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하)
[평론] 흰 소가 말해주는 ‘울분과 통한(痛恨)’ (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2.06 1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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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남긴 천재 화가’ 이중섭
정직한 화공이 그려냈던 순수한 화풍… 그는 왜? 그림 외에 말(言)이 없었나.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중편에 이어) 주변을 맴돌던 어두운 그림자들

간절한 마음으로 아내가 일본에서 보내준 책들을 목숨같이 여기고 책값을 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 어렵게 만들어 모았던 꿈을 담은 돈.

그토록 소중하게 모아놓은 적지 않은 그 돈은 한 가족의 명운을 결정하는 순간이건만 그런 돈이 욕심나 눈을 부라리듯 작정하고 덤벼들어와 순수하고 말없는 ‘환쟁이’라고 착각하고 뺏어간 돈으로 혼자만 잘살겠다고 밀항한 S를 욕하지 않고 도와주라고 할 수 있는 응징보다 앞선 선처(善處)는 보통사람들로서는 불가능했을 결단이 가슴에 와 닿는 부분이다.

이런 이중섭의 배려로 그녀 S는 수용소에서 풀려나 부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필자의 예측으로는 이중섭의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과 거짓 없는 솔직한 순수했던 화가로 유일하게 술을 벗하며 누구와도 말도 섞이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그림만 알고 있어 세상 물정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본인이 하고 싶은 일에 빠져 열중하고 있었을 모습으로 그의 속맘을 조금이나마 암산해 헤아려 보면 거의 맞는 답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지금, 세월은 흘렀지만 우리 같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 진솔한 사람을 어둡다고 마음먹은 J라는 남자와 S같은 여자 그리고 선원이라서 책(冊)의 수송을 맡은 저~ 어 아래 땅속 음지에 뿌리를 박고 자생하는 풀들(草)의 생명체와는 차원이 달랐을 것이다.

말 없어 마음 좋고, 가진 것 없어 욕심 없는 가난한 호주머니마저 털어가겠다고 벼르고 작정한 음흉스럽고 얄팍한 짓거리들은 당한 이중섭 말고 모두 같으면 의심의 잣대와 법적 저울을 어디에 갔다데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약점을 노린 J와 S는 평소 친구인냥 이중섭의 주변을 맴돌며 이따금 막걸리 주전자라도 사들고 오는 척하고 의중을 살펴 때를 봐가며 기회를 살피고, 일정들을 확인하고 틈을 타서 비열하게 계산을 해놨을 터 그들 모두가 똑같이 숨겨왔던 꼼수의 틈새가 훤하게 보여서 “어떠하겠냐”고 묻고 싶은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화가 이중섭의 삶은 일반인보다도 더 비참한 생활에 시달리며 그림만이 전부인 줄 알고 천성으로 그림밖에 모르는 순진무구한 화가에게 저 아래가 너무나 높아 아찔하도록 벼랑 끝보다 무서운 상황들을 만들어 놓았던 비극적 삶으로 몰고 간 비인간들은 차마 충격적이어서 또 한차례 뒤통수를 내리치는 듯 가슴 아프다.

돌이켜 이중섭의 삶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이는 평소 그가 황소처럼 과묵하고 말이 없었던 사람으로 남들이 그를 속이기 좋을 만해서 그런지, 아니면 인간들이 벌이는 더러운 사회적 구조망이 옭아매어 체념하고 있어 그런지, 그도 아니면 따져야 하는 문제들이 싫어해서 그런지 딱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슷하게 보이기는 하다.

분명한 것은 이중섭이 평소 걸어왔던 지난날들을 뒤돌아 유추해보는 곳을 따라서 불빛을 비춰 그의 후미진 곳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형태들이 거기 그대로 있어 확연하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은 틀림없이 그들의 행각들을 사전에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 명백하지만 그들이 벌인 일들을 누구에게도 따지지 않고 조용하게 눈을 감아주듯 아무도 모르게 말없이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판단돼 중요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이중섭의 마음속 인간미와 그의 혜량(惠諒) 넓은 가슴을 헤아리게 하게도 남음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그들은 이중섭과 어떤 관계였는가?가 궁금해 더 깊이 파고 들어가고 싶지만 그것을 덧보태어 필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게 세상은 모두가 이중섭의 관심 밖의 일이라 여겨 세상 물정에 어둡다고 계략(計略)을 모사(謀事)하며 술책을 꾸미는 몇몇이 그의 주변에 야음을 틈타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중섭은 이미 대략으로 알고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을 뿐 얼마든지 감지되는 사안들로 받아들여진다.

따지고 보면 법률적인 문제까지 확대될 수 있는 작태들을 이중섭은 알고도 모르는 채 차마 인간들이 벌이는 더러운 짓거리들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표시를 내지 않았던 것도 화가 이중섭만이 갖는 사내다운 면모 속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 중 하나다.

마룻바닥에 흩뿌리던 더러운 돈뭉치

이중섭은 늘 쪼들리는 신세로 죽을 때까지 지냈지만 돈에 대해서는 별로 애착을 두지 않았으며 그에 따른 욕심 또한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그림에만 관심을 보였던 예지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예인을 모습으로 변함이 없었다.

일본에 가기 위해 아내가 보내준 책을 열심히 날랐고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간혹 단체 전람회와 개인전도 열었지만 그의 그림에서도 나타나듯 천진난만하고 순수할 뿐이다.

욕심도 없이 여타의 다른 물욕(物慾)에 물들지 않고 오로지 선한 성품의 소유자로 언제나 무일푼인 경우가 다반사여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를 하늘이 빚어놓은 천성으로 사념(邪念) 없던 예인이었다.

설령 그림이 팔려서 돈이 들어온다 해도 그의 손에까지는 그림값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중간에서 농락하는 사람들이 챙겨가 기껏해야 막걸리 값 정도가 고작인 때가 이어져도 늘 말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 대로 수(數)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예술인을 보더라도 한결같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늘 그를 버티고 역경을 이겨 나가며 예술의 열정을 불태우며 작가정신을 잊지 않고 작품에 혼을 불어넣어 예술에 꽃을 피우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 얻어지는 결과로 말할 뿐이어서 다름 아니다.

설령 풍족한 환경에서 즐길 것, 먹을 것, 하고 싶은 것 등등 여유롭고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지내면서 소홀함으로 소일하듯 세월을 지내며 심도 낮은 작품을 대한다면 처절함이나 간절함이 배제된 작품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승화시켜야 한다는 각오쯤은 뼈 속에 각인하고 간절하게 그림에 임해야 한다는 다짐을 여러 번 곱씹었을 것이다.

언제인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평양대학을 졸업한 ‘이활’ 시인은 1954년 겨울 어느 날 다방에서 친구들과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뒷모습만 보이는 키가 큰 어느 사내가 다방에 들어서더니 난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이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사내를 보았다고 한다.

잠시 후 그 사내 옆에 수염이 덥수룩한 술꾼들이 찾아와 지껄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탁자를 들어 던져 내동댕이치며 “왜 여기까지 쫒아 다니며 사람을 괴롭혀”라면서 고함을 쳤다.

그리고 부피가 커 보이는 돈뭉치 다발을 더럽다며 마룻바닥에 뿌리며 “모두 가져가라. 이 더러운 것” 하고 소리를 지르자 술꾼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갔는데 돈을 뿌려대던 사람이 바로 ‘이중섭이었다는 것을 앞모습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일본을 가기 위해 전람회에 사용할 돈으로 짐작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이 도움을 줘 이중섭은 1955년에 모처럼 전람회를 갖게 된다. 그해 1월18일부터 27일까지 ‘미도파백화점’(화랑) 에서 선보인 그의 개인전에는 유화 41점, 연필화 1점, 은박그림, 소묘 등 50여점을 선보여 이때도 30여점이 팔렸는데 그의 수중에는 거의 작품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중간에서 누가 돈을 받아와도 그 사람이 생색을 내며 술집으로 향해 ‘자기 것인냥 거드름을 피우며 술이나 마시라고 했다’니 유명 화가인 이 중섭은 무엇이었는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

단순 그림을 작업하는 정신적 육체적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단순 노동자 신세로 전략되기 일쑤인 화업을 묵묵히 등에 업고 가난과 그리움과 외로움과 배고픔의 인생역경(人生逆境) 나날의 한을 가슴 깊이 품고 묻어가며 살아갔을 것은 자명하다.

파란만장한 화업인생(畵業人生)의 끄트머리

아무리 착하고 천진한 사람이래도 그렇게 속임만 당하고 나면 실의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그가 갈망하는 일본행은 이미 많은 사람에 의해 시달리던 세월이 흘러 거의 절망적으로 구겨져 있었으며 그의 생명력까지 온전치 못할 지경에 이르러 좌절감과 자학에 빠지는 세월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병색이 확연한 몸으로 대구에 살고 있는 친구 ‘구상’ 시인의 집에 찾아가 “내가 동경으로 그림을 그리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라며 “부인 남덕이와 두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하고 “그림만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며 이게 무슨 짓이야”라는 말을 남기고 ‘구상’의 집을 나선 그때부터 그는 확연한 병세로 자리에 드러눕고 만다.

그해 8월 초 그의 병세를 소문을 들어 알고 지내던 이광석과 김이석이 급히 앞장서서 그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수도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무슨 연유인지 바로 성 베드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다시 퇴원해 친구의 하숙집에서 잠시 지내게 된다.

그때 이중섭의 병세는 점점 심해지는데도 그는 병원으로 가지 않고 조카인 이영진의 집이 있는 신촌에 자리한 고모 집에 머물게 된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찾아와도 멍하니 천장만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고 말을 붙여 봐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피식 미소만 짓다가 다시 천장만 바라보고 있을 뿐 일체의 음식을 거부한다. 이 시기부터 이중섭이 미쳤다는 소문들이 돌기 시작한다.

간혹 병문안으로 찾아간 친구인 구상 시인에게만 말을 건네며 “동경행의 계획은 처자를 향한 개인적인 욕망이었어”라며 이미 오래가지 못할 자신의 생명 줄을 본인은 예감하고 귀뜸으로 유언처럼 간신히 마지막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르지 않고 가족들과 연락을 나누던 교신도 이제는 그마저 단절해 연달아 궁금증을 갖고 전해오는 부인의 서한을 아무리 쥐어주며 읽어 보라해도 개봉도 하지 않고 ‘구상’ 시인이 찾아가면 “편지를 그대로 돌려주며 다시 동경으로 반송해 달라”는 부탁을 거듭하는 것이 전부다.

그 뒤 그는 식음거부(食飮拒否) 증상이 더욱 심해져 청량리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실에 음식이 들어와도 밥을 먹지 않고 있어 조금이라도 먹으라면 “내가 이 밥을 먹으면 나 때문에 한 끼를 굶는 사람이 생길 것 아니냐 그러니 내가 어떻게 먹겠나?”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말도 하지 않기 시작한다.

나중엔 이중섭의 이러한 증세는 병세가 깊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정신이상까지 초래하게 된다.

이중섭은 이렇게 며칠을 살아있는 동안 그의 정신은 점점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간신히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 하나하나도 요원(遼遠)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얼핏얼핏 스치며 지나가는 기억마저 얼마간 머물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멀어지는 환자 이중섭은 마지막이 될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지지만 끝내 병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해인 1956년 9월6일 정신이상과 간장염이라는 병명으로 40세의 짧은 나이에 그토록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가 조용하고 처연하게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의구심이 몇 가지 생긴다.

물론 형은 그전에 이미 사망했지만 그는 왜 친구와 친척들이 여럿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몸에 병세가 깊어 위급한 상황이었는데도 어느 기간이라도 병원을 지정해서 치료받지 못하고 친구 하숙집이나 친척 고모 집 또 여러 병원 등등으로 전전하며 여기저기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끝내 죽음 직전에서야 적십자병원에서마저 외로운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다소가 미궁으로 궁금증이 유발돼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늠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일례를 든다면 깊은 병이 들어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누구도 가난한 ‘환쟁이’를 달갑지 않아 병원치료비 등을 부담스럽게 여겨 서로가 여기저기 떠밀어 버리는 경우가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라는 점이 상황적 당시를 고려해볼 때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다음 이유로는 병세는 악화돼 가는데 만나볼 수도 없는 부인과 아이들마저 없는 멀리 있는 처지에 혼자된 몸이지만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아 소생하려는 생각이나 의지를 보이기는커녕 본인 스스로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을 자초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 하나는 이중섭을 껴안고 살려보겠다고 나서는 사람 하나가 없었느냐는 것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의 식구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유학까지 다녀온 천재를 아무리 ‘환쟁이’라 해도 저렇게 무심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주변인들이 탐탁해하지 않았을 것 중 하나가 큰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림과는 별개로 떠오른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것은 상위에서 밝힌 대로 방외지인(方外之人)이라는 기인 또는 천재적으로 타고난 그에게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애매한 정신이상자로 보게 된 이유도 가장 큰 변명으로 비췄을 것이고 결정적으로 소홀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일반인들의 눈높이에서 그를 받아들이기에 난해한 차원에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라는 게 큰 비중이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가슴이 쓰리도록 허망스러웠을 거다. 누구든 몸이 불편하고 아파서 병이 들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하려 노력하고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목숨을 지키려 애를 쓴다.

그러나 이중섭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본인의 죽음을 각오라도 한 듯 태연하게 마음먹고 이를 당연시 받아들인다.

아마도 그가 죽음을 예감하고 음식을 완강히 거부했던 것은 좌절과 배신으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과 삶에 대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결단으로 임하고 있음이 여실이 드러난다.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을 철저히 망가트린 인간들에 대한 증오 내지는 복수에 도전이 아니라 영양실조에 이르도록 굶주림으로 굶어 죽는 실정에서도 음식 거부라는 점을 스스로 택한 것으로 보아 여타와는 전혀 다른 것들과 판이하게 허무에 젖어있는 무의미(無意味)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부분에서 그 이유가 확연하다

살아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치료와 더불어 영양을 보충해가며 일어나 복수라도 할 듯해야 마땅함에도 어디에서도 그런 의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이를 극구 거부하며 앞날이 창창한 미래도 버리고 결국 40세에 어떤 미지의 예감되는 희망도 놓아버리고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이유가 분명하게 드는 것은 그의 인간성과 예술성을 다시 한번 견제(牽制)해보기 위해서다.

지난날 자신을 절망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가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어 그토록 고통스런 나날들을 보내게 되는 오래되지도 않은 최근(당시)의 사건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배타적이야 할 자존심마저 수긍하고 끝으로 택하게 된 마지막 도전이 그를 괴롭혀온 인간들이 아닌 음식 거부라는 것에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중섭의 죽음의 원인을 파악해보면 타국에 있는 처자도 아쉬운 이별의 슬픔 통한으로 사유가 되기에 충분해 애절한 속마음을 오래도록 애태웠을 일이고 그의 주변에 다양한 군상들이 끊임없이 괴롭히는 각양각색의 비인간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우선 그의 타고난 기질과 천성이 떨어질 수 없는 견고한 예지적인 구조망 틀에 자리하고 있는 내면적인 조형원리가 벗어나기 힘든 입방체가 본연처럼 맞닿아 엉켜있다는 이유가 가장 큰 핵심으로 정신과 행동을 억누르고 있는 상상이 견인돼 진다.

자기를 속인 타인들보다 또는 어떠한 주변 환경보다도 무위(無爲)적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자위적 감정을 잇는 카테고리의 연결고리와 그림(예술)에 대한 단단한 욕망이 서로같이 층층이 묶이고 쌓여있어 보여지는 ‘대상들을 움직이려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대상을 자신으로 삼고 있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비겁(卑怯)하게 타협하기 힘든 무의(無義)에 존재하는 자신은 이미 탈출하기 힘든 자극 없는 자존의 미진(微震)이 죽음을 부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생명과 예술에 언제나 불변(不滅)하기에 이를 ‘체념하는 생각들을 밀어내기보다’ 오히려 ‘내적 감정이입으로 스스로 잡아당기며 받아들이고 있다’고 파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지난 과거를 뒤돌아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데 허무한 이유가 되는 ‘포기(죽음)’에서 그의 지난 삶을 묻어가며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은 타인들의 시선엔 천진스럽고 약한 사람으로만 보는 것도 당연해 그렇게도 판단할 수도 있으나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적인 분석이다.

왜냐면 사실 반대로 험난한 세파 속에서 그 흔들리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어 자신의 품성을 잃지 않고 꼿꼿하고 당당하게, 모두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림(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여타 사람들과 다르게 모든 물욕(物慾)을 벗어던지고 수많은 체험과 경험을 통해 험난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왔기 때문에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느 예술가 보다 긴 40년의 역경을 가슴에 파묻으며 그동안의 고난을 참아가며 이어왔다는 점에서 가장 강인한 개성과 끈기 있는 화면(畵面)을 갖은 예술가로, 이남덕의 남편으로, 두 아들의 아버지로, 혼란한 시대상과 더불어 하나의 모습으로 일관했다는 점들이 확연하게 들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어릴 적부터 소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를 자아(自我)의 화신(化身)처럼 여기고 생각해 자신을 반추하듯 소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를 소재로 한 그림만 열거해도 ‘싸우는 소’, ‘용을 쓰는 흰 소’, ‘움직이는 흰 소’, ‘발광하는 소’, ‘황소’, ‘소와 새와 개’, ‘걸어가는 소’, ‘소와 어린이’ 등등 수많은 소의 그림을 다양하게 많이 그렸다.

여기서도 인지되듯 자신과는 다르게 ‘소’들이 힘을 쓰고 있는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그래서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작품들은 자신을 대변하고 시대를 반영해 소를 통한 그의 심정들이 다양하게 반추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자신을 닮은 과묵하고도 강인한 의지를 보이는 소(牛)를 가장 많이 대비시켜 표현전달을 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나며 가냘프게 흔들리는 들풀처럼 간교하고 간사한 사람들의 변신하는 모습들이 안타까워서 말없이 사람들이 고삐를 잡고 부리면 부리는 대로 자기 역할에 충실하는 소를 좋아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덧붙인다면 천재들 또는 상위에서 밝힌 대로 ‘방외지인(方外之人)’으로 불리는 이들의 특성 중 하나는 태생적으로 두뇌를 움직이는 신경세포에 전달되는 물질인 시냅스(Synapse) 세포라는 것이 한쪽으로만 유별나게 발달돼 있는 것이 이들이 갖는 특징이다.

예술분야 외 인문, 자연, 첨단 등등을 망라하지만 주로 한 분야에서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다른 한쪽은 무감각해 이중섭 또한 다른 분야는 다소 평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예술은 어디까지나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쌓고 있는 작가라 해도 예술인들을 바라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아직도 그리 곱지 않게 대하는 경향은 큰 변화가 없어 아직도 무심하게 서양사나 선진문화와는 다른 게 사실이다.

다소들은 작가와 예술인들을 꼬집어 ‘환쟁이’, ‘풍각쟁이’, ‘싸움쟁이’, ‘잡초 쟁이’ 등과 연주자들을 ‘딴따라’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한편에선 첨단을 살아간다고 법석을 떨면서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예술계의 미개적(未開的) 풍토는 오늘날의 현실은 반영하지 못하는 관념에 머물러 조금은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온당하지 않은 것은 옛날과 매한가지다.

그래서 ‘환쟁이’를 자처한 이중섭의 죽음이 더욱 고귀하지 못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옮겨지는 가운데 정해진 의료원에 치료받지 못하고 안타까운 처세로 그 짧은 나이에 많은 이야기를 남겨놓고 이승을 떠나간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직업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에 불과한데 그런 사람을 ‘낮잡아 보는 관습’ 때문이다.

우리가 직업을 이야기할 때에 옛부터 쓰이던 용어로 00‘꾼’이나 00‘쟁이’들은 직업을 가리켜 부를 때 그것과 관련된 직업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앞머리에 붙여 표현됐던 ‘접사’이다.

사전에 00‘쟁이’는 ‘어떤 사람이 그 일을 할 때 그것의 속성을 가진 사람을 뜻’을 표하거나 또 ‘그것과 관련된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불리며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쓰인다’라고 돼 있다.

쉬운 말로 오래전부터 차용돼 온 토속적인 언어들로 이러한 사례는 한둘이 아니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낮잡아 천박하게 여긴 직업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많다.

그런 ‘환쟁이’들이 이중섭 화가처럼 천박한 세월을 보내면서 유학까지 가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온 그들이 천대를 받았던 시절도 분명히 존재하는바 쓸쓸한 죽음을 맞기까지 일부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지경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

오래전부터 유학파들이 생겨나고 견문이 넓어지면서 서양사를 시작으로 비로써 부르는 말로 ‘명사’인 아티스트(Atist, 예술가)는 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총칭하며 또는 00니스트로 불리는 것도 직업적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칭할 때 부르며 작가라는 서양사의 말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40세로 요절(夭折)한 이중섭 화가의 죽음은 아쉬움을 품은 채 쉬지 않고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부산 범일동 일대의 바닷가에서, 제주 서귀포 막노동을 하던 바닷가에서, 통영의 바닷가에서 다시 부산의 선술집 목로의자에 앉아서, 다방에서 참참이 시간이 줘지는 대로 손수 그린 그림 속 소들을 거닐고 현해탄을 바라보며 ‘바다 위를 비상하고 있는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른다.

아내 이남덕(李南德)과 두 아들을 향해서….

나가며

글을 쓰면서 내내 느끼는 감회가 계속해서 새롭지만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는 감정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을 듯하다.

천지창조의 원초(原初)로부터 신성의 빛인 세피로스(Shefiroth)가 우리 주위를 감돌면서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를 대기하는 자가 자기를 대기하는 것’처럼 이중섭은 작은 새 한 마리의 깃털하나로 돌을 조각했었다는 점을 재차 확인하게 한다.

화가 이중섭과 그의 아내인 이남덕과 여사와 이미 흐릿해진 사진만이 남아있을 두 아들(태형, 태성)을 위해 필자의 자작시 ‘기다림’ 이란 시 한 편을 옮기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기다림 -1.

얼얼핏핏 바람결에 나부끼는

빛의 그림자

잠들어 누운 세상의 절반은

은하의 꿈

살아있어 살갗 그을린

시간의 흔적 속으로

손풍금 울리면

저만치 발 딛고 눈 비비는

사람들의 변주곡(變奏曲).

-기다림-2.

또 다른 세상

나뭇잎 지는 하늘의 그림자

하얗게 석고가 되어버린

애증(愛憎)의 석상(石像)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

무엇으로 남아 호흡할 것인가

지난여름 푸르른 꿈의 환희

사계(四季)의 성에 낀 살얼음 딛고

봄의 빛 다가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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