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논단] 회화(繪畫),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려야 하나 (상)
[미술논단] 회화(繪畫),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려야 하나 (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09.14 0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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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가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중요성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읽어본 지 오랜만에 예술과 철학이란 책을 다시 손에 들었다.

가물가물하는 기억을 더듬어 읽어보자니 곳곳에 밑줄을 그은 흔적이 여러 곳이다.

당시 필자로서는 중요하다고 판단돼 밑줄을 그은 것이다. 그림을 작업하는 작가들이 창작하는데 참고가 되기에 중요하다고 판단돼 회화 속에 숨은 담론들을 읽기 쉽게 각색(脚色)해 필하고자 한다.

그림은 말없는 한편의 시(詩)이고, 시는 말없는 하나의 그림(繪畫)이라고 했다.

시나 그림이나 모두 간결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의미로 최소한의 필(筆)이 머물 곳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다.

우선 회화(繪畫)란 사전적 용어로 여러 가지 선이나 색채로 평면상에 형상을 그려내는 조형예술(造形藝術) 중 하나이다.

조형예술 또한 각종재료를 사용해 공간에 형태를 만드는 예술로서 일정한 공간이나 평면에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를 뜻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학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중 그림이 갖춰야 할 중요 부분으로 네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간결(簡潔)해야 한다. 둘째 모든 표현요소에 균(均)일한 이미지가 부여돼야 한다. 셋째 소낙비가 막 지난 후에 물먹은 대지처럼 물기가 함초롬하게 윤(潤)이 젖어있어야 한다. 넷째 메아리가 있어야 하듯 운(韻)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시나 회화의 완성도가 상위에서 밝힌 대로 이 네 가지 속에 포함돼야 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 이 네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기에 명작으로 불리며 유명해졌다.

그럼 그림에서 이 네 가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우선 회화에 있어서 간(簡)결이라는 뜻은 깨끗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며 너절한 것들을 배제해 최적으로 색, 형, 선에 의해 욕심을 자제하고 심상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潔)은 표현하려는 내용자체가 아름다워야 한다. 부수적인 설명이나 의미의 과장 또는 자신의 재능을 드려내는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간결은 앞서 말한 세 가지에 대한 충분한 수련을 통해 수양된 몸과 마음으로 정신적인 필력에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시나 그림은 작자에 대한 마음의 반영이라고 한다.

마음에 따라 우울하고, 슬프고, 고독하고, 외롭고, 어두운 작품들이 창작돼 진다. 비록 혼란한 속세에 살지만 때가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생략의 묘미를 찾는 것이 창작하는 예술가의 정신이다.

회화에 있어서 사고(思考)

회화는 단순히 자기 눈에만 의지해 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어떤 심오한 사고를 가지고 그려야 함은 물론이지만 역시 좋은 생각일지라도 본인의 생각일 뿐, 타인의 시각에서는 이 또한 판이하게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사고(思考)라 하기보다 상상에 머물면 작품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미학자나 평론가들이 공히 그 생각을 하나의 예술사상으로 인정하고 평가할 때 하나의 장르를 창조해 걸작이 되는 것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파 음악인 멘델스 존(mandelssohn,1729~1786) 은 “예술이란 감정에 의해 인정되는 미(美)를 그것이 진과 선이 될 때까지 끌어올려야 하며 창작의 목적은 도덕적 완성”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감정을 진과 선이 될 때까지 그리고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해 진, 선, 미 일체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뜻이다.

회화의 형이상학(形而上學)과 형이하학(形而下學)

톨스토이는 “그림은 자연을 모방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자연의 무엇을 모방해야 하는가? 자연 사물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모방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의미는 어떤 시각에서 논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회화에서 형이하학은 단순히 사물의 외형적인 것으로 다른 사물과 구별하는 정도의 의미로써 꽃, 산천, 건물 등의 단순한 명칭에 불과한 사물들을 의미한다.

수학자가 그린 원과 화가가 그린 원은 같은 원이라도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이때 수학자가 그린 원은 형이하학적인 원으로서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회화에서 취하는 형태의 원은 수학자가 그린 원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회화에 있어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대다수의 평론가들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그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림에서 형이상학적인 것이란? 첫째 사물이 생긴 원리로써 왜 그렇게 생겼는가? 둘째 그것이 존재가치로써 왜 그것이 만들어 졌는가? 셋째 실존 가치로써 그것이 다른 것과 어떤 관계성을 가지며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은 어떤 것들이며 선적인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들의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이며 추한 것들은 무엇인가? 등등을 헤아려 그림을 그려야 한다.

구체적으로 회화에서 형이상학적인 내용이란 분위기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분위기적인 것은 사물과 사물이 서로 어울려 어떤 상황들을 전개하는 것으로 둥근 것과 네모난 것의 어울림 또 서로 다른 것들과의 어울림 등이다.

서로 다른 것이란 빛과 물체, 돌과 나무, 산과 들 등등이다. 이 자연 사물들이 서로 어울려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회화에서 시각적인 어울림

기하학적 시각에서 말하는 원과 사각을 형이상학적으로 집약하면 곡선과 직선이다. 기운으로 말하면 양과 음이고, 성질로 말하면 부드러움과 강함이며, 형태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다.

이것들을 통칭 원과 사각의 이미지로 곡선과 직선으로 말할 수 있으며 예를 든다면 정물화의 직선형체와 곡선형체의 기물들의 배치나 임의로 선택에 의한 가상적 어울림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풍경화의 경우 물과 돌, 산과 구름, 잎과 줄기, 실공간과 허공간의 어울림과 빛과 그림자의 어울림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형이상학으로서의 조화를 표현한다는 것은 바로 부드러움과 강한 것의 어울림, 하늘과 땅의 어울림 등을 뜻하며 하늘과 땅은 공간과 사물의 어울림으로 본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이란 말은 형체의 시각에서 말할 때의 명칭이고 이것의 작용면에서 말할 때는 건乾), 곤(坤)이며 성정(性情)면에서 말하면 강,약, 온유를 뜻한다.

건은 건강하다, 건전하다, 완전하다, 불변하다로 동적(動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풀이하자면 전체의 운행이 동적이지만 건전하고 완전하며 불변한다는 것을 뜻하는 형이상학적 의미이다. 이를테면 순(順)은 정(靜)으로써 건(乾)의 건전, 완전, 불변하는 것에 절대 순응해 우주적 질서를 지키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늘을 그리고 땅을 그릴 때 이와 같은 내용을 담아 그리는 것, 즉 공간의 건(乾)적 작용, 지상에 있는 모든 사물의 곤(坤)적 순응작용을 그려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회화의 강유(剛柔)와 조화

형이상학적인 표현내용으로써 강유(剛柔)는 어떤 것인가? 어떠한 물체이든 부드러운 부분과 강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성질에서도 그러하다.

그림을 그릴 때 사물의 형태적인 것이나 재질로서의 견고성 같은 것을 표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부드러움을 표현하거나 또는 단단함을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컵을 그릴 때 컵을 그림으로써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케 한다든가하는 등이다. 컵 자체의 형태적인 것이나 그것의 경고성이나 질적인 것만을 표현하는 것은 묘사력 신장을 위한 과장의 단순한 그림그리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아무거나 그리면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그렸다는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단순한 컵 자체만 그린다 해도 공간을 그려 넣어야 한다.

이때 공간을 얼마만큼 실감나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컵이 제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공간과 사물의 중요한 조화이다.

또 컵과 공간 중에 어떤 부분을 중요시 했는가에 따라서 주제가 분명해진다. 만약 공간을 중요시 했다면 컵은 공간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오브제적인 요소에 다름없다.

만약 공간을 표현한다면 공간과 다른 구체의 사물을 표현요소로 등장시켜야 한다. 그래야 공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을 공간과 사물의 조화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공간과 사물의 조화 현상을 하늘과 땅의 조화라 한다.

맑은 기운과 우아한 바탕

회화에 있어 가급적이면 맑은 기운(淸氣)과 우아한 바탕인 아소(雅素)를 느끼게 그려야 한다. 청기는 하늘의 성정이고 아소는 땅의 성정이기에 그렇다.

맑고 푸른 하늘처럼 청명한 기운이 감돌게 그려야 하고 땅의 조용하고 우아하며 소박한 성정과 같은 기운이 감돌게 그려야 한다.

이는 동양미학의 사상이기도 하고 서양의 조형론(造形論)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씨나 그림으로써 그 작가의 성장을 알 수 있다는 해석이다.

맑은 선비정신 또는 신선 같은 사람은 바로 청기(淸氣)와 아소(雅素)와 같은 기운을 몸에 담는다. 반대로 음흉하고 비루하며 비리적인 사람의 작품들은 올바르지 못하는 기운을 풍기게 마련이어서 청기와 아소는 명작이 갖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회화에서 아소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으로 본다. 논어에서 밝히고 있는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대목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그림을 그린 후에 표현돼야 할 것은 바탕이라는 뜻이다.

이 소(素)의 뜻은 본바탕, 소박함, 개인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상태, 순수함, 그림 안에 진리가 담긴 것 등의 의미가 있다.

한 작품에서 이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는 것이 아소의 의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개인감정이란 어떤 정서적인 것을 선택할 수 있어 형이상학적인 것에 개인감정을 개입시켜 작품의 본질을 흐리는 진, 선, 미의 질서를 흐트러지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회화의 절대정신

헤겔(hegel)은 “회화는 절대정신의 현현(顯現)”이라고 했다. 정대정신이란 불변의 진리와 같은 정신, 우주만물이 생성하고 변화되는 자연의 절대적 불변의 이치와 같은 것, 또는 최상의 진선미의 경지에 머물러 있는 정신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하자면 최상의 아름다운 위치에 머물러 있는 정신으로 인간의 순수 본성과 같은 것, 이것이 절대정신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정신이 작품으로 승화돼 나타나는 것이 현현이라고 한다. 결국 회화는 절대정신을 표현해 내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루돌프 아른하임(Rudolfe Arnheim)은 “그림은 밖에서 그리지 말고 캔버스 안에 들어가 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림 안은 곧 그림을 어떻게 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가를 그 미적 구성법칙을 그림 안에 그려 넣어야 한다는 말이다.

밖에서 그린다는 것을 쉽게 표현하자면 남들이 하는 대로 그냥 좋아서 막연하게 그린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연구하지 않고 유행을 따라 그리는 그림은 결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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