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을 바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긴 천재음악가들 (상편)
직업을 바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긴 천재음악가들 (상편)
  • 류환
  • 승인 2020.07.1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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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정신’이 빛낸 서양 음악가의 세계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인간의 육체는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완벽한 창조물이다.

그러나 그 완벽성은 때때로 한계를 뛰어넘어 이상세계를 동반하는 인간으로 창조돼 똑같은 인간들에게도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불특정 소수의 인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다.

이를 우리는 하늘이 내려준 뛰어난 재주 또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천재’라고 부르며, 이들은 평범한 한계를 초월해 어느 특정분야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두뇌들을 목격하게 된다.

더불어 이러한 천재적인 사람들은 예술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며 이들은 자기직업 외 또 다른 분야에서도 월등해 앞서가는 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궤적을 남긴다.

한결같이 이런 천재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심리란 매우 심오한 듯 독특하고 난해해 특히 저항할 때 가장 강렬한 표현력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들이 소유한 특징 중 하나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에서 프랑스의 대문호 ‘장폴 사르트르’는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하여 사유(思維)의 의미보다는 저항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예술가들의 저항정신(抵抗精神)을 대변하고 있는 대목이다.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모순에 반대하는 저항도 활자의 매체인 문학 속에 수없이 나열하고 게재돼 있어 이들의 확연한 저항 또한 어렵지 않게 읽어 볼 수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경로에서 평생을 전공한 분야를 두고 살아가는 과정이 못마땅하다고 여기거나 추진하고자 하는 진로에 만족하지 못해 또 다른 분야를 추구하고자 할 때 강렬한 심리작용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며 본인의 천재적인 능력으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마치 광기에 빠져들어 목말라 있던 갈증을 풀어내듯 이들의 다양한 면면들은 곳곳에 나타내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런 현상들은 다른 장르에서도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으나 특히 예술부분인 음악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필하고자 하는 음악가들은 애초에 다른 학문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 반사적인 작용으로 열정을 불태우며 입문하기에 음악을 이룩하려는 심리적 작동은 오히려 인생의 지형도를 바꾸는 핵심적인 탐미로 유리한 조건과 진지한 창조적 추진력을 갖는다.

그래서 이들은 애초부터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보다 나중에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음악으로 전향했을 때 더 큰 성과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뜻에서도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장폴 사르트르’의 말이 전공을 전향한 음악가들에게도 적적한 표현으로 적용돼 이를 무리 없이 수용하고 매진해 최정상에 오르게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표적인 몇몇 서양 음악가들의 사례를 들어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직업전향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기회에 아슬아슬한 스릴적인 사례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서양 음악사에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게 잘 알려진 체코의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일 것이다.

그는 소년기부터 부친을 따라 정육점에서 뼈와 살을 도려내는 발골의 기술자 면허까지 취득했지만 뛰어난 음악적인 재능을 발견한 그의 음악선생의 권유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후 ‘드보르자크’는 훌륭한 음악가가 돼 영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함으로써 ‘칼을 들고 고기를 다루던 손으로 지휘봉을 들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타고난 음악성과 함께 지휘계의 거물로 오르내리는 음악가로 유명해졌다.

이같이 ‘드보르자크’는 그의 음악적인 천재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킨 스승이 있었기에 음악가로 대변신해 빛을 보게 되는 선천적 천재성을 갖고 태어나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만일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정육점 경영을 이어 받았더라면 손님들에게 머리나 숙이며 고기나 파는 한갓 하잘 것 없는 신세로 장사꾼이 됐겠지만 어느 한 시점에서 타율적으로 직업을 바꿔 음악인으로 변신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또 음악을 취미로 소일하다가 결국 저명한 음악가가 된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의 5인 그룹을 들 수 있다.

지도자 격인 ‘림스키 코로사코프’, ‘무소르그스키’, ‘보르딘’, ‘발라키레프’, ‘큐이’ 등 다섯 사람 가운데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보르딘’은 화학교수로 강당에서, ‘무소르그스키’는 육군사관에서 각각 종사하던 사람들로서 각기 길을 바꿔 작곡가로 변신한 음악가들이다.

이들은 음악과는 아무 상관 없었던 일에 종사했지만 직업을 바꿔 취미 정도로 즐기던 아마추어를 넘어 프로패셔널한 음악가로 대변신을 시도하고 끝없이 경주하며 발돋움했기에 위대한 음악가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대리시험으로 졸업장을 딴 법률학도

천재들 못지않은 수재들 중 법률을 전공하다 음악가가 된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고전주의, 낭만주의 시대에는 왕권주위시대로 음악가로서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롭게 진로를 선택하기보다 부모의 강요에 따라 마지못해 지시를 받아야 했던 젊은 시절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법률을 공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우선 우리들의 귀에 낯설지 않게 잘 알려져 있는 ‘슈만’, ‘차이코프스키’, ‘시벨리우스’, ‘스트라빈스키’ 등 이름만 들어도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들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들 작곡가들 중에 특히 ‘차이코프스키’는 법률공부를 하여 관리생활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뛰어나 승승장구하며 법률전공을 했기 때문에 우수한 학점으로 졸업을 하고 관리생활을 이어가다가 작곡가로 직업을 바꿔 불후의 명곡들을 수없이 남기며 유명해졌지만 차후 묘한 죽음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흔히 콜레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동성연애를 했다는 죄목으로 법률학교 동창생들에 의해 사적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자결했다는 설이 재기돼 전해지고 있다.

단두대의 발명자인 ‘기요틴’이 마침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그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진 운명처럼 그는 법률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 법률에 의해 죽게 된 셈이다.

‘스트라빈스키’는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지만 사실은 법률공부가 하기 싫어서 공부를 게을리 한 탓으로 학점을 따지 못하자 친구에게 대리시험을 치르게 해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사회적으로 비리를 저지른 셈이지만 그는 법률을 이용해 남을 헤친 일도 없었으며 음악가로서 너무나 큰 공적을 남겼기 때문에 대리시험으로 법과를 졸업한 것이 당시엔 별문제가 되지 않아 오히려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받는 매력으로 까지 이어졌다.

‘스트라빈스키’는 언젠가 음악회가 열리고 있는 파티장소에서 거나하게 술에 취해 어떤 귀부인의 흰 목과 앞가슴에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이때 한 초청객이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법률을 전공했다는 사람이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다니”하고 분노하면서 “하긴 그는 법률을 가짜로 전공했으니 저럴 수밖에 없지”하고 체념하듯 돌아섰다.

그러자 키스 세례를 받은 그 귀부인은 오히려 “너무 좋은데요. 가짜로 법과를 전공을 했든말든 이렇게 위대하고 훌륭한 음악가한테 키스 세례를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까”라고 해 파티에 모여든 사람들한테 한바탕 박수와 웃음을 자아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음악평론가이자 법률가인 ‘한슬릭’

19세기의 저명한 유대계인 체코슬로바키아인 음악평론가인 ‘한슬릭’도 처음엔 법률을 전공해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사법시험에도 합격한 수재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의 사조로는 관리가 보람 있는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선망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한슬릭’은 주로 음악이나 미학에 관심을 갖고 평론가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우연히 구입한 복권당첨으로 거액을 받게 돼 자기 제자인 ‘프라하’라는 아름다운 재벌의 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로도 더욱 명성이 나있다.

‘한슬릭’은 법률에 대한 권태를 뒤늦게 느껴 “나의 생애에서 아무런 쓸모 짝도 없는 법률학 박사와 사법관이라는 자격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과 금전적인 허비를 했던가!”라고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당대 최고의 평론가가 된 것은 자신의 법률전공에 대한 마음속에 자리한 저항정신 때문이라는 것은 학창시절 당시엔 미처 몰랐을 것이다.

20세기 무조음악 12음계 음악의 ‘쇤베르크’, ‘베베른’과 함께 3인조 그룹의 한 사람이던 ‘알반 베르크’는 ’쇤베르크‘와 ‘베베른’과 달리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지 않고 다른 분야를 전공했으나 뜻밖으로 음악에 매료돼 훌륭한 작곡가가 됐다.

그러나 그는 작곡가로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명작으로 유명세를 타기시작한 오페라 ‘보체크’가 성황을 이루면서 많은 수입으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행운까지 얻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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