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하)
[평론] 겨울밤 지새우는 흙빛 서정의 정한(情恨)(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09.06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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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가슴속에 생명력 움틔우는 심상(心想)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다음은 필자가 평소 선생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유지하고 있어 관계되는 일사들의 상황적 구성으로 연결되었을 이면들과 문학적으로 분석되는 내용들을 헤아려 보고 세상 만물에게 친근한 눈빛으로 다가갔을 몇 가지들을 추론해 나열해보고자 한다.

앞서 선생은 타고난 천성대로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돼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 글을 써야하는 운명적 시인으로 눈시울을 붉히며 원고지를 채우는 일상이 지속되었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다.

평소 세밀함과 예민한 감수성으로 풍성하게 잠재된 의식에 깊게 파고든 너울들과 상시 읊조렸을 떨리는 가슴에 돋보기를 갖다 대보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한가득 출렁이는 조직망들이 확대돼 있었을 것이다.

우선 선생의 다른 작품들은 차후에 또다시 견지하더라도 생전에 시인으로서 시선에 머무는 자연과 사물들은 수정하지 않고 심상에 머무는 초점을 극대화해 전개해나가는 것이 선생의 시적 매력의 포인트다.

이를테면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른 흐름의 현상들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시력에 주력하고 있어 자연의 무한한 변화를 시적공간의 확장성에서 이를 탐색해 피력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의 입장에선 선생이 살아생전 모든 사물에 상황적 감정으로 적응해 사물에 내재돼 있는 서정을 직관하는데 충실한 자세를 흩트려지지 않으려고 감성적 감각을 불러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인간적인 그 자체의 요소로서 걸작의 기본자세가 된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요소란 ‘거의 어김없는 인간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인간적인 사람은 “예술인으로서의 최상적인 인간모습을 회복하려는 원리적이고 순응적인 자연미를 갖춘 인간적인 모습에서 그 표리(表裏)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요소가 작품으로 반영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생을 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전통적인 서정성과 현대적 정서가 조화를 이루는 내밀성과 치밀성이 견고하게 짜여 그 자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특징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힘에 온정을 다하고 있었음이 풀이되는 사유다.

시인으로서 인간 고(故) 박용래 선생의 슬픔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차갑게 멀어지는 이별처럼 눈물을 날마다 조아리며 가슴 적셔 두드리고 싸늘한 바람은 머리채를 잡고 와서 구석구석 책상모서리에 눈발처럼 쌓였을 것이다.

방황은 안주할 수 없어 밖으로 떠도는 집시의 이방인처럼, 유랑자의 팔자처럼, 광대의 풍각쟁이처럼, 나그네의 발걸음처럼 맴돌고, 맴돌고, 또 맴돌다 지쳐 쓰러지면 자신도 축축이 적셔져서 막걸리에 푸념이라도 하듯 술잔을 들이키며 원고지를 끌어 앉고 잃어버린 시간의 시원을 더듬기 위해 고독한 갈급의 시간들 보냈을 것도 머릿속에 충분히 상기된다.

지각은 감각이 흔들릴 때 비로써 움직인다는 것을 자각하고 또, 타인의 시선에서 멀어져 지워지고 비워지는 어둡고 외로운 밤이 돼야 묵은 해갈이 풀리듯 세상 누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서 전체의 흔적에 이르기까지 애정이 닿는 앞, 뒤 안뜰마다 눈시울을 붉히는 맘 여린 심성에 활자를 찾는데 주력했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새벽 내내 나약한 허정도 애정의 시선으로 떨칠 수 없는 침잠된 그림자마냥 눈 감을 때까지 껴안고 다녔을 순수한 서정 속으로 파고드는 눈물 많은 울보시인.

천성적 타고난 여린 슬픔마음으로 원고지와 볼펜으로 간단하다고 여기는 몇 줄의 활자일지라도 끝내는 아름다움을 미학으로 승화시키는 타고난 시인이라는 것도 주저 없는 판단이다.

누가 무엇을 자랑할지라도 상관 않고 내 맘 편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길, 목숨이 다할 때까지 걸어 실천적으로 체감한 시학 혼 눈물로 흠뻑 적시며 문학적 배양에 주력을 다했던 고 백용래 선생을 꿈속에서라도 만나 뵙고 또, 보고 싶다.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인식순환

선생이 생전 왕성한 활동 중 가장 자주 만나 문정을 나누시던 우리 지역의 대언론이신 안영진 주필님과 많고도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왔던바 비교적 소상히 귀담아 들어오던 일화들이 많다.

사금(砂金)을 가려 선생의 시문학의 생애에서 많은 일화 중 세 가지를 함축한다면 첫째가 문학이고 둘째가 눈물이며 셋째가 술이었을 것이다.

이 세 가지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당연함은 우연도 아니고 은연도 아니며 더욱이 인연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사연이 관측에 앞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예술가는 만들어지는 경우보다 태어날 때부터 예지적인 기질과 소양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선생의 시에서는 표현의 특징들로 감각적인 심상이 다양하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고요하면서도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정서를 직결시켜 꿰매는 단단한 매듭들이 부드러우면서 유연하게 자주 차용되기에 관계성의 미학을 높이고 있다고 판단돼 진다.

한참을 가야 비로써 다다를 먼 산과 강과 들에서 보이는 곡선이 아름다운 한 폭의 ‘문인화’(文人畵)에 마지막으로 선을 긋듯 붓끝에서 간결이 머물다간 드물게 돋보이는 여백의 그림들을 보는 듯 이 무지하게 돌아가는 패거리의식이 강한 집단들의 현상계와는 전혀 또 다른 인간본성의 영혼을 그려보기에 충분하고 모자람이 없다.

자연적인 향토색 짙은 선생이 발표한 ‘월훈’의 허전한 노인의 삶 속에 거울을 비추듯 자전적 생을 내다보는 ‘달무리의 뜻’을 절실히 그려냈던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비쳤을 직관을 갖추셨던 분이기에 말초신경까지 자극돼 살아 숨 쉬는 애상도 감추지 않고 여실히 드러내놓아 애정이 짙게 물든다.

뒤 돌이킬 수 있다면 막걸리 주전자라도 받아놓고 하얀 눈 내리는 겨울밤을 지세우며 흰 눈처럼 순수하고, 수채화처럼 선명하고, 유리처럼 투명한 55세 심안을 읽을 수 있는 시대에 동행한다면 선생과 마주하는 기회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생각이 먼저다.

더구나 작품에서도 보여지 듯 훌륭한 경의는 숙의로 하고 허름한 대포 집에서라도 술 주전자를 올려놓은 조촐한 탁자 위로 건네받는 막걸리 잔을 나누고 싶어진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잔상 속으로 스미는 연민들을 보듬는 시적 표정으로 떨리듯 술잔을 들고 촉각의 진원지에 물을 적시듯 밑으로 가라앉는 가슴으로 세상과 사물을 조응해 서정이 갖는 본연의 정서와 미감의 균형을 유지한 채 이를 간과하지 않고 진실을 유감없이 보였을 것이 뚜렷하다.

남들의 시각에선 사사로운 사물들이라도 선생의 메타포에는 새로이 소생하는 애정의 손길과 눈길이 머물러 눈발이 내리는 초저녁 겨울밤 호롱불 밑에서 글귀로 움터 생명력으로 귀결되는 시학정신을 느꼈을 것이기에 그립다.

그것은 선생 인생의 사사로운 깊은 시름이기보다, 또 나약함이라기보다 문학을 향한 경건한 대응으로 수용해 특유의 진솔한 시세계를 형성하며 원고지를 채우려는 목적에 주력한 애정을 담는 슬픈 서정은 당시에 만나 뵙던 모두는 알고 있을 터이다.

애착해 천착되었던 섬세한 지심들은 위업이 되고 시에서 시인으로 절제와 간결성을 노래한 작품들에서 흔치않은 글과 많지 않은 시인의 감각을 일려주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에 결명(決明)한 이유가 된다.

오십 먹은 소년은 운명적으로 태어난 ‘천상시인’(天上詩人)

6~70년대를 거치면서 잠들기까지 정체된 한국문학 발전토양에 자양분을 입김처럼 불어넣어 크나큰 작품으로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주목되고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

딸(박연, 서양화가)은 “아버지는 오십 먹은 소년”이라며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으로 운명되어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짐작되는 예인으로서 이르는바 적잖다.

간과할 것 없이 자유분방했을 의식구조의 구조망을 가진 예지적 깊은 사유로 어디에도 얽매이는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아 무엇인가 요구하듯 눈물짓는 어린아이 마냥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감성의 시인으로 우리 지역을 넘어 한국문단을 빛낸 고 박용래 선생의 시울 겨운 예술혼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눈치챈다.

야속한 세상은 낙엽 한 잎 떨어지는 이치라도 불변의 순환적이고 반복적인 소멸이어서 사라져 없어지게 마련이고, 사람은 망설이지만 세월은 망설이는 법 없이 흘러 지나가는 데 양보가 없는 법이다.

또 한번 흘러간 인생은 풀어진 태엽처럼 되감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는 것은 대자연이 실행하는 가장 완벽한 섭리이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어서 어쩔 수는 없는 통한과 통속의 도리 없는 것이 인생사다.

그러나 소멸이 갖고 있는 역설적 의미를 다시 한번 숙고해보면 그것들은 사라졌다 다시 생명체를 갖고 태어나는 생성과 불과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 세월의 흐름과 지난 과거의 리듬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보고 있어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든 소멸되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위업과 업적인 성과야말로 특히 예인들한테는 훌륭한 작품을 통해 재생되고 있다는 것은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어지는 또 하나의 인식적 순환 고리로 되살아나 영원케 하고 있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래도록 우리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아니 영원히 생성되고 재생되어 강경상고와 보문산 사정공원 자락에 세워진 시비는 우리 지역 시인들의 이마에 손을 짚고 서걱서걱한 바람 서둘러 겨울을 재촉하는 당신이 부르던 호롱불의 혼 앞에 흰 눈이 쌓인 채 침묵하고 있는 선생의 시비(詩碑)를 우러러보며 그 위 손수건 한 장 올려놓는 마음으로 조용히 마무리 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아들인 박노아가 ‘아버지를 회상하며’라며 활자로 남긴 글귀 한 구절을 옮긴다.

-‘아버지를 회상하며’-

‘가을, 감나무 이파리, 감새의 수리성,

오래 전 일입니다.

방에서 큰 울음소리 들리고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쳐다본 아버지의 모습.

아…

전 시인을, 우수수 떨어진 청시사의 저녁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구름의 행방을 묻지 말자”, “구름은 영원한 방랑자.”

두 줄의 시구를 읊고, 육 개월 후 구름이 되어 가셨습니다.’

-누가 보아도 시인의 멀지않은 저녁놀을 예감한 문구다.

글을 마치며

오래 전 읽어봤던 소설의 지은이가 기억 속에 가물가물 맴돌다가 한참 만에 떠오른다. ‘잃어버린 지평선’을 쓴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말한 한 구절이 잠시 침묵케 한다.

“어차피 무의미한 삶이라면 오래 산다는 것은 더욱 무의미 하다”라고 뒤묻는 메시지가 긴 여운을 남기며 허상이라 여기던 실상들이 자신 뒷모습에 비추는 그림자가 마냥 조용히 바닥에 가라앉는다.

여기에 필자도 한마디 덧붙이며 다시 옷깃을 여민다.

“평범한 인생의 노선을 따라가는 안일무사(安逸無事) 한 삶은 대체로 미진(微塵)에 머물다 그치게 마련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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