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평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1.22 2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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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인간’을 생각한다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행위예술가] 고함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하고 이맛전 흐르는 땀방울을 훔치며 한숨을 토해놓는 어느 늙은 일용잡부의 푸념 섞인 한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사체 위 초겨울의 따듯한 햇살이 쏟아져 내릴 때 다급했을 작은 새의 아주 짧았던 순간이 우리를 슬프게 게 하고 시골구석 한 모퉁이 사람이 떠난 폐허에 쓰러져간 대문 옆에 붙은 어느 호주(戶主)의 문패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생명을 다한 나뭇잎이 길바닥에 뒹굴고 처량히 겨울비라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흐릿한 어느 날 거리두기와 비대면 세상 속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은 그리운 사람들마저 인적이 끊긴 허망스런 일상이 반복되는 오늘이 우리를 또 슬프게 한다.

고립된 듯 거의 몇 주일씩이나 혼자서 고민하며 바라보고 있는 옛 궁정 낡은 벽은 국민의 함성이 드높은 사이사이에 녹이 슬고 철문은 떨어질 듯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국에 그 아래 벼슬아치들마저 막말이 난무하는 문설주의 삯은 기둥에 붙어 판독하기 어려운 ‘청와대’란 문자를 볼 때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돈만이 위세(威勢)를 떨치며 세상과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냥 빈 쭉정이들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호들갑을 떠는 난세(亂世)에 인간의 가치마저 짓밟혀 지성과 양심 있는 선인들의 발길과 말길이 사라진다.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발 콜롬부스(Cristobal Columbus) 같은 인물은 보일 기색이 없고 동화 속에 나올법한 신세계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어서 달나라를 간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 그것은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만다.

독일의 낭만파 서정시인이었던 ‘아이헨드로프(Eichendorff)’는 ‘예감과 현재(Ahmung und Grgenwart)’라는 장편소설에서 “정치상황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는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관료적인 관행보다 정신적인 치료가 시급하다”고 꼬집는다.

전 미국의 부통령이자 기후변화프로젝트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앨 고어(Albert Arnold Al Gore)’는 오래전부터 “전 세계에 직면한 지구환경의 위급한 메시지를 알리는 경종이 점점 크게 울려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어 노벨상의 위상을 진즉에 귀 기울였어야 했다는 판단이 지배적으로 압도한다.

그래서 몇 해고 또 몇 해고 지난 후에 소수의 선각자(先覺者)들은 문득 돌아가는 오늘의 현상들을 기록한 일기장을 발견할 때 그곳엔 아마도 이렇게 씌었으리라.

“내가 아니, 모든 인류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미래를 그리며 다정스런 웃음으로 행복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간은 잠시 우리를 기쁘게 했을 뿐, 모두의 소행(溯行)이 아름다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게 하고 불야성을 이루는 고층 빌딩들과 기계문명은 자연에게 얼마나 불편하게 했는지 우울한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었다”라고….

그때 돌이켜 대체 인간들이 자행한 무지한 파괴는 결국 무엇을 가져오게 했고 무슨 이득을 얻었으며 결과는 무슨 꼴로 참혹해 졌는지 뒤늦은 후회에 앞서 돌아오는 불길한 징후(徵候)와 예감은 아찔하고 끔찍하다는 것밖에 얻는 해답이 없을 듯해 우리를 다시 슬프게 한다.

차라리 허상(虛想)이라면 다행이라 하겠고, 다음이라면 약속이라도 하겠으나 모두는 치희(稚戱)에 빠져 있다가 시나브로 아수라가 요동치는 이 마당에 이제는 그 많은 죄상(罪狀)을 저지른 지난 후에 남아있을 아름다운 기억은 지구촌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앞서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아마 그때 살아있는 생명체들은 인간이 던진 불덩이와 농도가 짙어 호흡하기 힘든 먹구름 같은 매연에 신음하던 불안과 공포와 초조한 근심들이 슬픔의 고통으로 이어져 그 많던 생명체가 죽음의 경계인 암흑의 늪 주변을 맴돌다 하나하나 생명의 끈을 놓고 지금도 늪 속으로 빠져가고 있는 중이라 해도 허튼 과장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그 생명체들의 빛나던 눈에서 흘리는 뜨겁던 분노 섞인 눈물과 괴롭게 울부짖는 절규들은 그들만의 세상에 펼쳐지던 아름다운 낙원이 요원(遙遠)할 거라고 믿었겠지만 폐허(廢墟)처럼 무너지는 지구의 한편에서 미칠 듯 불안한 호흡을 들이마시며 인간들에게 던지는 경고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발전과 개발을 앞세운 농업사회에서 ‘건설’을 외치고 최첨단을 표방한 산업사회에선 ‘혁명’을 부르짖기까지 또, 개도국에서 선진국까지 OECD국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생명체를 담보로 지구를 파괴하고 모든 종(種)들을 멸(滅)하게 해서 각종 질병들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태를 부르는 것이 그렇게 촉박했는지 지금 자연은 인간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며 진화하는 두개골을 가진 배부른 돼지도 아니고 먹이를 달라고 꼬리를 치는 개(犬)도 아닌 생각하는 존재여서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방법으로 합리적인 이치와 논리적인 수단을 찾는 건 틀림없다.

따라서 합리와 논리를 탓하는 것이 아니나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미개인들이나 후진국형 인간들이 더 행복하다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전 세계가 빨리빨리만 쫒아간 나머지 공존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뒷전으로 내몰아 둔 게 오늘을 낳고 말았다는 이유에서 굳이 문제를 따진다면 상선약수(上善若水)가 정답이 아니겠는가 하는 뜻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살던 향리에선 냇가에서 친구들과 물고기랑 우렁이랑 물방개를 잡으며 해지는 줄 모르고 헤엄을 치다가 원두막 밭에 숨어들어 수박과 참외를 서리해서 나눠 먹고 대보름날 지불놀이하며 깡통을 돌리던 그때가 얼마나 삼삼한지 그립다 못해 뒤돌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빨래터에서 이웃집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아버지는 지게에 땔감을 지고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어머니는 밥을 지어 푸성귀와 된장찌개로 허기를 채워가며 손수 힘든 노동일로 사계(四季)를 지냈던 일들이 낡은 흙 담장에 사금파리로 낙서한 철수와 영자같이 그대로 빛바래 있다.

특히 봄 가을로 이어지는 농번기엔 품앗이와 두레로 서로가 일손을 거들며 전답을 일구고 애경사엔 서로를 위로하며 기뻐하다가 한 방안에서 7~8명씩 자식들을 껴안고 긴 겨울밤을 지새우고 문을 열면 초가지붕마다 나무들마다 온통 소담스레 쌓여있는 눈을 보면 강아지가 먼저 발길을 남기곤 했었다.

오일장(五日場)이라도 열리는 날이면 군이나 읍, 면 소재지까지 한나절을 걸어서 장을 보고와 생선과 고기를 어렵게 장만해 웃어른들을 공경하며 모셨고 싸리 울타리 너머 떡 접시라도 나눠 먹으면서 우리 민속 설 명절과 추석 한가위를 맞으면 조상들을 찾아뵙는 선선했던 시절을 보고 자란 것이 불과 몇십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애매한 발전과 발달을 혼용해가며 빠른 시대를 쫒아가는 첨단(尖端)이라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허기진 시절을 까맣게 잊고 먹을 것이 남아돌아 다이어트다 식이요법이다하는 판이지만 그때의 배고픔과 가난 말고 무엇이 행복을 주었는지 배부르고 등 따듯하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던 때가 엊그제이다.

그래서 인간들이 최소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양식과 상식을 지켜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윤리이고 도덕이건만 그마저도 무너진 작금은 1.5볼트 건전지 하나로도 세상살이가 가능해져 안방에 홀로 앉아 모든 일을 해결하고 있는 실상이 됐다.

손끝 하나로도 온 세상을 한눈에 내다보며 마스크 비대면 직전인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명절 연휴나 긴 공휴일이 되면 조상님과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찾기는커녕 도시를 벗어나 산 좋고, 물 좋은 펜션을 찾아다니고도 모자라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이들로 공항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황금주의와 만능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초한 것들로 문명은 나아졌으나 인간성 상실에서 오는 탈 인간으로 인간성 부재와 타락한 사회, 삭막한 도시 그리고 지구환경파괴와 질병 창궐로 이어지는 것 이외 무엇이 우리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 곰곰이 따져 봐도 해답은 찾을 수 없으니 걱정이다.

이렇다 보니 인간이 갖춰야 할 것들은 모조리 망각하고 져버려서 배우지 말아야 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보란 듯이 자행되고 있어 차마 어떻게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요지경들이 난무하는 태세 속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 오늘날의 현상들이어서 큰 문제라고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시절 머 언 흙길과 산길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 어렵고 힘들었던 때가 왜? 사람들마다 가슴 가득 그때를 그립게 하고 향수에 젖어 못 잊게 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독일의 낭만파 천재시인 ‘F.휠더린(Fridrich hoderlin)’은 지난 과거부터 “사람들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라고 일찍부터 이 위대한 명언(名言)을 강조하며 경고하고 있었다.

사람은 죽음이라는 것보다 병들어 고통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이 더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라서 미래를 강조하던 의식 있는 이들의 말을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라고 조롱하던 사람들의 비아냥스럽던 말투는 빠르게 회전하는 시계바늘을 보며 이제 무어라 말하는지 묻고 싶다.

오갈 곳 없는 환경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시인 ‘노천명’의 시(詩)에서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라고 읊었던 것은 고귀함을 강조한 시구 중 하나였다.

이상향(理想鄕)을 노래한 ‘노천명’ 시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관(冠)은 높은 벼슬을 뜻하고 있지만 파괴돼 가는 지구환경 앞에서 죽어가는 눈물어린 눈초리는 인간들이 누리는 최상의 관(冠)이라도 질서가 파괴된 마당에 사슴은 누구를 증오하고 무엇을 바라보며 눈을 감을지 머릿속에 이런 형상을 떠올리면 혼란스럽기만 하다.

아일랜드의 재스민 향기가 날리던 푸른 초목에 양떼를 몰던 데니보이(Danny boy)의 목가적인 목동의 평범하고 평화스러운 일상, 멀리 요돌송이 들릴 것만 같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컬러처럼 선명하다.

자동차의 경고음이 울리지 않는 프랑스의 개선문 앞 샹드리 거리를 가득 메운 남녀 관광객들의 자유로운 발길과 세느강의 유람선에서 커피를 마시고 공연을 즐기며 키스하는 남녀들의 불타는 청춘, 에펠탑 아래 잔디광장에서 웃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서산에 해질녘 초가지붕에서 하얀 연기를 날리며 된장찌개를 끓이던 어머니의 품속 같았던 구수한 서경과 썰매를 즐기다 옷과 양말을 불에 태워 먹었던 추억들, 아-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풍요롭고 푸근하게 했는지 당시로 뒤돌아 가고 싶은 마음이 요동(搖動)을 한다.

지구축이 기울어져 시간이 빨리 스쳐지나가는 세월을 두고 야단을 떨며 100세 시대라고 자처하는 인간 군상들의 뒷모습에서 ‘밝은 미래의 희망’ 글쎄, 그것은 미문(未聞)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 시원치 않다.

허나 분명한 것은 웃음을 잃고 어두워지는 얼굴표정들 마다 비춰지는 암울하고 근심어린 모습들은 오감(五感)을 지나 육감(肉感)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적 이데아로 예전에 체험하지 못한 징후들이 엄습해오는 불길함을 인지하기 때문에 불온한 인류 미래에 대한 의문을 갖으면서부터라고 판단돼 진다.

자, 여기 개(犬)가 있다. 처음엔 그냥 말 그대로 집을 지키는 개(犬)에 불과했다. 물론 그 중엔 들개도 있고 떠도는 개도 있었지만 그러나 언젠가부터 애완견에서 반려동물로 지금은 사람보다 대우를 받는 동거인(同居人)쯤으로 여겨 길가에서나 차안에서나 집에서나 끌어안고 다니는 사람들은 흔히 보는 일상이 된지 벌써 오래됐다.

얼마 전에 필자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목격담이다. 사거리 건널목 신호등 앞에서 몇몇이 녹색신호를 기다리다 녹색신호가 바뀌어 서둘러 길을 건너고 있었다.

개를 가슴에 품은 어느 중년여자가 너댓살 쯤 보이는 아장아장한 걷는 어린아이는 걸려서 뒤따라오게 하고 먼저 건너간 여자는 깜빡이는 신호등 앞에서 빨리 오라며 고함을 지르고 재촉하자 어린아이는 어미로 보이는 여자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쫒아가 한마디 하고 싶은 충동과 감정을 달랬었다.

우리에게 자주 회자되는 말로 공자의 말씀 중에 ‘양약고어구이어병(良藥苦於口耳於病)’ ‘충언역어이이이어병(忠言逆唹耳而利於病)’이란 말이 있다.

즉 ‘좋은 약은 입에 쓰나 병(病)에 이롭고, 좋은 말을 귀에 거슬리나 행(行)하는데 이롭다’는 뜻으로 익히 잘 알고 있는 교훈이지만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또 우리 속담에 ‘개(犬)만도 못한 인간’을 빗대어 쓰이는 말로 하찮은 것을 비유할 때 쓰이는 허접하고 천박한 작태쯤으로 ‘개만도 못하다’라는 비웃음으로 일컫는 말(言)이 있다.

아이가 개만도 못한 것인지 개만도 못한 본인이 개를 자처한 처세인지 길을 건너던 여러 명은 그때 그 광경을 보았을 것이고 얼마 전엔 자기 자식을 개 값도 못되는 단돈 20만원에 거래하려 했던 철없는 어미의 행각을 뉴스를 통해 보았으리라.

최근 아동학대가 날로 심해지며 교묘해지기까지 수위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목숨을 버리는 치사율까지 증폭돼 자기 새끼를 어떤 매정한 심성을 가졌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하긴 사람보다 개가 대우를 받는 세상이니 오죽하겠는가? 개를 부를 때도 00아 엄마한테와, 아빠한테와, 정말 인간이 동물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고 따지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게 됐다.

특히 반려인구 1000만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는 만큼 AI조류독감이니 아프리카돼지 열병이니 하는 질병들이 난무해 동물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보다 먼저 살피고 우선 챙기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부에선 고령화와 인구절벽으로 아이들까지 낳지 않아 돈을 줘가며 아이를 낳으라고 권장하는데도 아이는 낳지 않고 그 많은 반려인들이 개새끼들을 낳았다는 건지, 아무리 개가 좋아도 또 본인들 마음이라 해도 엄마 아빠라는 고귀한 호칭을 개에게 붙여 사용하니 이게 말이 되겠냐는 것이다.

품종개량을 통해 거듭 다양한 종류를 생산해 내고 있어 작고 귀여운 종들을 만들어 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물은 짐승일 뿐이고 짐승들은 도저히 인간이 될 수도 없으며 돼서도 안 된다는 면에서 빨리 생각해 보더라도 엄마 아빠는 가당치도 않는 노릇으로 그건 아니다 싶다.

그래서 소중한 인간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지는 연유가 동물보다도 인간의 생명을 아주 하찮은 개만도 못한 존재쯤으로 여긴다는 데에서 되묻고 싶다. 정말 개새끼가 당신 자식이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정도가 이쯤으로 참으로 세상이 이것저것, 여기저기 전부가 어찌 돌아가는지, 도대체 어쩌려는 건지, 물론 예감은 충분하게 반증되고도 남아 수긍돼 지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동물이 생각나 빗대본다면 오리너구리라는 동물이 있다.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닌 것,(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것) 다만 반 유생으로 물과 땅에서 살아간다는 공통된 것 외엔 둘 다 아니다. 궁금해서 자세히 검색해 봤다. 변이종류로 포유류로 분리되지만 조류와 파충류의 양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기이한 동물 중 하나로 표시돼 있다.

그런데 포유류이지만 새끼를 낳는 것이 아니라 파충류처럼 알을 낳아 번식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알은 하나에서 셋까지 낳으며 부화하면 어미의 젖을 빨고 자란다니 우리가 알고 있는 의외로 정말 변이종류가 틀림없어 보인다.

먹이는 갑각류와 연체동물, 올챙이, 지렁이 등을 다 자란 자기 몸무게인 2kg만큼 매일 먹어치우며 무섭게도 뒷다리에는 교미할 때만 용이하도록 넙적한 발밑에 뾰쪽한 발톱과 독침이 숨어있어 사람들에게 큰 아픔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닮아도 그 무엇들?과 너무 닮아서 수상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것을 인간들이 털을 얻으려 마구 죽여 동물보호협회에서 보호대상으로 지정하고 있으니 이 또한 변이종류라 그렇다.

이 지구상엔 변이종류가 참으로 많다. 그들이 주장하는 왈(曰) “어찌했든 나는 유토피아를 향해 꿈을 꾸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지구상에 남아 거룩한 삶을 이어가고 살아간다” 라고 우겨댈 터이다.

하지만 조만간 로봇을 옆에 두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기계를 친구로 삼으며 그것에 말을 건네받아야 하는 쓸쓸하고 감정 무딘 유배자로 전이(轉移)돼 마스크가 아니라 방독면을 착용한 변이종류처럼 미아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보호대상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어 오늘도 태양이 식기 전 이 지구상에 남아있는 모든 아름다운 생명체들은 온전하고도 마땅히 끝까지 본연의 역할을 다해야 하고 또 영원해야 한다.

불구하고 노을 속으로 저무는 해라도 붙잡고 싶은 어엿한 심성을 갖은 선인(善人)들마저 오래도록 당신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야 하는 것은 이해하나 입을 막아야 하는 입 덮개가 의무화되었다는 사실이 솔직히 불편하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변이종류들이 있는 한 해결책은 쉽지 않을 터 총체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이 난관들이 어디를 손짓하고 있는지 입에 가시가 돋칠 지경으로 하늘을 우러르면 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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