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평론] 행동주의 예술, 아비티즘을 향하여(상편)
[예술평론] 행동주의 예술, 아비티즘을 향하여(상편)
  • 류환
  • 승인 2020.08.1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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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주의적 행동예술의 퍼포먼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실험정신으로 무장된 행위로서의 전위예술, 그 아찔하고 설레는 모험적 추구와 전방위적인 몸짓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역사는 예술적 진보를 꿈꾸며 매진했으나 결국은 모더니즘 형식이란 틀 안에 갇힌 채 예술의 거대한 함정에서 탈주하지 못한 몸짓의 역사는 아련한 뒤안길로 물러나 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은 예술을 통해서 영구적인 혁신적 도약과 계기를 갖고 숨 고르며 도약하던 수많은 실험적인 전위 예술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호에 이목을 쏠리게 한 것도 지난 애기가 됐다.

‘행동하라, 온몸으로 행동하라!’ 이러한 슬로건은 예술가들을 다소 당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지만 실천적 행동의지를 주문하고 강조하고 있는 상황적 현실에선 타당성도 다분해 보인다.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말은 몰라도 ‘행동하는 예술인’이라는 말을 아직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예술가로서의 체면을 위시해 점잖을 상투처럼 여기며 손사래를 치는 이들 또한 시대적 감각을 흡수하지 못한 사고(思考)하는 예술가들이 대다수였다.

이러기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껏 ‘예술’과 ‘행동’의 만남을 우선하고 개방하려는 예술적 행동에 대한 실천과 논의가 부족했거나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이면엔 감출 수 없을 사실이다.

따라서 실천적 예술행동의 단서들을 중심으로 행동주의 예술이론의 근거를 하나하나 탐색해보기로 한다.

예술운동 과정과 그 범위의 변증법

새로운 문화예술 운동의 가능성을 갈망하는 우리에게 아트(art)와 액티비즘(activism)의 통합적인 개념의 가능상태로서 주지시 되는 액티비즘은 너른 품을 열어두고 있다.

‘예술운동’과 ‘운동예술’을 대비 해보는 것으로 우선 말길을 터 가며 이를 비교해본다.

예술의 자율성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틀은 예술이란 체계 이를테면 예술적 본질 내부의 자유로운 논쟁과 실천을 통해서 예술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 정당화를 갖추고 있는데 논점이 모아진다고 봐야 한다.

‘예술운동’은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첨예한 논쟁과 실천의 장이 아닌가?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모더니즘 예술의 화려한 아방가르드적인 운동의 족적은 이미 아우라에 둘러싸인 역사적 아방가르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시대적 사명이 요구하는 예술에 대한 또 다른 ‘새로움의 충격’들이 쌓인 20세기 예술운동의 역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예술운동의 역사를 남겨두고 21세기 또 다른 새로움을 추구하며 진행돼 가고 있다.

이러한 예술운동과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맥락에 비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결합했던 지난 과거 ‘운동예술’의 맥락은 보다 전향적인 의미의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운동예술’이라는 말이 다소 작의적인 편향을 가지고 있어 ‘행동(주의)예술’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활동의 또 다른 축과 선을 연결해보는 것을 이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말은 예술운동의 맥락과 대비되는 흐름으로서 행동(주의)예술을 상정해 보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다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전제 속에서 파악해 본다면 행동주의 예술의 뿌리를 이루는 몇 가지 논점들은 예술의 자율성과 목적 없는 성과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접점과 문화 정치적 맥락을 형성하고자 했던 분야에서 논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나온 개념들이라 상충되는 대목도 있겠지만 현장예술과 공공예술 그리고 탈현대적 지향 속에서의 예술사회적 담론과 실천들을 행동주의 예술의 본질에 근접하는 논점들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고려 대상은 ‘현장의 예술운동’이라는 맥락이다. 현장 중심의 예술운동은 전문화된 제도공간의 예술운동에 대비되는 단어이다.

이들 두 개념은 과거 한국의 80년대의 리얼리즘 미술운동을 크게 두 갈래의 경향성으로 나눴던 현장미술과 전시장 미술의 개념적 대립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장미술은 삶의 현장과 투쟁의 현장에서 출발했다. 전시장 미술이라는 구분은 80년대 중반 이후 미술운동 진영의 노선투쟁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전시장을 중심으로 사회화의 거리두기를 통해 심미적 영역에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자 했던 비판적 리얼리즘의 경향을 이루는 말이다.

따라서 이들 두 갈래는 완벽하게 이분법적으로 관철된 진영체제는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현장미술의 긍정적인 지향을 되돌아본다.

특히 현장미술은 치열한 정치운동의 과정에서 독재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대정신에 부합하고자 한 시각예술분야의 실천운동이었다.

또한 노동자들이 계급계층의식에 눈뜨면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노동운동과 분단조국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했던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통일운동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흐름에 예술가로서의 운명을 송두리째 내맡긴 예술가들의 예술운동이자 운동예술이었다.

시대의 역동성이 제공했던 현장미술의 지향이 현저하게 약화된 이후 90년대의 미술은 이른바 민중미술의 실패에 따른 진보적 미술운동의 퇴행으로 규정당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를 좀 다른 시선에서 깊이 보고 말하자면 전시장미술과 현장미술을 통해 통합해낸 최소한 긍정적인 흐름을 찾아낼 수도 있어 다행스럽게 여겨지는 관점이다.

앞서 말한 예술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은 분명히 퇴행의 길을 걸었던 것이 사실이다. 운동예술의 시점에서 다시 읽어낸다면 그 속에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망에 관련한 소중한 씨앗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미술의 사회적인 목적의식과 활동방식은 예술을 예술 내부의 자율적인 흐름으로만 파악하려는 경향과는 분명히 다르게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예술가로 살아남기보다는 시대정신에 충실한 당대의 활동가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동가로서 예술가적 실천 모델을 찾고자 했던 이들로부터 행동주의 예술의 맹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행동하는 예술인으로서의 전범이 바로 여기에 있다.

80년대 현장미술부로부터 출발한 또는 그 세례를 받은 숫한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과 예술을 접해왔으며 아직도 식지 않은 열정을 가진 그들과 함께 21세기를 맞아 향해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90년대 초에 논의됐던 창작 소그룹의 중요성이 90년대 후반 이래 대대적인 창작 소그룹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현장미술운동에 뿌리를 둔 창작 소그룹의 발현은 탈현대적 지형인 동시대 미술 속에서 행동주의 예술을 지켜내는 전략적 실천의 단위로서 기능을 했다.

당대에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그들에 현장의 예술가들이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생태운동, 소수자운동, 지역공동체운동과 만나 예술적 창의력을 발현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지난 시기에 일구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서의 현장미술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가까운 우리의 과거를 통해 동시대와 미래를 성찰하고 예견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행동주의 예술의 근거지는 예술의 공공성 또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이다.

68혁명 이후 서구에서 발생한 공공적 예술(public art)의 개념은 행동주의, 예술전략을 수립하는데 매우 유익한 함의를 제공한다.

공공적 예술은 기성의 시각예술(미술)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관행상 명명되고 있는 공공미술이라는 말로 대치해서 사용하기로 한다.

공공미술은 서구의 68혁명을 기점으로 태동한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 정당화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 논의는 오늘날 공동체의 새로운 합의 도출을 이끄는 행동가로서 예술가의 지위를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공공미술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공공입체조형작품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과정을 중요시하는 행위나 정신성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서 이러한 흐름은 뉴 장르 퍼블릭 아트(New gener public art)라고 불리 운다.

새로운 공공미술의 논객인 수잔 레시이(Suzanne Lacy)는 상호작용, 관객, 효과 등을 공공예술의 새로운 비평 언어로 등재했으며 관객과 예술가의 상호작용을 강조했다.

새 장르 공공미술 논의에서 말하는 ‘행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이슈에 대한 지향은 지난 과거 현장미술의 방법이나 목적과도 접합지점을 형성하고 있다.

수잔 레시이에 따르면 “예술가의 행위과정은 ‘경험, 분석, 보고, 행동’의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공공적인 예술이란 개인의 경험에 따른 주관성적 감성을 공감시키는 단계로부터 정보를 공유하고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며 나아가 새로운 합의를 세워내는 과정으로서 행위예술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공공미술의 함의를 살리기 위해 주목해야 할 맥락은 오늘날 사회운동과 문화예술운동이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영역에서의 예술적 실천은 공론의 장에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점검하는 것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전개할 수 있다.

경험자로서의 예술가-주관성의 공감-Private art, 분석가로서의 예술가-정보의 공유-예술 확산, 보고자로서의 예술가-상황에 대한 해답-실험예술 설정, 행동가로서의 예술가-새로운 합의 도출-public art 등으로 정리된다.

위의 도식을 바꿔말하자면 ‘행동주의의 예술가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넘치는 예술가이자 예술가 집단의 조직가이며, 특정상황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보고하는 이슈 파이터 이자, 정치적 맥락을 잡아내는 사회적 퍼포먼서’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서 말했듯이 공공미술은 환경조형, 장식미술, 대지미술, 장소지정형 미술(Site Specific Art) 등을 포괄하는 낮은 단계의 공공미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새 장르인 공공미술로 전환했다.

이 개념은 물건으로서의 작품을 남기는 것을 넘어 행위과정을 중요시하며 프로그램 운영으로까지 예술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공공미술의 출현은 행동주의 예술의 전략적 단초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검토사항은 탈현대적 지형 속에서의 예술사회적 담론과 실천이다. 탈현대적 지형은 행동주의 예술 전략의 전제 조건이 된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시스템과 겨루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예술가상을 그려보는 일은 탈현대 시대에서 예술가의 입장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예술과 사회 사이의 엄밀하고 체계적인 영역 분할에 근거한 모더니즘 예술의 자폐적 그늘을 벗어나 탈분화의 통합적 시각을 견지한다.

따라서 예술가들이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위상을 가늠하는 데 있어 큰 틀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실제 이러한 탈현대적 발상은 서구의 60년대 이래 근대적 시공간에 대한 체계적인 반성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시사적이다.

따라서 미학적 전문영역인 전시장을 벗어나 사회적 존재의 자기 점검을 시도하려는 일군의 예술가들은 예술의 공간과 삶의 현장을 이원화하지 않는 통합적 관점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행동주의 예술운동의 중요한 뿌리 한 줄기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예술가의 자기 점검에서 나온 대사회적인 자의의식 표출로부터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공공예술이나 아방가르드 예술의 훌륭한 전범으로 기록되고 있는 크리스토(Christo)와 잔느 요셉보이스( Joseph Beuys) 등의 사회적 퍼포먼스의 방식은 지극히 탈현대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인 예술 사회학적 논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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