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을 바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긴 천재음악가들 (하편)
직업을 바꿔 세계적으로 이름을 남긴 천재음악가들 (하편)
  • 류환
  • 승인 2020.07.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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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정신’이 빛낸 서양 음악가의 세계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식당종업원에서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꽃피운 ‘륄리’

20세기 초엽의 가장 뛰어나고 드라마틱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는 막노동을 하는 잡역부로 일하다가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소유자로 인정을 받아 개인레슨을 받은 뒤 20세기에 일약 스타 오페라 가수로 활약하게 된 누구보다도 뛰어난 천재음악가다.

오페라 하우스 창문이 깨졌다고 전해질 만큼 우렁차고 힘이 넘치는 그의 노래에 얽힌 에피소드가 수많은 만큼 그는 타고난 음악의 최대 천재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데도 앞장서 많은 선행으로 주목받았다.

또한 구 소련출신으로 1938년 죽은 베이스 ‘샬리아핀’도 ‘엔리코 카루소’가 그랬듯이 잡역부로 일하다가 타고난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탓에 음악인들로부터 인정받아 독학으로 세계 최대의 베이스가 돼 전 세계 오페라 음악계를 휩쓸었다.

이같이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사르트르의 말처럼 ‘자신의 현실에 저항했기 때문’에 이룩해내는 또 하나의 쾌거라 할 것이다.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대가인 ‘륄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바이올린을 배워 유랑악단에 들어가게 된다.

14세 때 마침 이탈리어를 배우려 그곳에 왔던 프랑스인의 권유로 야심찬 마음을 먹고 그와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

그러나 일자리가 여의치 않아 식당에서 청소하며 설거지를 하는 허드렛일들을 했지만 이탈리아 민요를 잘 불러 인기를 얻게 되면서 그의 앞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륄리’는 열심히 독학으로 음악에 빠져들어 천재성을 드러내 화려한 궁전악단에 입단해 단원이 된다. 이때 어떤 귀족의 “식당 설거지 일이나 하던 저 이탈리아 젊은이의 음악을 궁전에서 들어야 하다니”라는 푸념 섞인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는 이같이 설거지와 허드렛일을 해가면서 기어이 성공하겠다는 굳은 저항정신을 갖고 이를 현실적으로 펼쳐냈기 때문에 프랑스의 바로크 음악의 찬란한 꽃을 피우는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건축가로서 일하다가 작곡가로 변신한 예로는 우선 그리스의 ‘크세나키스’가 있다. 그는 아테네 공과대학에서 공학과 건축학을 전공해 파리에서 활약하면서 프랑스의 6인 그룹의 ‘오네거와 미요’ 그리고 ‘메시앙’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는 어릴 때의 꿈을 살려 ‘피토프락타’ 등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남겼으며 두 오케스트라와 두 지휘자가 경합을 벌이게 하는 관현악곡 ‘스트라데기’라는 기상천외한 작품 등도 작곡했다.

현대 프랑스 작곡가 바레즈도 그리스의 ‘크세나스키’와 같이 음악과는 거리가 먼 다른 학문을 전공한 특이한 음악가다. 그는 처음에는 수학과 자연학을 전공했으나 나중에는 작곡을 배워 대표작인 ‘이오니제이션’(전리)을 비롯한 전자음악의 이론을 많이 남겼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나중에 미국으로 귀화해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지휘자로서도 현대음악을 소개하는데 있어 크게 이바지하는데 앞장섰다.

바그너 음악의 해석을 가장 잘한다는 지휘자 ‘크나퍼츠부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뮌헨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대학에서 그의 졸업논문이 바그너의 ‘파르지팔’에 관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는 퀼른 음악원에서 공부할 때 그의 스승이 그에게 지휘의 재능이 전혀 없다는 사형선고와 같은 절망적인 말까지 들었으나 눈물을 머금고 필사적인 노력 끝에 위대한 지휘자가 된 사람이다.

메스 대신 지휘봉을 잡은 ‘시노폴리’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의 창설자이며 상임지휘자로서 너무나도 유명한 ‘앙세르메’는 수학자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해 수학교사가 됐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밴드의 리더와 현악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잡는 등

음악의 재능을 일찌감치 보였던 그는 베를린에서 당대 최고의 지휘자 ‘니카쉬’의 지휘를 보고 마음을 움직이는 영감을 얻어 지휘자의 길을 선택했다.

‘앙세르메’는 수학자다운 명석한 두뇌로 음악을 창조하는데 탁월했으며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을 누구보다도 잘 해석하고 소화해냈다.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변신한 ‘러셀’ 못지않게 음악가로서 이름을 빛낸 것이다.

만일 그가 수학교사로서 일생을 바치고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음악가로서보다 성공한 삶을 추구하지도 안했을 것이며 살지는 못했을 건 당연하다.

또 ‘토마스 비첨’은 20세기 초에 활동하던 지휘자로서 처음에는 부모님의 권유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다른 분야를 공부했으나 음악에 대한 의욕을 저버릴 수 없어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그가 20세 때 부호인 아버지가 초빙한 ‘할레’ 관현악단의 지휘자 ‘한스 히터’가 갑자기 배탈이 나서 대리지휘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된다. 결국은 아버지의 덕택으로 결국 음악가로서의 길을 걸어 성공하게 된 셈이다.

지휘자 중 스페인의 지휘자 ‘로페스 코보스’는 세계 지휘자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본디 수도 마드리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지휘에 매력을 느끼고 26세에 빈에서 3년간 지휘를 공부한 후 곧바로 ‘브장송’ 국제지휘자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세계악단에 나오기 시작했다.

오래전 어느 해인가 우리나라에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해 재치 있으면서도 웅장한 그의 지휘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돌아간 적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 시노폴리는 ‘의사였다’

세계악단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탈리아의 지휘자 ‘시노폴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음악을 정규적으로 배운 음악가들 못지않게 놀라운 음악성을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베를린이 설령 초토화가 되더라도 그 한복판에 장미나무 한그루를 심겠다”고 노래한 저명한 시인 ‘한스 카롯사’가 의사였듯이 ‘시노폴리’는 메스 대신에 지휘봉을 든 것이다.

음악 평론계에서 음악사에 찬연히 빛나는 ‘에이레’의 문호 ‘버나드 쇼’는 음악은 물론 연극, 영화, 문학, 미술 그 밖의 예술에 대해서도 상당히 폭넓은 지식을 갖춰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학가이면서도 특히 음악평론을 쉴 새 없이 발표하게 된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그의 어머니가 빠짐없이 음악회에 항상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소년기부터 이를 보고 느낀 지식이 성인이 돼 훌륭한 글을 쓰는데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바탕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문학가인지 음악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학창작과 음악평론을 동시에 추구해 마치 ‘나비효과’처럼 미세한 변화가 발단이 돼 예상하지 못하는 결과로 인간 본성이 가져오는 사회적 파급을 가장 널리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아마 ‘버나드 쇼’처럼 두 가지 이상 예술을 함께 지향해 이를 승화해내는 예술가도 매우 드물 것이다.

특히 그의 음악평론은 문학적인 향기가 짙기 때문에 런던에서 펜을 잡고 글을 쏟아낼 때 많은 신문독자들이 늘어갔다고 한다. 예컨대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 그가 인용한 글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기 때문에 신이 분노할 것이다’와 같은 문장표현이 그 하나이다.

반대로 음악을 전공해 직업으로 삼다가 다른 직업으로 전환한 사람도 많다.

우선 바로크 시대의 영국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헨리 허셀’은 나중에 칸트의 ‘하늘에는 별빛 내 가슴에는 도덕률’이란 글에서 더욱 별의 신비를 느꼈던지 천문학으로 전공을 옮겨 놀랍게도 반사망원경을 만들어 새로운 별을 발견하는 공로를 세웠다.

첼리스트 ‘카잘스’가 “나는 날마다 별빛을 본다”고 말한 것도 ‘헨리 허셀’의 공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20세기 독일계의 스위스 추상파 화가로서 너무나도 잘 알려진 ‘파울 클레’는 교양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11세에 스위스 ‘베른’ 교향악단에 입단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약했다.

이같이 천재적인 음악의 재능을 지녔기 때문에 그가 만일 줄곧 바이올린을 연주했더라면 음악가로서 더 큰 업적을 남겼겠지만 화가가 됐다. 그러나 그는 화가로서도 성공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글을 맺으며…

이렇듯 자신의 삶을 실험으로 한 분야에서 또는 직업을 전환해서 열정을 갖고 이를 추구했던 천재들은 저항정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무늬를 남기는데 열정을 쏟아부어 소홀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빠른 두뇌회전과 활발한 신체적, 정신적 활동으로 예민하고 섬세함의 극치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추구했던 상황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고 도약의 순간들을 예술적 창조력으로 연마를 거듭한 끝에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며 성공하고 성취해 세기의 문화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데 앞장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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