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중)
[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중)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2.02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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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남긴 천재 화가’ 이중섭
정직한 화공이 그려냈던 순수한 화풍… 그는 왜? 그림 외에 말(言)이 없었나.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상편에 이어) 원산의 곤비(困憊) 속 비난받던 그림들

이중섭이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들은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대상이 된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그물로 잡은 물고기들이나 날개를 너울거리는 나비, 가족 또는 여름 곤충들이나 소와 닭, 꽃게 등이 주류를 이룬다.

1946년 결혼한 둘은 단란한 한때를 보낸다. 순수했던 그는 그림의 소재에서도 보듯 천진난만한 주제들을 다뤘던 이중섭의 자유로운 천성은 공산주의 체제에서 환영을 받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이유는 해방이 되자 북한 천지가 공산화되고 무력화가 되는 마당에 이중섭의 그림처럼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예술은 이념과는 거리가 멀어 당장에 비판을 받는 대상자가 돼 그의 그림들은 기이하고 퇴폐적이라는 비난까지 받는다.

정도가 심해지자 이중섭은 실의에 빠져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처지가 되고 어쩌다 친구들이 찾아와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면 한숨만 토해 놓곤 했다.

더욱 심한 것은 북한에서 반동으로 몰린 시인, 작가, 화가 등 예술가들은 하나둘 원산을 떠났지만, 이중섭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말버릇처럼 ‘맥난다’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맥난다’라는 이 말은 그 지방 사투리로 ‘싫다’, ‘기분 나쁘다’, ‘답답하다’라고 할 때 쓰이는 말로 좋지 않은 의미가 내포돼 있던 방언이다.

이런 실의의 나날 속에서도 사랑의 결실인 세 아들을 얻는다. 결혼을 한1946년 첫째 아들의 탄생과 1947년 둘째 아들, 2년 후에는 셋째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디프테리아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되자 슬픈 실의에 빠진다.

그리고 3년 뒤 6·25가 터져 유엔군이 북진하자 그는 비로써 자유스러운 회화(繪畫)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됐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지만 그도 잠시뿐, 1·4후퇴로 유엔군이 남하하자 그는 그림을 위해 결심을 하고 다섯 살인 태현과 세 살인 태성을 데리고 처와 함께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내려오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원산의 생활보다 인생과 예술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시기를 맞아 그들을 방황에 처하고 시름에 해매이게 한다.

부산으로 피난길에 내려올 당시 그의 아내 이남덕은 영양실조에 걸려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태로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어 삶 적 고행의 길을 막심하게 만든다.

중섭은 부산 범일동 골짜기에 판잣집 단칸방을 구해 놓고 부둣가 노동일로 허기진 일상을 이어가던 중 선배의 주선으로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큰 특혜로 쌀과 부식이 제공됐기 때문에 그나마 잠시 허기는 모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상황적으로도 전쟁 중이어서 그조차 배급이 풍족하게 나올 리가 만무해서 이중섭과 이남덕 부부는 장래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고민에 빠진다.

이때 들리던 소식이 일본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남덕은 남편에게 “당신의 예술을 위해서라도 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본으로 건너가자”라고 제의를 하고 심각해지는 가정생활로 당장 먹고사는 문제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본에는 이남덕의 모친이 생존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면 이보다는 나아진 환경에서 굶주리는 생활고(生活苦)만은 모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이 제의를 단번에 거절하고 만다. 이유는 “돈 한 푼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따라가는 처세가 마땅하지도 않기 때문이고 더욱이 가장으로서뿐만 아니라 변질하지 못하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에 그러하다”고 말하며 더 이상의 애기를 거절한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든 생활을 간신이 버티며 이어가는 막다른 귀로에 처해있던 중 ‘부산보다는 제주도가 안전하고 살기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1951년에 제주로 향한다.

서귀포에 도착한 가난한 자식 딸린 부부에게 당시 ‘김순복’이라는 노모쯤으로 보이는 어른 한 분이 1.4평짜리 방 한칸을 내줘 가족들은 비바람은 피할 수 있으나 제주에서 또, 낮 설고 배고픈 생활은 변함이 없어 부산이나 제주 서귀포나 걱정과 시름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직업이 그림을 그리는 것뿐, 나라가 시끄러운 난리 통에 특별한 일거리나 대책도 없이 제주에 내려온 중섭의 가족생활은 시간이 흐르고 지날수록 아이들의 성장과 교육 등이 걱정되는 가운데 가정환경은 더욱 곤경에 빠져드는 나날들로 고통을 안겨주게 되자 고민에 빠진 중섭은 실의를 잊고자 술 마시는 날들이 잦아지게 된다.

이를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이남덕은 역시 나아지지 않는 생활고에 시달려 몇 달의 우여곡절 끝에 내린 결정으로 조그마한 가방 하나를 챙겨들고 눈물을 머금으며 1952년에 남편을 남겨둔 채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 될 줄은 생각도 못한 채 당장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지만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현실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된다.

제주에서 바라보는 슬픔과 이별

그때 약속했던 이중섭은 ‘전셋돈이라도 마련되면 일본으로 꼭 건너가겠노’라고 아내에게 다짐을 해뒀지만 그림만 아는 그에게는 돈을 벌 뾰족한 방법이 마땅치 않아 하는 수 없어 홀로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전람회를 열어 돈을 만들어 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당장에 먹고 살기도 힘든 전쟁 통에 전람회는 무리라고 생각하고 낙담했으나 일본으로 건너갈 계획은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던 각오 중 하나였다.

이런 그는 부둣가에 나가 일본 쪽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일본으로 건너갈 수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을 고민하며 한없이 흐르는 눈물과 울음을 삼키며 답답한 심정을 오랜시간 달래곤 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지금 완전히 지쳐있습니다. 살아갈 아무런 힘도 재주도 없어요. 피난 나와서 겪는 고생이야 이북사람들 누구나 다 겪는 고생이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겠고 일자리도 없으니 살아갈 방법이 걱정이지요”라고 한탄한다.

가족을 거느린 가장의 절규로 “그림이라든가 시(詩) 같은 것 이전에 우선 살고 싶어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일본에 가서 아내를 만나보고 싶고 아이들도 한 번 봤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참으로 눈물어리는 참회(懺悔)이고 속 타는 비통(悲痛)이 아닐 수 없어 그 한탄스런 심정을 갖은 그의 모습이 어떠했을지 잠잠히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 그의 방황하는 모습이 비춰 떠오르는 듯하다.

시대적 배경은 이렇게 의식 속에 머무르는 사랑마저 앗아가고, 보고 싶은 처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이별시키는 처지였으니 부산 범일동 일대 해일과 제주 서귀포의 파도는 얼마나 높았을 것이고, 통영 앞 바닷가에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이중섭의 애원 섞인 통한은 얼마나 사무쳤을까! 잠시 상념에 젖어보면 눈시울이 출렁해 진다.

속절없었을 세월, 바다 건너 일본에 있는 처와 두 아들인 태현과 태성.

이중섭은 그야말로 천진스럽게 태어난 태생적 맘으로 혹은 생긴 모습대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으로, 내성적이기까지 한 자신을 얼마나 원망하고 한탄스러워 했을까!

머나먼 타국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마저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됐을 허망, 하루 같이 여명이 떠오르는 새벽녘 잠 못 이루고 동트는 한줄기 빛이라도 바라보았을 인간 이중섭의 마음은 어느 쪽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을까!

이런 고통을 주는 민족상잔(民族相殘)으로 남북이 갈라진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지금도 사회 여러 구석구석에 도사려 극진하고 있는 좌우의 강성들에게 아주 오래된 손거울을 들려줘 그때를 비추게 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렇게 이별한 아내와의 해후를 갈망하는 이중섭은 그의 말처럼 살아갈 힘도 재주도 없었지만 그림만은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놀랍게도 그 참혹한 생활고와 괴로움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는 강인한 예술혼을 불태우며 많은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남기는 작업을 이어갔던 사유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추론하건데 부산의 범일동 판자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얹어 살면서 외로움을 달래가며 그림을 그렸을 터이고, 서귀포 부두에서 일력을 하던 때 짐을 부리고 난 틈틈이 자식생각들을 떠올리면서 아이들을 그렸고 통영의 앞바다를 바라보며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이 분명하다.

재주가 없다고 본인이 말을 하곤 있으나 그것은 재주를 뜻하는 게 아니라 내세우기 싫어하는 내적 용기를 은유로 빗댄 것으로 생각했었을 것이고 내성적인 심상의 하나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 정도를 의미하는 뜻으로 풀이돼나 역시 배운 것이 그림 외에 무엇으로 헛헛하고 곤비한 자신을 표현했을지는 안 봤어도 눈에 선하다.

일본서 가족을 상봉한 이중섭의 경외(敬畏)

이중섭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아내와 아들들을 만나기 위해 잠깐 일본에 건너간 일이 있다.

1953년 1월 어느 날 친구이자 시인(詩人)으로 활동하는 ‘구상’(具常)이 주선해준 선원 중 한 사람으로 이중섭이 일본에 간신히 건너가 아내와 두 아들을 2년간의 이별 후 첫 만남이 이뤄져 해후를 하지만 2주 만에 다시 헤어지고 귀국하는 비극이 빚어진다.

그 후 그것을 마지막으로 이중섭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다시한 번 만나보지 못하는 이변을 체험하는 한(恨)이 서린 채 세상을 등지고 떠나게 하는 첫 번째 원인이 발생하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어렵게 일본으로 건너가 그들을 만나게 해준 동기에는 중섭과 친구인 시인(詩人)으로 활동하던 ‘구상’(具常)과 특별한 이유가 있어 가능해졌다.

그러한 구상 시인과 이중섭은 한때 같은 유년시절을 함경도 원산에 살았고 구상도 일본에서 니혼대학 종교학을 전공하면서 공부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같은 예술가의 길을 걸으며 구상의 시집 표지화 등을 그려주는 등 가깝게 지내는 친구 사이었다.

아무튼 사유는 뒤로 하고 이렇게 짧은 해후를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크나큰 곡절의 궤도엔 생각도 하지 못한 비운(悲運)이 숨어있었다.

혹자들은 아마 정확히 모르는 이 사실을 두고 ‘천재적인 이중섭의 정신적 비극’이라 단순히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적 사연을 알고 나면 참으로 안타까운 필사(必死)가 숨어있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인물에 대한 사실들을 모르는 이가 혹여 있을 것 같아 굳이 밝힌다면 필자가 알고 있는 만큼 필해 공감하고자 하기 위해서다.

오래 머물려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남덕과 미래를 논의하러 간 이중섭이 2주 만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혼자된 중섭 주변에는 사실 J라는 사람이 친구로 위장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당시에 일본의 실상을 미리 알고 있어 밀항을 했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그런데 그 시절 일본에서는 일본인이 보증만 서주면 밀항자를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곧바로 석방해 주고 있었다.

이중섭의 부인이 일본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J는 이를 이용해 이중섭의 부인 이남덕을 이중섭과 매우 절친한 사이라며 보증인으로 내세운다. 남편의 친구라는 말만 듣고 보증을 서준 부인의 덕분에 J는 즉시 석방이 된다.

하물며 불구하고 넉살좋게 J는 이종섭과 이남덕 부부 모르게 나이가 든 모친에게 찾아가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다. 이남덕의 모친은 자신의 딸과 자식까지 낳은 사위라는 사람이 ‘당장 돈을 빌려 달라’고 하니 남에게 이자를 물으면서까지 당시 돈 50만엔을 빌려주게 된다.

그 덕택에 J는 고국에 두툼한 돈 봉투를 들고 돌아온 뒤 빌린 돈을 송금은커녕 이종섭에게 돈을 빌렸다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고 잠적을 감추고 난 뒤였다.

그러니 이중섭은 이 같은 사실을 알 리가 만무할 수밖에 없고 이중섭이 일본에 들어간 것도 바로 일이 터진 직후로 그 사람은 생각조차 않고 갔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으로 가족을 찾아간 일본에서 아내에게 사실을 전해들은 이중섭은 비로써 그때야 J라는 사람이 자기 장모를 속여 돈을 뜯어간 사실을 알게 됐고 이것을 안 이중섭은 일본에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는 입장이 되고 만다.

자신의 동포가 일본인 장모를 속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자기가 돈을 벌어서라도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얼굴을 들 수 없게 된 이중섭은 아내와 장모에게 “고국에 돌아가 50만엔을 벌어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말했지만 격양된 장모는 그를 한사코 만류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일본에서 그림을 그려 돈을 갚으면 되지 않겠냐”고 종용(慫慂)했지만 중섭은 “고생해가며 이자 내기도 어려울 나이든 장모 곁에선 염치가 없으니 그림이 도저히 그려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 뒤 서둘러 귀국길에 오른다.

배신과 좌절에 멍든 절망

장모한테 거짓으로 돈을 빌려간 J는 찾아오지도 않고 이중섭 또한 찾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선술집 목로판 의자에서도 그렸고, 집에 있을 때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아무 종이에다도 그렸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림을 그려댔다.

또 그도 아쉬우면 담배갑 은지(銀紙)에 그림을 그리는데 치중을 다했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 꼬챙이 따위로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을 다했다.

그뿐이었겠는가. 외로워도, 슬퍼도 그림을 그렸고, 술이 취해도, 깨어 있어도 그렸고, 바닷가에 처자를 둔 동쪽바다를 향해서도 그렸고 그의 발길이 닿은 부산, 제주,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지에 합동전시에 나가서도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을 것은 상상되고도 남는다.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린 이중섭은 이 시기에 유화, 수채화, 데상, 에스키스(밑그림) 등 약 200점과 은지화(銀紙畵) 약 300점 등 5~600점을 남겨 현대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그으며 찬란한 페이지를 엮어내는데 크나큰 공적(功績)을 남긴다.

바다 건너 먼 한국에 고생하고 있을 남편을 그리워하는 부인은 하루빨리 50만엔을 만들어 빚을 갚은 다음 일본에 정착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심 끝에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 낸다.

이때엔 이중섭이 다시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과학 서적이 희귀할 때라 일본책은 한국에서는 10배가량의 차액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남편의 생활을 돕기 위해 일본에서 책들을 구입해 남편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로지 책을 팔고 남는 이익금으로 생활비와 작업에 쓰이는 비용에 보태어 조금이라도 그림에 전념해 어머니의 빚을 갚고 가족과 함께 하루라도 빨리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보내는 책들은 해운공사 소속 한 직원을 소개받아 그에게 심부름을 맡기기로 하고 책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일이 지나 도 이런저런 말이 없어 그 직원에게 물어봐도 기다리라는 말만 해 그런 줄 알고 그 외에 3회에 걸쳐 150권이나 보낸 뒤에 사실을 알았다.

알고 보니 소속직원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몽땅 횡령해 버려 헛수고가 되고 말자 이번엔 방법을 달리해서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자 둘을 만나게 해준 ‘홍하구’에게 미안함을 무릎 쓰고 부탁을 청했다.

당시 ‘홍하구’는 해군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책의 수송은 ‘홍하구’가 맡아 친구인 중섭에게 전해지도록 했고 그 후에도 수송은 순조롭게 전달돼 중섭에게 큰 목돈이 생겨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엔 평소 중섭과 알고 지내던 성악가 S가 매달리며 단 4시간만을 이용하고 돌려준다고 꿰어내 약속해놓고 돈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며칠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지 7일이 지나서 동경에 있는 아내에게 한 통의 속달이 날아왔다. S라는 성악가가 밀항하다 붙잡혀 수용소에 갇혀있는데 당신 친구라고 사정하며 보증을 서달라고 조르고 있으니 조언을 시급히 결정해 확답을 달라는 내용이었다.

며칠 이내로 편지를 받은 부인 입장에서는 친분이 있어 가까운 사이라며 4시간만 사용하고 돌려주겠다던 여자가 밀항하다 체포돼 갇혀있어 지난번 기억이 먼저 울분과 함께 떠올랐을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J와 같은 전철(前轍)이 있어 남편이 지금 이도저도 못하는 입장에 처해 고생을 다하고 있는데 그래도 남편에게 우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일은 없는지 조언을 구하고자 불편한 마음을 갖고 빠른 시일 내에 속달로 편지를 보내오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 편지를 받은 이중섭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잠시 생각해보자. 너와 나 같으면,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태생적 심리는 비슷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하루 아침에 두 얼굴로 변하기 일쑤인 당신과 나는 솔직히 어떤 판단을 내리겠는가?

그러나 이중섭은 역시 요즘말로도 지나버렸지만 굳이 말하자면 통이 크고 위상이 높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심미안적 혜안(慧眼)이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편지를 아내에게 보낸다.

“내 나라 사람, 내 친구가 그렇게 묶여 있으니 우리가 풀어주는데 도움이 돼 줘야 하지 않겠소. 두 아들을 당신에게 맡긴 주제에 자꾸 친구들까지 문제를 일으켜 당신을 괴롭히고 있으니 정말 나는 당신 앞에 얼굴을 들을 수가 없구려, 보증을 서줘 풀어주게 하오, 미안하오”

이것은 정말 이중섭이 아니면 불가능한 내용으로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그의 큰 위엄과 담력으로 평소 말 없던 인간 이중섭이 가난하고 외로운 인고(忍苦)가 한그루의 아름드리 기상을 품은 소나무로 승화되는 내용이야말로 중섭다운 심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면이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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