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평론] 사회적 참여로서 지평을 넓히는 퍼포먼스(하편)
[예술평론] 사회적 참여로서 지평을 넓히는 퍼포먼스(하편)
  • 류환
  • 승인 2020.08.20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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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주의적 행동예술의 퍼포먼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오늘날 많은 예술가들은 ‘행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가지고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이슈를 지향하고 있다.

퍼포먼스는 잘 꾸며진 무대 위에서의 공연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서의 자연, 정치, 사회적 맥락이 맞닿아 있는 자연을 재 맥락화 함으로써 새로운 감성과 인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접근하고 있는 공공영역(public sphere)에서의 예술적 실천은 점증하는 예술의 공론장의 기능 속에서 예술가의 지위를 점검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이 선언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생태 운동’은 오늘날 점점 거리를 좁혀가고 있는 생태운동, 사회운동과 문화예술운동의 접점을 전망하기에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실험예술가들은 창작 소그룹활동, 지역기반의 창작활동, 메시지를 담은 행동주의 퍼포먼스 등의 전방위적 활동에 관심을 가진 작가들이다.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고민하는 예술가는 인간과 생명과 자연과 사회와의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나가는 실천적인 행동주의의 예술가의 낮은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이제 사회적 퍼포먼스로 그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

미술문화 공간의 폐쇄성을 넘어서 현장예술의 시사점을 제공하며 공공 영역에서의 행동주의적 예술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제 실험예술에 있어서의 소통은 ‘미학의 역장’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통이 아니라 ‘삶의 역장’ 안에 존재하는 소통을 지향하고 있다.

그 소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필연적으로 예술의 장을 보다 확장된 개념의 공공영역과 만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열린 개념의 사회적 퍼포먼스를 통해서 막연한 미학적 소통을 넘어 삶의 소통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나열한다.

첫 번째 이유는 행동주의 예술은 완성태의 예술 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의미의 고정이나 형식적 환경을 지향하는 것은 더 더욱이 아니다. 미완의 가능태로서의 행동주의 예술을 생각하며 ‘아티비즘을 향해’ 열린 구조의 몇 가지 전거들을 가늠해본다.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행동주의는‘개념으로서의 예술의 함의’를 포괄한다는 점이다. 정신적 가치를 담론화하는 예술가의 실천에 있어서 개념적인 성향은 필수 항목이다.

물질로서의 예술의 한계를 넘어서 정신성을 근간으로 하는 장으로서의 행동주의 예술을 개념미술의 창의력을 옹호하며 전형성에 근거를 두는 리얼리즘 예술의 경직된 창작관행을 깨쳐버리기는 유용한 틀이다.

문화예술영역의 권력은 물질화된 형태의 예술제도에 기대고 있으며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역전되는 예술작품의 소유 또는 소통구조에 의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 마케팅이 언명하는바 팔리는 예술로서의 문화상품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은 무엇인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예술적 상상력이 감당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야말로 행동주의 예술의 본령이다.

따라서 계급계층 간의 상징투쟁의 장에서 상충하는 차이의 문턱을 넘어서게 하는 것은 오롯이 개념예술로서의 행동주의 예술가들이 할 일이다.

이를 위해 전재해야 하는 첫 번째 항목은 명료한 개념 설정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개념적 예술의 함의를 숙고하는 일이다.

둘째 행동주의는 ‘뉴미디어 시대의 예술개념과 영역 확장’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행동주의 예술은 무엇보다도 미디어의 활용 부분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매체와 장르의 구분을 무화하는 비물질적 형태의 멀티미디어플레이를 모색하기도 하며 해커(hacker)와 액티비스트(activist)를 결합한 핵티비스트(hactivist)라는 개념까지 고안될 정도이다.

전시장이라는 일차원적인 시지각 기반의 소통방식뿐만 아니라 방송이나 신문 같은 대중 매체와 인터넷이라는 강력한 미디어를 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미디어 자체의 특성에 함몰되지 않으면서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끌어내는 것이 살아있는 예술가가 미디어를 잘 쓰는 지름길이다. 이것은 현실 반영을 넘어 전유 개념을 도입하려는 태도로서의 리얼리즘과도 연결되는 대안적 예술운동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대화하는 자세로 대안적 소통으로서의 예술을 견인하는 자세야말로 뉴미디어 시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예술의 돌파구이며 동시에 행동주의 예술의 길이다.

새로운 소통 시스템의 방향으로 미디어 액티비즘 개념을 설정해 행동주의 예술의 전거로 삼음으로써 자폐적인 예술의 아성을 쌓기보다는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문화생산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전위적인 성격’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아방가르드로서 행동주의 예술은 헌신성과 진정성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유연함과 감성 영역의 잔혹성과 파괴적 에너지마저도 거절하지 않는 실험적인 예술이다.

따라서 행동주의의 전위적 특성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적 투쟁의 장으로서의 예술영역에서 매우 파격적인 무기로 작동한다.

수구적인 기득권 계급계층의 문화 예술적 관습이나 관행에 대해 기성 예술의 제도와 공간은 무기력하게 복종하고 오히려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안정적인 도구로 기능하지만 행동주의 예술전략은 그 한계를 넘어서 본연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전위적인 예술적 결과를 제공하는 얻는 일 못지않게 전위적인 이슈를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발적이며 예측 불가능 한 행위를 통해서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일은 예술가의 막중한 책무이다.

이지적인 지식인의 행동주의와 창의적인 예술가의 행동주의는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의 이분법을 넘어 권력을 지향하지 않는 지식과 예술의 생산자를 지향한다.

이때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것이 전문영역과 삶의 영역을 동시에 넘나드는 이중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무목적성과 자율성을 옹호하는 예술가의 지위와 목적의식적인 담론화를 지향하는 문화운동가의 지위를 동시에 가져가는 데 있어서 ‘전위로서의 아트비스트(artivist) 개념을 보다 명확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미시적 차원의 구체적인 실천’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이다. 거대담론의 영역이 잠재적으로 합의하고 있는 총체성의 미덕을 견지하면서도 미시적 차원의 실천적 함의를 놓치지 않는 방법으로서의 행동주의 전략을 생각해본다.

자치와 분권이 시대적 대세를 이루는 현시점에서 지역주의라는 이슈는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좋은 텃밭이다. 세계 네트워킹의 시대는 로컬 네트워킹을 전재로 한다는 점에서 지역성과 현장성이라는 화두는 오늘날 새로운 예술개념의 첨단을 이루고 있다.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현장으로 일은 미적 예술실천의 방법론 가운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항목이다.

‘인권, 소수자, 여성, 인종, 계급, 노동, 가족, 국가, 지구환경, 등의 문제 외 이에 대한 권력과 저항, 자본과 반자본, 전지구화와 지역주의의 이슈’ 등을 뛰어넘어 예술과 현실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영혼의 자유로움은 예술가의 몫이다.

다섯째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모더니티의 유산인 예술의 자율성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행동주의 예술은 그 어떠한 전술적인 방법을 채택하는 것에 대해서도 절대적인 자유를 견지해야만 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창작으로써 예술은 충분히 검토할 만 한 방법이다.

폐쇄적인 소통체계를 뒤흔드는 파괴적인 예술 또한 고전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중한 가치이다. 금기를 타파하는 불량한 행동은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탈 중심의 메시지를 던지는 예술적 실천의 효자종목이다.

권위주의의 견고한 아성을 무너뜨리는 게릴라식 예술은 너무나도 효율적인 예술 행동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효율성이란 모더니즘 예술의 심미성에 버금가는 덕목으로 꼽을 수 있다.

자유분방한 놀이 개념, 파괴와 불량, 게릴라 등 이 모든 개념들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 절대적인 자율성의 긍정적인 미덕을 최대한 살리는 아티비스트의 길이 될 것이다.

글을 맺으며

이상으로 현장미술과 공공미술이라는 예술적 실천과 탈현대적 맥락의 예술 사회학적 관계에 관한 진단과 더불어 다양한 활동으로써 사회의 확산에 미치는 영향들을 짚어봤다.

특히 ‘개념으로서의 예술’ 뉴미디어시대 예술개념과 영역의 확장, 아방가르드로서의 아티비스트(artivist)의 지향, 미시적 차원의 구체적인 실천, 그리고 예술의 자율성 개념에 대한 전향적인 입장‘ 등에 대해서도 열린 구조의 아티비즘을 촘촘히 가늠해봤다.

따라서 굳이 종결한다면 저항의 예술과 욕망의 예술이라는 두 갈래 길이 우리 앞에 있다고 귀결시켜 결론지을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서지 못하는 것은 아니어서 두 갈래 길을 병행해간다면 좋겠지만 그 누구도 양자의 양립과 병존을 쉽게 단언할 수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 거대한 광풍이 격동의 사회를 휩쓸어갈 때 운동예술은 욕망의 예술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다.

이제 저항과 욕망의 변증법을 통해 현장성과 공공성을 아우르는 탈현대적 예술실천의 장으로서의 행동주의 예술 ’아비티즘을 향하여‘ 너른 품으로 큰 걸음 내딛는 일이 우리 행위예술가의 앞에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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