못하는 심경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근신과 회한의 전개로써 하나의 묘법을 타산지석으로 동일화 해 이를 선택하고 있다고 보이는 대목들이어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다.

아침마다 닭을 잡는 대한민국 김관식 시인은/오지도 않을 아침이 온다고 거짓부렁 일삼는/닭이 미웠던 것일까/로 이어진다.

어찌 아침마다 닭을 잡겠는가. 동이 트면 일어나 닭장에 들려 혼잣말로 닭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꾸지람했을 것이 바로 ‘신성이 신성’에게 깊은 산속에서 유일하게 말을 내 뱉을 수 있는 생명체와 나누는 푸념 섞인 자기표현 중 하나였을 것이다.

똑똑하다고 보이지 않는 상투적인 언어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오로지 표심을 얻겠다고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거짓부렁으로 일삼는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에게 고(告)하고 있는 적절한 심려로 작자의 심증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것이야 말로 대한민국 김관식다운 표식이고 성격이기 때문에 닭을 잡는다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다음 연으로 이어가보자.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풀러나/ 생계형 양계장을 차렸던/ 김수영 시인이 하필 닭을 쳤던 것은/ 닭만이 아닌 신성만은 배우려는 뜻/으로 비유하며 글을 이어간다.

주지하다시피 김수영 시인은 ‘묘정(廟廷)의 노래’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중 한 사람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붙잡혀 징집되자 탈출하지만 다시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로 끌려가 3년을 갇혀있다 풀려난 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닭을 치게 되지만 비유하는 글에서는 충분한 사유가 된다.

이런 연유들을 다산과 김영수 시인과 김관식 시인과 또 신성이라 여기는 닭이라는 매개체를 차용해 의인화하고 이를 대비시키는데 적절함이 닭의 신성 때문이라 여겨진다.

역시 김영수 시인이 하필 닭을 친 사유도 각자는 달라도 화자의 시선으로는 신성을 배우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어 닭이야말로 가장 신성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공통적인 일체감으로 풀이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우연이랄지 필연이랄지 다산과 김영수 시인과 김관식 시인 역시 모두 닭을 친 이유를 작자는 신성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신성을 자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모두 유배나, 체포, 칩거라는 상황적 혼란과 곤비한 배경들을 알 수 있는데 모두 억울한 심경으로 닭을 치고 있다는 것이 동일해 아이러니하다.

따라서 이들의 천재성을 신성으로 받아들여 신과 교감하는 닭에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지만 한결같도록 상실된 시대상을 이들의 천재적인 시대정신과 높은 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암시되는 것이 중론이다.

다음 연이다.

모두 잠든 어둠 속에서/ 신이 속삭이는 음성을/ 저만 홀로 알아먹고/

되받아 어김없이 아침을 불러오는/ 신 내린 무당도 일내 갖지 못한 신성을/ 빠짐없이 수신하는 안테나가 닭에게만은 있다/라고 쓰고 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잠들어 숨죽이고 있는 고요한 어둠속에서 신(神)이 속삭이는 음성을 저 혼자 알아채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갓 퇴화한 날개로 모이나 쪼아 먹고 배설하는 작고 하찮은 동물한테 신의 속삭이는 음성을 알아먹고 이를 되받아 어김없이 아침을 불러오는 영물(靈物)로 인식하고 있으니 십이지(十二支) 동물 중 신령스런 동물이야말로 닭을 치켜 천재성과 다름없이 손꼽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 내용이 더욱 경이롭게 풀어놓고 있어 주목된다.

신(神)내린 무당(巫堂)도 금방 알아채지 못하는 신성(神聖)을 빠짐없이 상호 주고받는 신과 소통하는 대화가 닭에게만 주어져 있다고 보아 닭의 예지적과 직관력을 피력하고 있어 여기에서 또한 천재성을 강조한다.

상식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 이를 몰라 닭에게만 은거해 주어져 있는 신, 무당, 신성 따위를 천재적인 김관식 시인과 비유하는 이유를 독자들은 뒤늦게나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연이다.
하고 많은 날짐승 가운데/ 오직 닭에게만 주어진 볏은/ 늘 반쯤 솟아난 아침 해를 머리꼭지에 이고 살아/ 하늘에 남겨둔 반쪽을 통해/닭은 신과 교감하고/시인은 닭과 교감한다.

여기서 그 많은 짐승 가운데 오직 닭에게만 주어진 볏은/ 늘 반쯤 솟아난 아침 해를 머리꼭지에 이고 살아/라고 직시한다.

닭에게만 주어진 볏은 벼슬을 의미하고도 남음이다. 시인에서 정치가로 변신을 시도했지만 일장춘몽으로 패배하는 한갓 꿈에 불과했지만 오직 김관식 시인에게 주어진 천성적인 볏은 끝까지 살아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의식 깊은 내면에는 높은 관직의 자리가 그의 가슴에 살아있어 반쯤만 솟아난 아침 해, 이를테면 여기까지 왔어도 희망적인 태양을 반쪽만 머리꼭지에 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반쪽은 세상과 자연과 우주와 교신하는 신과 교감하며 자신은 그 닭과 교감한다고 일컬으며 목격한 것으로 마무리한다.

다시 말하자면 김관식 시인의 천재성을 그야말로 보이는 데로 알고 있는 데로 피력하려 열중하고 있으며 드문드문 안타까운 면도 드러내고 있어 작자의 아쉬움도 깊숙이 견지돼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는 평생을 화력에만 전념한 분이지만 김관식 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그를 충실하도록 헤아리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천재성을 여실히 감안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필자의 시선으로는 일랑 화백은 어느 시인보다도 뛰어난 문장으로 김관식 시인에게 있어 서술하는 방식과 시어를 선택하고 단락을 잇는 어법과 조탁에 있어서도 웅혼한 시편들로 나열하고 있다.

그럴만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하기에 한편의 시에서도 평범함을 넘어 천재성을 형성화하는 직관으로 일괄하고 있어 일랑 또한 탁월한 문인으로 보아도 충분해 보인다.

솔직하자면 그 어느 시보다 또는 시인보다 아니 평론가들보다 조금도 뒤짐이 없으며 함축미를 살려내는 월등한 혜안이 돋보이는 문체들로 구성된 내용들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데 무게감의 비중이 크게 느껴지는 한편의 대변적인 시로 읽힌다.

하나의 일례를 든다면 시인의 몸에 잘 맞는 의상을 정성스레 기워 그에게 입혀준 옷으로 어느 장소에서도 잘 어울리는 한 벌의 맞춤이어서 시인 자신이 생각했을지라도 조금도 어색함 없이 흡족할 예술작품으로 읽히는 만족스러운 작품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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