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일그러진 일상, ‘언택트(Untact) 블랙홀’
[컬럼] 일그러진 일상, ‘언택트(Untact) 블랙홀’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0.04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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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나가는 길목의 단상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낙엽이 단풍으로 물들어 조락(凋落)이 깊어가는 계절, 휴일을 조용히 보내면서 읽던 책장을 덮고 잠시 베란다에 서서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차디찬 바람은 고층 아파트빌딩의 어깨를 부비며 가슴속을 파고 들어와 옷깃을 여미면 인용부호(認容符號) 같이 여기저기서 명멸(明滅)하는 불빛들의 순례가 시작되는 창문너머엔 바깥풍경들도 현상들을 아는지 가라앉은 듯 침묵해 있다.

도회지의 가을밤이 속살을 내보이는 빈사(瀕死)의 회색빛 그림자는 온정을 잃어버린 채 각자의 오래된 유리관에 박제(剝製)된 모습처럼 메마른 고독의 살풍경(殺風景)을 드리우고 있어 마음속 깊이 지난 추억들만 그립게 할 뿐이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고 인생은 덧없는 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시간이 지나 세월이 흐르면 사물도 변하고, 강산도 변하고, 인간도 늙어 가고 변해 모든 생명체들은 생로병사의 박약(薄弱)한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다.

이는 자연의 법칙이고 역행할 수 없는 숙명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게 마땅히 받아들여 순응하는 것이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도리였고 그래야만 옳은 문명인으로서 오히려 이치를 넘어 태연스러워지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과거의 변화와 판이하게 먼 이질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고 있어 부자연스럽고, 껄끄럽고, 불안전해 온전하게 변해가던 변화들을 가급적 멀리 밀어내며 먼 발취를 두고 바라봐야 하는 비극적(悲劇的)인 방식으로 삶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다.

각자는 각자끼리 본인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조금씩만 훔쳐 빌려 쓰며 뒤돌아선 허드레 한 삶처럼 피안(彼岸)의 뜰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방인마냥 낮 선 풍경 속으로 점점 전이돼 가고 있는 듯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듯 등을 떠밀며 다원에서 개인으로 방향을 전회(轉回)한 유랑처럼 구천에 떠있는 신세로 전략해 업장을 소멸하지 못한 지독한 고독도 무릎서야 하는 곤경에 빠진 꼴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서로 온정도 없이 껴안지 못하고, 무등도 하지 못하게 접속을 방해하는 언택트(Untact)라는 부정적인 관계가 상호를 갈라지게 해서 텅 비어 쓸쓸한 헛간 속에 메인 짐승마냥 홀로 지내야 하는 신세로 돌변하게 됐다.

이는 현재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형식으로 유연근무제를 확대하는 재택근무, 자율출근, 시간제 근무, 격일근무 등 비대면을 기저(基底)에 놓고 엉뚱하고 생소한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현상계 중 하나로 당연시됐다.

처음부터 인연이 없던 ‘컨택터(Contacter)’와 부정을 의미하는 언어 ‘언(Un)’과 만나 합성된 것으로 접속하지 말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비대면(非對面)으로 살아가야 하는 불안한 현실이 오늘날의 실정이다.

더욱이 코로나가 삶의 방식을 바꿔놓은 새로운 일상들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AI와 로봇이 만들어 내는 알고리즘의 형태와 공식에 맞춰 인간을 대신한다는 것도 감지해 인간의 소외를 독촉하며 진행돼 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 앞으로 어떤 온기와 감성으로 어떻게, 무슨 미래를, 무엇을, 재검토하고 강화해야 하는지도 사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왜?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어 회한이 앞서는 것은 상당수일 거라는 생각이다.

더욱이 청소년들과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심각한 상황들이 처해진다는 문제를 제기해 놓고 보면 씁쓸하다 못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이를 우려하는 이들은 격양된 한숨만 토해놓는 가정집에서조차 가족들 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접촉을 최소화해야 한다니 살가운 손자들이 재롱을 떠는 눈망울조차 멀리 화상으로 대신하고 있어 이게 무슨 실정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발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변화에 대응해야만 하는 언택트 라는 불편한 시대를 누가, 현대문명을 들추기며 ‘참 잘돼 간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 결국 인간성만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 분명해 그저 암담할 뿐이고 이렇다 할 무슨 뾰죽한 대책도 없으니 현기증만 현란해 어지럽다.

기실 문명의 발달은 이기적인 황금주의(黃金主義)만 낳았을 뿐 인간만이 소유할 수 있는 추억과 그리움, 향수, 사랑, 예절, 도덕, 윤리를 망각한 부재된 인간의 비참함만 점철돼 탈인간의 부덕한 소치(小癡)만을 양산해놓고 말았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갖는 기본적인 본성의 아름다운 감성마저 저버려 오히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작금(昨今) 목도하며 현실 속에서 피부로 느끼고 체험하고 있는 중이어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이런 이유가 되는 근원의 대표적인 것이 지구온난화현상에서 빚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던 것이 자연환경문제로 이를 빼놓고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게 된 것에서 시발(始發)이 된다고 보는 것이 압도적이다.

계절변화와 함께 자연엔 먹이사슬이 끊겨서 멧돼지들이 민가뿐 아니라 도회지에 나타나 활개를 치고 있고 농작법이 바뀌어서 우리나라에서도 열대과일이 재배돼 소득을 올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지구온난화가 가져온 변화된 일사들은 과거를 송두리 채 바꿔놓아 뒤바뀐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사회적 모든 시스템들이 한 바퀴 회전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2009년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회의 제15차에서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에서 열린 참가국 193개국은 1990년대 초에 협약한 도쿄의정서를 2020년까지 연기할 것을 촉구하는 협약을 가졌었다.

선진국들은 최대한 온실가스 배출국에 대해 이를 감축하고 이를 의무화를 골자로 기후변화협약을 맺었었던 것도 여타 나라에서 여러 번 개최했으며 이에 대한 절감비용을 놓고 지금도 선진국과 개도국간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

따라서 각국은 지구환경의 위험을 최고의 현안과제로 삼고 위급한 지구환경의 문제들이 당면한 위기로 앞으로 다가올 징후들에 대한 방안들을 논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중, 미, 러, 인, 일 등과 함께 부끄럽게 매연을 내뿜는 배출국 세계 7위에 처해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런 온난화 현상은 가속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돼 지구촌 도처에 수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재해를 낳고 있는 중이며 예상치 못할 앞날을 불온하게 하고 있어 인간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든다.

금년 초부터는 인간에게 덮친 재앙, 코비드(Covid, corona virus disrase)라 불리는 코로나19 감염바이러스가 세상 지구촌을 습격하면서

그야말로 전 세계가 엄청난 변화의 블랙홀에 빠져 이를 피할 겨를도 없이 흠뻑 겪게 하고 있다.

결과는 불편한 마스크는 기본으로 반가워도 악수는 물론 2m라는 간격을 두고 떨어져서 표정도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있으며 가는 어느 곳마다 체온을 체크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야 하는 웃을 수도, 울을 수도 못하는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어 오래갈 듯하며 현재 무기한 진행형이다.

식당에서조차 멀리 떨어져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얼굴을 가려야 하는 방편으로 내가 불편해도 타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코와 입을 막아야 하니 맘 편케 밥 한 그릇 먹지 못하는 촌극도 연이어 빚어진다.

보고 싶은 벗들과 모임 혹은 중요한 회의나 만남도 물 건너간 일이고 자칫하면 병원응급실에 몰리게 해 부족한 병실을 탓하게 되고 검진결과로는 격리와 함께 치료를 받아야 안심이 된다고 모임을 포기한 이들은 전화기에 대고 역설한다.

이를 방침하면 혼자 격리돼 한 달가량 외출을 통제받으며 아니하면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되는 등 예전엔 들어보지도 못했던 신조어를 만들어 쏟아내며 비대면으로 일상을 얼굴에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지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 또한 답답하다.

문제는 이를 대처할 백신이 나왔다고는 하나 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확산될 가능성과 다른 바이러스를 부른다는 전문가들의 잇따른 보고가 이어지고 있어 위험한 상황들은 상당기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점이 심리적으로 가중(加重)돼 압박한다.

실제로 최근 며칠 전 미국 텍사스주에서 사람의 뇌를 파먹는 신종미생물 ‘아메바(braineating am oeba)’가 충격적으로 수돗물에서 발견돼 6살 난 소년이 치료 중에 숨지면서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단순 코로나19 인줄만 알고 병원으로 실려가 검진을 받은 결과 네글레리아 파울러(naegleria fowler)가 검출됐다고 한다. 이 소년은 야구를 좋아하는 6살 된 건강한 소년으로 결국 치료도중 병세가 악화돼 증세가 나타난 지 5일 만에 숨지고 말았다.

인구가 고작 2만70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텍사스 레이크 젝슨(Texas Lake jackson)시에서는 긴급히 상수원과 수도원을 검사한 결과 8개 곳 중 3개 곳에서 양성으로 나타나 나머지 지역에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이어 텍사스 주는 수돗물 사용 금지령을 내리는가 하면 수돗물을 끓여 먹을 것을 당부하고 주의를 요구하고 있으나 주민들의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기후 온난화 현상으로 지구가 뜨거워지면서 수면의 과열로 따뜻해지는 물에서 원인이 되고 있으며 주로 민물이나 토양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 생물은 연못, 호수, 하천 등의 25℃ 이상의 따뜻한 물에서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영을 하거나 물을 잘못 마셨을 때 점막을 통해 뇌 척수염으로 침투해 발발, 아메바성 수막뇌염을 일으키며 한번 감염되면 치사율이 98.5%에 달하는 등 현재까지 이를 퇴치할 완전한 치료법이 없다고 알려지고 있다.

미국과 스페인 등 몇몇 선진국에서 이 같은 사태들이 빚어지고 있어 우리나라 당국 또한 철저한 관리에 만전을 기울여 사전대책만이 최우선이라는 비상한 각오로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때다.

지금 우리는 많은 곳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신의 시한폭탄과도 같은 뇌관의 문제 덩어리들을 껴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도 불투명하게 빨간불이 들어온 불안하고 초조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중이다.

반칙과 불법, 특권과 불순, 만행과 해이, 고소고발과 특혜 등 오만함만이 극치에 판을 치고 있어 정도의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듯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불순한 세력들이 득세하는 등 그야말로 경천진동(驚天振動) 할 노릇으로 이마저 나라를 망가트리고 있다.

국민을 대신해야 할 정치권은 성역화한 자신들을 네 탓으로 제각기 따로 가며 싸움박질하고 있고, 경제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지경으로 추락해 시장의 가게들은 물론 식당마다 모두 문을 걸어 잠그게 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덮친 사회는 온통 불신만이 만연해 도무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로 뒤돌아 간다.

정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 목청을 높여보지만 이마저도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막무가내로 아예 국민은 주권마저 포기하고 있는 듯 ‘이게 나라냐’, ‘이 나라가 네 꺼냐’라는 플랜카드의 문구 속엔 속 터지는 국민의 들끓는 마음이 표출되듯 분노와 더불어 ‘이게 삶이냐’ 라고 되묻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명언 중에 “누군가의 실력을 알아보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맡겨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늘 명심해라 성공하겠다는 너 자신의 결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금석이었다.

국민은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있다. 모두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그 끝은 도대체 무엇인지 인간근원의 의식 있는 존재론적 가치에 설명을 묻듯 아무리 곱씹어 봐도 명쾌한 설명과 해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양 손발이 묶인 채 침묵의 늪으로 빠져드는 우리는 누구인지 자문이 앞서지만 이 또한 허공에 대고 기침하는 듯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생명만 연소시키는 시간소비에 불과한 절망적인 허망(虛妄)만 가득해 다소나마 희망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제 곧 앙상한 가지에서 떨어지는 가로수 낙엽들이 메마른 도시 포도(鋪道) 위로 마지막 가지에 붙어있는 잎 새 한 잎까지도 생명을 다한 채 한 잎, 두 잎 쓸쓸한 발길에 채이며 바닥에 뒹구는 낙엽을 볼 것이다.

그리고 잎을 다 털어버린 나목(裸木)에서 을씨년스런 계절의 무상(無常)함을 실감할 때 조용한 새벽녘 산골어귀에 발걸음을 멈추고 인생을 쓰다듬던 한 권의 시집을 읽노라면 끝없이 가슴에 젖어오는 전율은 그 온전함만 간직하고 싶을 마음이 간절해질 터이다.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그 무한의 존속(存續)은 어쩌면 너와 나의 인생에 대한 비애와 멀리 가 있어야 하는 고독일 수도 있고 그 모든 고뇌(苦惱)를 초월한 내면을 향하는 길은 지평선을 넓히는 숙연 같은 묵언(黙言) 일수도 있다.

가을이 이렇게 지나는 길목에서 계절의 난간에 가슴 오스스하게 다가오는 멜랑꼴리한 감정, 그 자체로써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충만하며 모두는 힘들고 어렵지만 각자의 길을 뚜벅뚜벅 전진해 가는 것만이 요원(遼遠)해 차후 우리 모두는 그 끝의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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