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논단] 회화(繪畫),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려야 하나? (하)
[미술논단] 회화(繪畫), 무엇을 보고 무엇을 그려야 하나? (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09.21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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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서 균(均)과 윤(潤) 그리고 운(韻)이란 무엇인가?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첫째 그림에 있어서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가 화면에 있는 모든 선과 색상 또는 형태에 있어 균(均)일하게 침전돼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가을을 표현하고자 하였을 때 화면에 칠하는 색상들이 모두 가을의 색상으로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 그림을 그릴 때 나타나는 다양한 색상들은 낙엽과 산과 나무들 사람들의 의상들만의 색상을 띠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을과 상관없는 색으로 또는 가을의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오히려 걸림이 되는 경우로 이를 표현했다 하더라도 부족하거나 가을처럼 그런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아서 본래의 그림의 이미지가 불분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균을 고민하며 작업의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회화의 윤(潤)

둘째 회화는 윤(潤)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택이란 말 그대로 윤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윤기는 새것처럼 반질반질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이 윤기가 없어 보이는 것이 상당수이다. 대부분 거칠고 바짝 말라있는 것처럼 돼있어 죽어있는 고목 같거나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지가 딱딱하게 말라 타들어가는 것처럼 메말라 있게 보인다.

따라서 생성적인 생명력이 없고 고갈된 어떤 분위기만 연출돼 펼쳐진다. 당연히 죽어있는 회화는 살아있는 회화만 못하다는 이치는 당연하다. 그래서 살아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살아있는 회화를 창작하려면 색체를 어떻게 혼합해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참고로 덧붙인다면 청록계통의 색은 비교적 윤기가 있고 붉은색 계통의 색은 시각적으로 윤기가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붉은색 계통이라도 어떻게 혼합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윤기가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때 어느 작가들은 윤기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니쓰’같은 화학제품 같은 것을 선호하는데 이는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바람직한 방법이 못된다. 왜냐면 이 방법으로는 진정한 윤기와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회화의 운(韻)

셋째 회화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이미지가 표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는 표현내용으로써 분위기적인 것, 역사적인 것, 삶의 내용 같은 것을 의미한다.

풀이하자면 웅장함, 신비함, 우아함, 숭고함, 고상함, 청아함, 단아함 등사물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이러한 현상들을 운이 서리게 그려 넣어야 진정한 작품이 된다는 것이다.

회화의 표현내용

그림(繪畫)을 논할 때는 모양을 얼마나 닮게 묘사했는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얼마나 명료하고 충실하게 표현했는가를 논하게 된다.

회화는 사실화나 추상화나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고 묘사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미지는 심상(心象) 또는 의상(意象)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심상은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같은 것이고 의상은 동양 산수화의 의취(意趣)와 같은 뜻이다. 그런데 심상과 의상은 결국 자기가 보는 사물의 어떤 것으로써 직관에 의해 마음에 그려진 그림이다.

따라서 인물을 그릴 때 팔을 실제보다 길게 그릴 수도 있고 도자기를 그릴 때 모양을 약간 변형해 다른 사물을 상징하도록 그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직관적 표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해 명확한 이미지를 관람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미국의 랭거(Langers) 교수는 “그림은 경험이라는 원(原)재료를 형상화하는 것, 내적 삶으로써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 어떤 상(flgure)을 조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라 했다.

이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는 것을 그리는 것, 느끼는 것을 그리는 것, 시각으로 보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리는 것으로 동화 같은 것, 추상화 같은 것, 사실화 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소재적인 시각에서 말하는 것으로 그림의 본질상으로 미에 대한 표현이어서 작가들은 어떤 그림들을 그려야 하는가에 고민하고 반드시 숙지해야만 한다.

회화는 위대한 사업

톨스토이(Tolstoy)는 “회화는 쾌락이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화는 위대한 사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회화는 삶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통적 정감을 전달하기에 의무와 책임도 따른다. 따라서 작가는 마땅히 인류의 우애적 정신을 전달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현실의 반영으로써 미적작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회화로서 인류문명 공영에 받아들여지고 칭송받을 수 있다.

회화는 인류의 공통적인 보통감정을 기초로 해야 한다. 이를테면 전설, 신화, 고사, 민요 등과 같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감동을 주고받는 작품이라야 한다.

순수회화는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알기 쉬운 것으로 어렵고 난해한 그림은 쉽게 이해되는 회화만 못하다.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Lukacs)는 “예술은 사회적, 역사적 현상계들을 짚어내는 것이고 이러한 예술적 현상이 예술이 갖는 자율성과 미적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루카치의 미학이론은 이미 마르크스를 통해 보았던 예술이론의 특징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유물론의 미학과 관념론의 미학이 변증법으로 미학 이론을 삶의 흐름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삶은 거대한 강이고 거대한 흐름 속에 고차작인 질서를 갖는 미를 반영하는 반영형식들이 나눠져 있다.

이때 예술은 이들 형식(미적회화) 중 하나이며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획득하고 다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상의 흐르는 삶이라는 거대한 강에 합류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과장들에서 삶과 예술은 사회적,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해진다고 말한다.

미학과 철학과의 관계

예술가와 철학자는 상호 다른 면에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본다. 즉 예술가는 감성적 지각에 나타난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철학자는 사물의 원리와 진리를 파헤치려는데 관심이 모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화가의 눈에 비친 자연의 대상물들은 빛과 색의 조화로 나타내 보여야 하는 아름다운 대상들이지만 철학자에게는 법칙과 원리를 분석해야 하는 대상물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러한 표상적인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철학자는 서로 상관적인 측면들이 많다.

에드만(I. Edman)의 말처럼 “만일 예술가가 단순히 천부의 재질로써 노름삼아 하는 장인(匠人)이 아니라면 예술가는 주제를 선택하고 소재를 선정하고 전체적인 의미를 추구함에서 그는 인생과 존재의 해설자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직접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방법에 있어서 한 철학자가 된다”라고 말한 것은 미학은 철학의 일부인 것이라 보이는 부분이다.

미학은 철학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를 인식하는 독특한 학문이다. 미학은 미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고 미적인 방식으로 이를 표현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미의 존재와 그 인식은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의 일부가 맞닿게 된다.

미학과 예술이 인식하는 세계는 무엇보다도 생활세계이고 그 경험은 삶의 경험이다. 이른바 인간의 현존 방식에서 삶의 세계를 묻고 인식하고 체험하는 철학적 물음이고 이 물음 속에는 관계되는 많은 개념들이 숨어있다.

예를 들면 미적 가치, 미의 존재, 미의 대상, 미학과 사회와의 관계 등 철학적인 물음에서 중심개념이 그 중요성의 문제들을 묻고 있다.

그러나 미의 인식은 자신의 감성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이 점이 미학의 독특한 성질이기도 하다. 이 감성적 경험이라는 기반이 시대에 따라서는 미학이 갖는 단점이 되기도 하고 철학의 다른 분야보다 자유로운 학문이 되기도 한다.

미학과 예술학의 함수(函數)

미학은 미적인 현상들, 아름다운 것들, 등을 탐구대상으로 한다. 미학의 이러한 특성으로 미학은 예술학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미(美)의 기원은 그리스의 신, 즉 예술의 신(神) 뮤즈(Muse)에서 기원한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그것을 심미적으로 느끼는 모든 것은 인간을 닮은 예술의 신 뮤즈에서 나오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미의 기원적 설명은 미는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예술의 신인 뮤즈에서 기원하는 것이라면 미는 신의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고 신성한 것 혹은 신성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예술의 기원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려는 학자들은 그 이유를 미의 기원부터 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철학이 시작되고 세계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과 존재에 관한 합리적인 논리로 학문을 시도하려는 철학자들은 미의 문제들을 철학적인 영역 안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예를 든다면 피타고라스의 경우는 아름다움은 수(數)적인 조화로 규정하고 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미는 다양하게 존재하면서도 보편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선(善)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예술학은 예술에 관한 연구를 하는 종교를 떠난 특수한 학문으로 문학, 미술, 음악, 연극, 건축, 무용, 등등의 많은 분야가 있고 이러한 예술을 다루는 학문이 별개의 예술학이다.

그런데 예술학의 내용은 예술학의 이론들이고 예술에 관한 이론은 예술장르에 관한 이론들이다. 그러나 학문적인 이론으로서 예술이론은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것, 즉 예술법칙, 예술관, 예술작품의 과정에 관한 이론이다.

예술에 관한 이론 중에서 인간의 예술 활동의 과정이나 방법에 관한 이론은 철학의 영역에서 묻지 않아도 해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법칙이나 예술의 가치로 탐구하면 철학이 묻는 문제들과 상당수가 일치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 문제에 대한 탐구는 미학의 과제인 셈이다. 미학은 인간의 예술 활동의 전 영역에 해당되는 보편적인 법칙을 연구하고 탐색한다. 이러한 관계성이 한편으로 미학과 예술학을 구분하는 차이점이 분명해지기도 한다.

미학의 과제가 이러한 보편적인 법칙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미학은 예술학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유회(遊戱)의 본능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시인 라스커 쉴러(Lasker schuler)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유희충동(遊戱衝動)의 기저에는 예술이 기원한다”고 내다본다.

여기에는 삶이 함께 있는 형태, 생명이 있는 무한의 연속성이 존재하며 삶의 형태, 생명의 형태를 갖추는 이것을 이상으로 삼으려는 충동이 예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쉴러의 인용문에 따르면 유희는 그것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거나 지향하는 활동이 아니며 유희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걸작이나 예술작품을 창작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희가 반복되고 그것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예술을 통해 표현되는 것으로 사실의 묘사에서 상징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표현하게 되며 그것이 보다 완숙한 형태가 되고 작품으로 환원돼 탄생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고통은 장애물을 뛰어넘는 비약의 원리일 때만 힘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고뇌의 산물이 예술의 원리가 된다고 이해된다. 그러니까 예술은 고통스러운 불화를 달래가면서 그 자체로 평화로워지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그것은 보존본능의 가장 완벽한 형식이며 생명을 향한 본성을 위한 자발적인 연마를 지속해나가는 것으로 존재를 향한 성향에서 또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빗나가는 말이 아니며 그것이 하나의 유회이고 예술작품이 된다고 풀이해도 해답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새가 노래를 지저귀는 것은 바로 욕망에 앞선 외침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유회에서 존재적인 여가와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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