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평론] 행동예술과 사회의 관계구조(중편)
[예술평론] 행동예술과 사회의 관계구조(중편)
  • 류환
  • 승인 2020.08.1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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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주의적 행동예술의 퍼포먼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실천적인 현실 개입과 참여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쟁과 직결된다.

때로는 사회운동과 문화예술운동의 차별성을 되묻는 본질적인 회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사회학의 논의는 가장 명확하게 행동주의의 핵심을 강조하고 있다.

예술은 사회와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최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 그 어떠한 영역도 감당할 수 없는 당대의 소금이 돼야 한다는 것이 예술사회학 일각의 논쟁점이다.

가장 확고하게 부정의 메시지를 날리는 것이 예술이어야 하며,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비판의 최종심급이어야 한다.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것과 문화 예술적 개입의 간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정말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가장 심오한 통찰력과 가장 발랄한 상상력과 가장 기발한 창의력으로 핵심을 내지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원불멸의 아트를 생산해내야 한다는데 대해서 반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여기에 20세기 모더니즘 아트의 함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질화한 결과물로서의 예술 창작품이 끊임없이 모더니즘 예술제도 속으로 편입돼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떠한 형식과 내용의 예술이건 그 결과물로서의 예술은 제도 영역으로 함몰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 든다.

따라서 문화 예술적 개입과 실천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진정한 행동주의 예술은 특정 사안에 결합해 명료한 이슈 파이팅을 통해서 물질화하지 않는 정신으로서의 예술적 성과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아무 여한이 없는 그런 예술을 꿈꾸어야 한다는 게 현명한 견해이다.

서구의 유수의 미술관은 요셉보이스의 돌덩어리들과 막대기들을 소장하고 있지만 그가 심은 수천 그루의 나무는 특정 미술관이나 컬렉터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며 그가 예술적으로 개입했던 녹색당은 한 예술가의 행동주의적 예술행위가가 정치적인 파급효과를 이끌어 낸 모범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이러한 물결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80년대 거리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벌어졌던 다양한 집회와 장례식들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집결한 웅대한 퍼포먼스였다.

그 가운데서 시각적 장치물로서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낸 걸개그림들과 깃발, 상여행렬, 영정 그림들은 물신화의 덫에 걸리지 않고 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훌륭한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탁월한 예술적 향기들은 시대적 배경을 풀어내고 있는 안목이 출중하다.

예술가의 창작은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메시아적 예술가의 지위와 필연적으로 맞닿아있다. 행동주의 예술실천은 이러한 기능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거리두기를 전제로 하는 논쟁자들은 곪아 터지는 상처를 더욱 처절하게 드러내고 화합을 거부하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예술가의 비사회적이고 비타협적인 행위를 강조하면서 과다한 개입과 참여 전제로 하는 행동주의 예술을 비판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모더니즘 제도에 잠식당해 왔던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처를 돌아보건데 그 어떠한 예술도 안정된 권위 속에서 전위적인 지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으며 그 어떠한 물질적 의미의 예술 작품도 의미의 고정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가장 전위적인 전위’로서의 행동주의 예술개념을 통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아 온 행동주의 예술의 맹아들은 고정된 결과물을 목표로 하지 않고 행동주의적 예술실천을 유발하는 정신성을 가장 큰 자산으로 삼으며 나아가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중요시한다.

종국에는 실천의 결과를 예술적인 유산으로 남기려 하기보다는 그 결과를 토대로 하는 또 다른 예술실천의 디딤돌로 삼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가장 예술적인 방법으로 맹렬하고 첨예하게 사회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진정한 전위의 자세를 강조하는 예술의 대사회적 좌표 설정이야말로 행동주의 예술의 근거로 삼기에 충분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예술 공론장과 행동주의 예술

예술의 공론장은 ‘공공영역으로서 예술의 장’을 이르는 말로써 하머마스(hamermas)의 공론의 장 개념과 TV는 바보상자라는 낯익은 비판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논점을 빌려 살피자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친다.

1) 공론장(Offentlichkeit public sphere)은 ‘공공영역으로서의 예술의 장’의 문제를 추출하기 위해 도입하는 하버마스의 개념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공론장의 구조변동 연구’의 핵심개념 가운데 하나인 문예적 공론자의 가능성은 부르주아 공론장이 문예적 공론장의 단계를 거쳐 정치적 공론장으로써 제도화한 근대적 공론장의 변화 과정에 주목해 문예적 공론장의 긍정적 지점을 추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2) ‘예술의 장’에 있어서 구조와 행위자의 역동에 관한 논점이다. 부르디외의 관행과 습속에 관한 논의는 사회의 구조 안에서 행위하는 개인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장’(champ field)의 이론은 예술의 구조와 기능을 파악하는데 유익한 관계를 제공한다.

습관을 제시하는 하비투스, 장, 상징자본, 상징폭력 등 부르디외의 주요 개념으로부터 예술사회학적 함의를 도출하고 행위자이론에서 삶의 모습을 관찰해 생성과 변용 과정에서 하비투스를 발견하며 마르크스의 계급개념과 레스트로스의 구조이론을 넘어선 부르디외의 행위이론을 바탕으로 공공성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3) 여기에는 공론의 장으로서 예술의 장 개념을 설정하는 단계이다.

공론장과 예술의 장의 공리를 추출함으로써 예술 공론장의 전거를 마련할 수 있다.

제도화한 공론장을 다시 문예적 공론장의 역동성으로 끌어오는 구상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부르디외의 개념인 행위주체들의 속성인 하비투스가 작동하는 행위공간으로서 개념을 끌어들여 개체들이 타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예술의 장 다시 말해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장’개념을 설정하고 있다.

4) ‘문예적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장’ 또는 ‘예술 공론장’ 개념은 탈 근대적 예술지평을 읽어내는 기초를 제공한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을 골자로 ‘예술의 장’을 파악하고 이를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개념과 결합해 문예적 공론장으로서의 예술의 장 개념을 수립한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분석해내고자 했던 근대사회의 공론장의 구조적인 변동을 1970년대 이후의 부르디외의 논의를 빌어 정치적 공론장에 가려진 문예적 공론장으로써의 논의를 빌어 정치적 공론의 장에 가려진 문예적 공론장으로써의 예술의 장을 설정한다.

이상의 논의를 거치는 예술적 공론의 장은 전위적인 실험예술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긍정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예술(pubilc art)은 행동주의 예술전략을 수립하는 일과 문화생태의 정치학을 구현하는데 매우 유익한 함의를 제공할뿐더러 실천적인 예술모델을 만들어 내는 데에도 매우 유의미하다.

‘예술의 대사회적 자기정당화 논의와 실천 과정’에서 나온 공공예술개념은 오늘날 공동체의 새로운 합의 도출을 이끄는 행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공공예술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공공입체조형작품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와 과정을 중요시하는 행위나 정신성 그 자체를 중요시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실험예술은 바로 이러한 흐름을 집약한 새로운 공공예술(New Genre Public Art)의 일환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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