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물고기는 물속에서 목이 마르고, 사람은 공기중에서 명을 줄인다”
[평설] “물고기는 물속에서 목이 마르고, 사람은 공기중에서 명을 줄인다”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2.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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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양생(道學養生)’ 외길 고(故) 월광(越光) 김진태 도인(道人)을 회상하며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점점 겨울의 한복판으로 몰고 가는 차디찬 바람이 외투 속을 파고들어 옷깃을 여미면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도회지 회색빛 콘크리트들이 자정(姿情)하려는 망막을 조여들게 해 더욱 시야를 좁게 한다.

달랑 한 장 남은 경자년(庚子年) 달력, 며칠 남지 않은 날짜를 보다가 나이를 짚어보니 시골마당 한쪽 고목처럼 비틀어진 나목에 걸린 비닐조각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초려함만 허전하게 밀려온다.

현관문을 걷어차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은 심란한 이방인처럼 조바심이 일어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잠자리마다 생의 혼미한 조각들이 새벽 내내 어지러운 무늬들만 난무한다.

해 넘어가는 석양엔 어둠이 찾아들기 전 저 멀리 수평선 너머 먹구름이 시커멓게 드리워져 있어 앞으로 재촉하고 나아가야 할 길이 멀기가 구만(懼懣)한 것처럼 까마득해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속마음은 침묵 속 다급한 아우성으로 회오리처럼 소리 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탁하다 못해 혼탁(混濁)하다. 거기에 오래도록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사람들의 이맛전마다 근심의 주름들이 가득하다.

예전부터 어떤 선각(先覺)으로만 느껴지던 실상들이 오늘에 다가와 온 나라 인간들의 발목을 붙들어 매어놓고 거꾸로 뒤집혀 가는 어수선한 시방(時方)은 쑤셔 놓은 벌집 같아 야단(惹端)들이다.

올 초부터 여기저기서 이구동성 수신(受信)들이 전파를 타고 전해지는 달갑지 않은 말도 그렇고 현란하게 보이는 그림들 또한 그렇다.

13일 현재 하루 코로나 확진자수가 역대 최대수인 1000명이 넘어섰다는 보도를 보면 인간들이 바이러스 감염에 확산되는 양상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목숨을 잃는 숫자도 그만큼 높아질 수 있다는 경고다.

시기당초 무능한 초등방침은 차후에 따지더라도 이젠 상황이 정도를 넘고 있어 이에 따른 긴급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태로 사회 전체가 마비되는 것은 최소한 줄이고 막아야 한다.

이는 점차 위험수위를 넘어 감당키 어려운 지경까지도 예측이 가능해서 조만간 몇 천명이 넘어서는 게 아닌지 심각성이 고조되고 있어 당분간은 불안한 나날이 계속될 전망이다.

유일하게 백신을 기다리고 있는 대다수 국민은 해를 넘겨 내년 초에나 접종이 실시돼 꽤 오랜 시일이 걸리는 만큼 정부와 관계부처의 불가피한 조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게다가 야생조류나 닭, 오리 등 가금류에서 감염되는 고병원성 AI조류 인플루엔자가 또다시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돼 방역에 비상이 걸려 이 또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일상생활마저 생활준칙이 만들어져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고 일정한 거리두기와 일체의 모임이나 가족들의 애경사마저 기피하고 있는 실정으로 외출을 삼가하고 가능한 답답하더라도 집에서 일정을 소화해가며 추이를 살펴보는 방법 외엔 현재까지는 특별한 묘책이 없는 실정이다.

답답한 것이 어디 그뿐인가.

바다의 물고기는 쓰레기와 상승하는 수온으로 몸살을 앓으며 사람들은 거리마다, 차 안마다 곳곳에 업 친데 덮친 형국으로 황사와 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쓴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일상이 돼 버렸으니 “물고기는 물속에서 목이 마르고 사람은 공기(空氣) 중에서 명(命)을 줄이다”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이게 나라냐?’라고 되묻는 국민 앞에 자성을 잃은 정치인들과 법무부장관 추미애란 사람은 올바르게 수사를 지휘하려는 윤석열 검찰총장이란 사람을 ‘꼭 찍어 끌어내려서 야인으로 내몰아야 안전하다’ 싶은지 여당 대표까지 합세하고 나서서 기를 쓰고 있다.

무엇이 그리 구린지 대통령과 음모라도 한 듯 여당과 결집해 법까지 개정해가며 몇 달째 국민에게 극도로 피로감을 안겨주며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꼴 보기 싫은 비선호도에 이어 기피대상자 일등으로 낙인이 찍혀있어도 철면피다.

때마침 코로나19가 성난 민심들이 내뿜는 화풍(火風)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으로 애매한 사람들을 감염시키며 생명을 앗아가고 있지만 먼저 따지고 넘어가야 할 윗선부터 여럿은 기회를 노리며 이를 핑계로 방패 막 뒤에 숨어서 눈치만 보고 있는 처세이다.

반면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에서는 우주탐사선이 발사돼 달나라에서 토양을 채취해서 돌아오려는 발사체가 우주 주변을 맴돌고 있어 무엇인지 어색하게 마주보고 달려가는 꼴로 대치되는 모양새를 보고 있는 듯하다.

천태만상 이런 현상들이 마구잡이로 확인되고 있는 지금 돌아보며 월광(越光) 도인(道人)은 예견이라도 한 듯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행랑 하나 짊어지고 그 어떤 진리를 찾기 위해 결코 쉽지않은 먼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구도자처럼 첫눈에 느껴지곤 했는데 선입견이 크게 벗어나지 안았던 것 같다.

사람 사는 모습들이 권태로워 산속에 들어앉아 평생을 외길인생으로 시공(時空)을 넘나들며 우주 삼라만상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려 52년을 바람같이 살다가 이미 10년 전 이맘때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나 하늘로 소천한 월광(越光) 김진태(金眞泰) 도인(道人)이 그리워진다.

월광도인은 공부한 데로 책자를 펴내 지침을 알려주고 이승을 버렸지만 살아생전 늘 외롭고 고독한 남루(襤褸)가 배인 빈곤(貧困)한 시간 속에서도 틈이 나면 같이 어울리면서 사유 깊은 인생사를 술잔으로 달래고 서로를 다독이며 오랜 기간 같이 속정 있는 세월을 낚았었다.

도회지가 싫어 스스로 계룡산 속 발길이 닿지 않는 바위틈에 찾아들어 손바닥만 한 선실을 꾸며놓고 생쌀을 씹어가며 촛불 아래 역학(易學)과 정역(正易)에 매진해 이치를 깨우치고 역리(易理)를 바탕으로 활인지도(活人之道)를 승화시켜 도학양생(道學養生)이란 책을 펴내 회자가 되던 월광도인(道人)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려 했던 장본인이었다.

필자가 중구 대흥동 문화예술거리에 위치한 오원화랑 2층에 작업실을 틀어놓고 국내 외 여기저기 부르는 곳을 다니며 나름대로 작품발표에 열중하고 있을 때이니 유수와 같은 세월을 실감한다.

그때 월광도인은 딱히 볼일이 있어 몇 개월에 한 번씩 대전에 나타나면 으레 화선지와 작은 벼루 또 붓 몇 자루를 행랑에 넣고 필자의 작업실에 찾아와 마음을 열고 문인화(文人畵)를 그리며 허탈한 웃음을 짓곤 했다.

급할 것도, 앞설 것도 없이 시간을 잊고 흰 두루마기에 말꼬리 같은 긴 백발을 질끈 동여매고 유유자적 글을 읽고 쓰는데 밤낮을 유희(遊戱)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명토록 또렷한 기억이 바로 앞이다.

시간은 어느새 변화무쌍하게 흘러서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돌아보면 차갑게 혹은 무겁게 돌아가는 세태 속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자신을 뒤 돌아 세상의 이치를 가늠해가며 험난한 인생의 도반(道伴)에서 바른길을 찾아 먼 귀로에 있었으니 그러한 여정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았던 것도 상호 소통했었다.

세상이 어찌돼도 ‘우주의 이치는 현상에 맞게 돌아갈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우매한 이들에겐 눈(目) 속에 비치는 자연과 자신들을 들여다보게 할 뿐이어서 무엇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 같기도 했었을 것이다.

어느 겨울날이던가! 당시도 며칠 동안 흰 눈이 쓸쓸한 도회지의 골목을 휩쓸고 지나는 바람결에 등불 밑으로 모여드는 하루살이 떼처럼 가로등 빛에 비쳐지는 눈발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성업 중인 대흥동에 두부두루치기로 전통이 나 있어 예술인들이 즐겨 찾는 00집에서 몇몇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인생사들을 애기하며 소주잔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화선지에 휘갈겨 쓴 종이 한 묶음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권두언을 부탁한다며 건네주는 분홍보따리를 받고 보니 붓글씨로 한문과 한글을 혼용하여 써내려간 내용으로 도무지 알 길이 없는 무지한이어서 사양하려던 표시를 감추고 잠깐 훑어보니 보기도 쉽지 않은 도학양생(道學養生)이란 붓글이 쓰여 있었다.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산속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쓰고 있다가 시내에 내려와 만난 것도 계절이 바뀌어 몇 개월 만이고 오랫동안 서로를 가깝게 지내던 벗으로 거절하기도 이유가 변변치 않아 겨우내 작업 틈틈이 공부하는 셈치고 거들어 보기로 맘먹었다.

술자리가 파해 월광도인이 들려준 보따리를 싸들고 작업실에 밀어놓고 2~3일이 지난 후 펴보니 첫 장엔 도학양생(道學養生)이란 제목과 함께 우주 삼라만상과 만사(萬事)의 총체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류 정신문화를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걸 직감하게 됐다.

도학은 고금(古今)의 변화에 통달해 자연과 더불어 사회와 인간의 규율과 규범에 관계된 천(天), 지(地), 인(人)의 경계와 경지를 탐구하는 내용으로 주체와 객체가 상호작용하는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철학과 함께 도론(道論), 기론(氣論), 우주론(宇宙論), 변증법(辨證法), 인식론(認識論)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하는 철학의 지혜를 통해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마음 길을 안내하는 내용들로 그동안 그가 갈고 닦았을 우주의 자연법칙에 지혜를 담아 이야기하듯 하나하나 전하고 있는 필(筆)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도학의 깨달음의 요체(要諦)를 담고 있는 자연적인 충실함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변화를 도학의 사상이 관통하는 다채로운 면모들을 우주의 섭리와 함께 살필 수 있도록 넌지시 일러주고 있었다.

월광 도인이 도학양생(道學養生)을 쉽게 풀이해놓은 것 중 알기 쉬운 내용 일부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역학(易學)이란 자연계의 모든 현상이 그 근본원리(根本原理)가 있음으로 존재해 이룩한다.

이것을 탐구함으로써 인생관 세계관 그 밖의 모든 사물의 올바른 길을 밝히는 것이 ‘역학의 근본적인 뜻’이라 해 역의 책됨을 멀리할 수가 없다고 쓰고 있다.

‘역(易)은 설명하는바 천지자연의 이치(理致)가 아님이 없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날마다 그 속에 율(律) 있어 잠시도 이를 떠나서는 살수 없는 것이어서 멀리할 수 없이 중요 시 여겨야 하고 시수(蓍數), 괘효(卦爻)의 점복(占卜)이 역의 겉형태를 뜻하는 것이요, 인성과 천명의 도덕이 역의 묘(妙)한 것이라 설명한다.

따라서 역은 천지유명(天地幽明)에서부터 고동(鼓動)의 초목(草木)에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이치에 합하지 않음이 없고 삼라만상 모든 자연법칙에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며 이것이 모두 어떠한 상(象)으로 이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괘(易卦)의 형상(形象)은 이치(理致)와 같다”라 하며 상(象)이란 어떠한 물체와 같은 형상으로 상과 법칙은 같은 몸의 안과 밖으로 관계를 형성하게 되며 형(形)은 수(數)로 이(理)는 상(象)으로 모든 형상(形象)들이 이루는 것들은 수(數)로 이룩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따라서 도의적(道義的)인 인생관만이 인간의 본성을 찾을 수 있으며 또 그것을 발휘할 수 있으니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 역(易)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하늘의 도(道)를 밝히고 백성의 일을 살핀다 했으니 인간의 쓰임에 앞장서며 자연(自然)의 이치(理致)와 인간의 모든 일사를 살필 수 있는 것으로 민용(民用)에 앞장서게 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런 내용들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져 일반인들을 위해 난이도가 있는 도학양생(道學養生)의 실체를 지혜와 이치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보충함으로써 도학의 논리에 접근하는데 용이하도록 서술하고 있는 점도 편하게 받아들여졌었다.

더욱이 모든 만물은 도학의 논리와 순리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변화의 끝은 자연에 순응하는 법칙의 원리를 깨달음으로써 생의 목적에 다가가도록 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 사람과 자연의 관계들을 바르게 알고 행동하여 조응(照應)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자연스럽지 않게 얽이고 섞이어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중에서도 초를 다투며 변해가는 현대문명 속을 헤매는 정신문명은 갈수록 인간다운 면모를 잃어 저속하게 퇴색되고 변질돼 가고 있는 인간 상실은 이치를 거스르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각 분야 전반부에 거쳐 제대로 돌아가는 순리를 집어던진 현상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참혹해져 인간들의 정체성 회복에 무엇인가 정신세계의 가치를 일깨우는 척도가 필요해 보이는 것도 분명하다.

이렇게 인간들이 벌이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닮은꼴들이 너무 많아 말 그대로 이치와 순리를 벗어나 귀나 코나 아무 곳이나 걸치는 대로 무의미한 것들과 미개(未開)한 것들이 창궐하는 혼란한 시대에 홀연한 가짐으로 세상과 멀리하고 혼자앉아 그 함정이나 자아도취에 벗어난다는 것은 크나큰 과업이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는 꿈같은 허상이나 상상만으로는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 가는 도반(道伴)에서 성가(成家)하기 힘들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아무나 혹은 누구나 가벼이 여길 일은 더욱 아니라는데 큰 결단과 각오가 수반되는 일일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바른길의 진리를 스스로 자문해가며 속세를 벗어나 무위자연에서만 가능한 도인으로 평생을 살아가겠다는 것을 어느 누구는 ‘한가한 일’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이상으로 여기고 실천한다는 다짐은 매우 고매한 자세요, 고결한 삶으로 어지간해서는 따라가지도 못하는 생의 험로(險路)이기 때문에 결코 ‘한가한 일’이 아니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구도자에게 있어 생명의 원천 수(水) 같은 존재이고 목표이겠지만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이치를 절반만이라도 의식하고 이를 초석(礎石)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다행이겠으나 이도 미지수이고 의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공부는 비단 월광(越光) 혼자만은 아니겠으나 청춘을 잊고 진리를 일깨워주고 한세상을 바람같이 살아가던 월광도인은 오늘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인간에서, 인생에서, 자연에서, 우주에서 무위(無爲)를 깨달아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역리를 바탕으로 활인지도(活人之道)를 승화시키려 몸과 마음과 세월을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자신을 바친 월강(越光) 김진태(金眞泰) 도인(道人).

아마 아무것 거칠 것 없는 허허로운 산길에서 혹은 들길에서 바람 같은 긴 흰머리와 옷깃을 날리면서 햇살 쏟아지는 숲속 길을 천천히 사유(思惟)하듯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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