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 (상)
[평론]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 (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08.31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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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와 서정을 귀결하는 눈물의 소묘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꿈속에서나 생시에 한 번도 선생의 생전 모습을 뵌 적은 없지만 사진 속에 비친 연약해 보이는 낡은 흑백사진 모습을 보며 한참을 골똘해졌다.

보여지는 이미지의 형상에서 예감되듯 가녀린 몸매에 지고지순한 가슴속 뜨거운 눈물 한가득 울렁였을 우리 지역이 배출한 향토색 짙은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고(故) 박용래(朴龍來, 1925~1980) 선생,

빛바랜 사진 속 모습에 비친 배경으로 보아 건물과 집들이 나지막한 어느 골목 앞(시인의 오류동 집 앞으로 추정됨) 스산하게 바람 불어 을씨년스런 겨울쯤으로 보인다.

하얀 목도리와 벙거지를 깊게 눌러쓴 조그마한 체구에 발 시리게 신은 흰 고무신과 헐렁한 바지를 입고 윗도리를 당신 맘대로 걸친 가녀린 몸매에 담배를 손에 들고 있다.

미치도록 사무치는 가슴에 청초한 인상으로 순한 어투를 가만가만 이야기했을 슬픔 가득 머금은 마음아린 시인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선생의 생전모습이다.

선생은 상시 우리 곁에 다양한 문학지와 시비를 통해 오래전부터 머물러 있어 시의 성격을 짐작하고 있는바 선생의 쓸쓸한 외길인생을 상기해 뒤돌아보며 대표적인 작품을 따라 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자 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

선생이 펴낸 첫 번째 시집 ‘싸락눈’(심예사, 1969)에 발표된 글 속에 실려 있는 시들 중에 필자에겐 여러 가지 문학적인 짜임, 구성, 시어, 묘사 등에서 시선을 고정케 하는 한편의 시(詩)가 상상을 넓히며 익숙하게 다가오는 ‘저녁 눈’이 대표적인 시로 읽혀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馬)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로 시작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저녁 눈발이 붐비는 4행의 길지 않은 시다.

단박에도 자연적인 순응을 기반으로 향토와 서정을 함축하는 시인의 관념 속에 펼쳐지던 생생한 상황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게 하는 흔치않은 시편들로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다.

다음은 시선에 잠겨있는 선생의 시 ‘저녁 눈’을 들여다본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 눈’의 전문이다.

위 시에서 읽히고 보이는 여운은 입체적인 공간적 배경과 설정들을 목가적으로 묘사, 친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들과 풍경들을 잘 드러나도록 부여한 시이다.

누구든 한 편의 시를 완성하고 당시의 상황들을 펼쳐 읽는 이로 하여금 그립고 아름다운 활자가 주는 이미지의 잔상이 오래도록 되살아나게 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시인의 직업이고 본령이자 작품의 정도이다.

이러한 시는 단순히 한 장의 시집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앞서 선명한 그림 또는 사진이 연상돼 눈(目)에 선하게 드러나는 상황과 자연의 풍광들을 시정으로 바꾸어 놓고 있어 눈발이 내리는 일상적인 겨울 오후를 유연하게 풀어내 마치 빛바랜 추억 속 앨범을 보는 듯 시적 풍미를 한층 고조시킨다.

옛 시골풍경의 이런 현상들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 말을 기르는 곳이라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스치고 지나칠 일이겠지만 선생의 시각에 다다른 이마쥬는 움직이는 형상들의 초점에 시간의 개념까지를 묻고 있어 긴 여운을 남긴다.

이를테면 선생의 앵글에 잡히는 심상은 사사로운 자연현상조차도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는 평범함을 뛰어넘는 예민한 관찰력으로 잡다한 시상 전개를 배제하고 시적 압축으로 섬세하게 왕골을 짜듯 세련되고 간결한 함축미를 차용해 품격을 높이는데 함의를 더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시의 상황 전개를 심미안적으로 확대하고 있지만 고도에 가까울 정도로 활자를 아껴 절제하고 있어 이를 자연스럽게 승화시켜 하나의 시각가지도 완성하는 작품으로 환치시키고 있다.

이는 선생의 감성이 눈발 내리는 겨울 초저녁 변두리 빈터까지 가슴속 깊이 젖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한가도 충만토록 한다.

먼저 시인은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을 반복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시적리듬의 효과와 함께 눈이 내려 쌓이는 시간의 흔적과 삶의 모습을 조용히 조응한다.

사실 ‘저녁 눈’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물질이고 또한 위에서 밝히고 있는 네 가지의 사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대상물들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시인은 자연적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붐비다’로 표현함으로써 적막한 분위기와 소멸의 이미지를 역동성으로 가미해 내려 쌓이고 있는 눈발을 연상작용으로 상기시켜 눈이 내리고 있는 진행을 선두 한다.

‘말집 호롱불’, ‘조랑말 말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 등 네 장면의 제시 외엔 동일한 구분으로 4행의 반복에 불과한 시지만 나아가 ‘저녁 눈’을 통해 사라져 가는 것, 소외되어 있는 것 그리고 잊혀져 가는 추억 등 자신의 시간을 뒤돌아보고 있는 시력도 적잖아 오히려 크게 보이는 장점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따라서 문명이 밀어내는 거센 변화의 물결에 쓸려 사라져버릴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자연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이 ‘눈발’로 환기되고 ‘붐비다’로 축적되고 있는 원근(遠近)의 풍경을 넉넉하게 보여준다.

이는 상황적 배경과 함께 어느 겨울 초저녁의 이미지를 극대화해 미적용어로 뜻하면 ‘보자르’라는 아름다운이 미학을 문학적 서술로 이끌어 균형감 있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은 그것들로 하여금 화려한 문명의 도시보다 점차 사라지고 있는 변두리 즉, 향토적인 사물들에 애착을 갖고 타인의 시선까지도 과거의 시선으로 머물게 하고 있어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보여주고 있음이 역력해 보인다.

비슷한 ‘겨울 밤’이란 시 한 편을 더 읽어본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여기에서도 읽혀 드러나듯 길지 않은 작품이지만 선생은 역시 눈발이 내리는 겨울밤, 마음속으로 절실히 고향을 떠올리며 긴 겨울밤을 지세우고 있다.

그래서 선생의 시에서 드러나는 자연과 향토는 즉흥적이거나 의식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며 상례적인 명상의 존재들로 떠올리거나 무심결에 그려지는 자연은 더욱 아니어서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작품에서 보이듯 시의 특징은 행간의 여백을 중시해가며 행간 속에 숨은 소묘법의 일환처럼 반복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반복적인 배열은 가상이 아니라 애상적인 분위기들을 배가시키는 사물들과 결합해 더욱 선명한 풍경의 완성도를 높여 시야를 맑게 이어간다.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도록 내리는 눈’도 ‘저녁 눈’과 같은 형식으로 마찬가지인 셈이다.

밤에 내리는 눈은 시골이든 도시이든 어디에도 똑같이 내린다. 그러나 선생이 인지하고 내리는 눈(嫩)은 전혀 다른 눈(雪)으로 차용된다.

그것은 농민의 삶 속을 그리는 터전의 일부인 ‘마늘밭에 내리는 눈’이며 ‘고향집 추녀 밑 달빛은 쌓이리’라는 달빛도 농민들의 보금자리인 초가집 추녀 끝에 쌓인다.

소년기부터 인식의 기저에 입력되고 저장된 축적의 시간들이 섬섬하게 눈(目)에 밟히는 풍경들을 재환류시키는 겨울밤을 여실히 드러나게 하고 있어 애착을 갖고 있으며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마을’ 역시 향리 밖을 벗어난 옛 시절 친구들과 어울리며 물장구치던 냇가에 다다르는 추억에 맞닿고 싶은 심정을 깊숙이 떠올리고 그리워 한다.

누구나 철부지 어린 유년시절을 보냈던 추억은 쌓이기 마련으로 고향(집)을 중심으로 강이나, 냇가, 동산, 친구들이 가슴속 깊이 자리하는 것이 본능이어서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심리다.

따라서 향리 밖에서, 인생의 노정에서 멀찌감치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곳곳마다 투영돼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라고 한 부분에서도 호롱불이 꺼진 기나긴 겨울밤 마당 한구석에 ‘바람은 잠을 자리’라고 한 부분에서도 쓸쓸해 보이는 고향집 마당귀를 겨울밤과 하나로 귀결, 병치함으로써 외롭지 않으려는 평온하고 순박한 농촌의 겨울밤을 서정의 한 가운데로 인도하고 있음도 확연하다.

다음은 ‘연시’(軟柿)라는 시다.

여름 한낮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작품의 이미지를 떠 올려볼 때 한 폭의 고고한 난(蘭)촉을 연상케 한다. 깔끔하고 꼿꼿하지만 부드러움도 물씬 배어 묻어난다.

선생의 시선 속에 비친 그림은 14행으로 배열하고 있으며 뜨거운 여름 땡볕을 이기고 돌담 위로 크게 자란 감나무에 매달려 붉게 익어가는 감을 가을에 내린 서리와 눈 내리는 겨울과 깊은 밤에서 그리고 어느 제삿날로 이어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연속성을 뚜렷하게 담아낸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을 거쳐 계절로 이어지는 현상을 눈 내리는 어느 겨울밤 제사상에 ‘심지 머금은’ (필자의 입장에선 꼭지를 매달은) ‘흰 종발(종지 그릇에 위에 놓아진 감)로 빛나다.’라고 간결하고 있다.

상위 시에서 보이는 구성과 심상의 텍스트로 보아 시간적 흐름을 촘촘한 추이 과정에 선입해 시상 전개에 맞춰 지난 시간의 흔적을 치밀한 현상으로 꾀해 연동흐름의 작용변화와 제사의 기일에 놓여있는 농익은 연시의 세월까지 선생의 관념 속에 머물러 있다가 되살아나고 있음이 암시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읽혀지는 계절은 역시 ‘눈’ 내리는 겨울밤이다. 선생은 유독 겨울과 깊은 밤, 내리는 눈, 비추고 있는 빛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유는 예인들이 선호하는 비, 바람, 낙엽, 눈, 계절변화 등은 평범한 일상에서 얻어지는 즉흥성보다는 화자의 대상물들이 움직이고 이동할 때 마음에 미동이 일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는 상위에서 밝혔듯 애상적 정서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재생적 감상에 힘입어 독특한 토속미학을 형성하려는 의지로 향토를 더한 정한의 노래를 회구하고 있다.

그야말로 눈 내리는 고요한 겨울밤을 서정의 가슴으로 구가해 생명력이 깜박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 속에 독자의 감수성을 모으게 함은 시인의 작용이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선생이 특히 애정을 갖는 소재들의 특징은 현대문명 사회에서 사라져 없어져 가는 것들이 대부분으로 농촌에서 태어나 이를 보고 자란 유년기와 소년기의 기억들을 되살려 서민들의 애환들이 서린 풍경들을 끄집어 그려내는 작품들이 대다수로 훗날을 내다보는 심미안이 유력하다.

전반적으로 선생은 이러한 텍스트를 동반해 차분하면서도 절묘하게 묘사하면서 그 속에서 옹기종기 터를 잡고 사는 우리 이웃 서민들의 모습과 생명체들을 붙잡아 향토에 깃들은 정한의 관점들과 리즘(흐름)들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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