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과거엔 재해·전염병 극복 어떻게 했나?
[평설] 과거엔 재해·전염병 극복 어떻게 했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0.12.21 20: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기를 대처하던 선조들의 지혜
“자연의 경고 강구대책 마련했어야”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풀면서

연일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 수가 급증해 사태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나라 안팎의 사선에 불을 붙여 옮기는 불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어 적잖게 밀려오는 파장이 끊임없이 넘실대는 가운데 코로나19 확산세는 꺾이지 않고 있다.

예측도 못했던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내에선 지난 1월20일 국내 첫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전 세계 인간들을 향해 덮친 불행은 세기의 역사를 바꿔놓으며 인류문명이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던지고 있어 역설(逆說)적으로 경고하는바 의미가 역력하다.

현자(賢者)는 ‘평소 조용할 때가 기회라 여겨 그것이 정상적인가를 평시에 묻는다’고 이르고 있지만 우둔한 인간들은 쉬었다 가는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간 결과가 결국 나약하게 추락하는 군상들이 자처해서 만들어낸 사태로 현대문명이 빚어낸 지구 환경문제가 화두라는 생각이 전전한다.

우리는 왜 지식을 쌓으며 지혜로워지려 하는가?

견문을 펼쳐 숙고해보면 극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비합리적이고 비자연적인 시발(始發)을 알아차리는 것이 현명하고 이상적인 확인일터 모두는 자연과 공존의 이치를 빼놓고 오로지 첨단과 혁신을 외치는 사이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또 다른 첨병(添病)을 낳고 말았다면 편견인가, 오해인가?

‘지식이 있어도 옳은 이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배우지 아니함만 못하다’라는 경중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비단 한두 곳이 아니어서 몇십년 전부터 지구의 이상현상의 우려를 바로 알린다는 취지에서 ‘지구를 살리자’라는 자세를 갖고 실천에 앞장선 이들은 몸에 이로운 약(藥)을 마신 것처럼 씁쓸해 인상이 쓰일 일이다.

그중 필자도 20년 전부터 국내·외에서 절박해지는 지구 환경문제에 대해 지구온난화현상이 가져올 엄청난 당면 과제들을 예측하고 이에 따른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수 백회에 이르도록 행위예술을 실현하고 여기저기 글을 쓰면서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는지 자승자박(自繩自縛)한 꼴로 사념만 깊어진다.

자연의 경고 신중한 강구대책 세웠어야 했다

예전에도 더러 이따금 보았던 캠페인들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던 대표적인 방송과 언론들이 지금에서야 뒤늦게 지구환경 운운하며 지구의 중요성을 알리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자면 이제야 생색내기로 별 쓸모없는 짓에 불과한 시간낭비라 꼬집는 사람들도 적잖을 거라는 사견이다.

오늘도 첨단과학이 낳아준 초스피드시대를 쫒아가는 기기들을 껴안고 피곤하도록 정신없이 바쁜 현대문명 속을 황급하게 살아가지만 다시 태어난다는 날짐승에 불과한 솔개만도 못한 생을 본받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우리는 자연의 이치에 얼마나 낭패하고 수치스런 일인지 반성이 뒤따른다.

포스트(Post) 코로나19(Covid)로 언택트(Untact) 비대면 시대에 사회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낮 설은 일상을 이제는 당연시 받아들여야 하는 위드(with) 코로나19 시대.

이젠 이를 선택의 여지없이 수용하고 감내해야 해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답답한 세상살이를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 현실이 되고 말았으니 원인이 되고 있는 환경문제의 해답과 대안이 어디 있는지 멀기만 하다.

사실 주지하다시피 지난 때 자연은 위기의 경고를 여러 번 신호를 보내왔었다.

사스, 메리스, 아프리카 에볼라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19 등등 몇 년씩의 단위로 자연이 인간에게 미리 예고라도 하듯 사전에 이를 알리는 신호를 몇 차례 보낸 바 있어 그때도 많은 인명을 앗아갔지만 별일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결과가 오늘을 낳았다는 판단이 심중 깊이 와 닿는다.

온실 속에 재배되는 연약한 화초마냥 자동으로 습도와 온도를 맞춰가며 전기불빛으로 태양광을 쏘이는 경우처럼 고층 아파트 콘크리트 속에서 리모컨을 갖고 일상을 조절하는 나약한 인간들의 실상을 바꿔놓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는 세상에 이상한 수칙과 규칙을 만들어 놓고 해가 바뀌어도 점점 긴장감을 높이며 불편을 안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기다리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우리나라 의 경우 내년 2~3월이나 돼야 공급된다고 말로만 떠들고 있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를 낳을지 답답한 방안에 갇혀 고민만 무성히 삭히며 지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백신 구매국인 영국과는 21일 현재 계약체결마저 이뤄지지 안 않다하니 불안감은 물론 불신만 날로 커져만 가고 있는 상태다.

그뿐인가? 이미 중동과 중남미 지역 국가들은 화이자, 모더나 등의 신종 바이러스감염증 백신을 시작해 걱정을 덜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실험 중으로 임상3상이 진행되고 있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마저 언제인지 확실성을 주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결과에 따라 국내 도입시기가 늦어질 수 있다고 판단돼 무엇이든 더디기만 한 현 정부의 안일한 처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말이 필요치 않아 지금보다도 아마득했던 위 선조들이야말로 모든 것이 부족하고 아무것도 없어 인간들만을 의지한 채 자연의 이치와 섭리로만 살펴야 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지금과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는 20년 전부터 필자의 두상을 흉상으로 제작해 지구온난화 현상을 행위예술로 실연하며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경고해 오고 있다.  

선조들의 기근과 전염병의 대처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고 인간에게 드리우는 자연은 똑같아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은 뻔했을 것으로 열악했던 전통시대의 인간들은 어떻게 이를 극복했을까? 살피고자 한다.

농업을 주요 시 여기며 생산하던 농경시대에는 자연의존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높았을 것으로 그런 과정에서 홍수와 가뭄이라도 겹치게 되면 나라 전체와 백성들은 대혼란에 빠지는 경우는 자명했을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가 도래해 가뭄과 홍수가 반복되던 17세기에 특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알려지고 있어 시선이 머문다.

현종 때인 1670년(경술년)과 1971년(신해년) 때에는 기근이 심해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으로 불릴 정도로 참혹했다고 기록돼 있다.

가뭄이 계속되자 현종은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와 사변이 달마다 생기고 한재와 수해가 해마다 잇따르고 있어 밀과 보리를 비롯해 농작물 등을 거둘 것이 없어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전하고 있어 그때도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재앙은 물론이다.

거기에 “전염병까지 창궐해 백성들이 죽어가니 가엾은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라고 승지(承旨,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벼슬)가 교서(敎書)를 기초해 직언을 구했다는 내용을 보면 왕으로서 자신을 책망하며 통치자의 역할과 본분을 다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 지금과는 판이하다.

1671년 2월 신찬벽온방(치료의서, 보물 제1087-1)기록에 따르면 ‘팔도에 기아와 여역(癘疫)과 마마로 죽은 백성이 많아 이를 다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인데 삼남지방이 더욱 심했다’라고 기록돼어 있어 당시의 참상을 말해준다.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하면 “이런 상황은 태어난 후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일로 참혹한 죽음은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했다”라고 해 당시의 자연재해와 전염병의 피해가 임진왜란보다 더 심했다고 일러 이를 증명한다.

그때에도 재난이 발생하면 피해지역에 세금탕감, 진휼미 공급 등이 이뤄져 이것은 지금의 재난지원금 지급과도 유사한 사례들로 보이며 이 외에도 벼슬아치들의 반찬가지 수를 줄이도록 하고 금주령을 내려 곡식 확보에 일진하는가하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의 석방을 통해 일손을 도와 나라 전체가 가난을 함께 극복해 나갔음을 일러준다.

지진의 발생과 천문관측 인식

‘삼국사기’나 ‘고려사’와 같은 역사서에는 지진 관련 기록이 많은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진이라는 용어가 수도 없이 많이 거론되고 있어 빈도가 높았음도 나타낸다.

당시 전통시대에도 지진이 일어나면 왕들은 이 또한 백성들과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현상으로 여기고 이를 직결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남 탓하지 않고 자신들을 책망하는 대목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에 문제를 제기해 현실과 비교되고 있는 부분이 여러 곳이다.

‘태종실록’ 1410년(태종) 3월15일 서운관에서 지진이 있었다고 아뢰자 태종은 “이것은 원통한 옥사 때문이니 혹독한 형벌을 가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에 지진이 크게 일어난 것은 16세기 초반 중종 때였다. 1518년(중종) 5월18일 한양을 비롯한 전국에 큰 지진이 유시(오후 6시)에 크게 세 차례나 났었다고 한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와 같이 커서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줄을 몰라 발을 구르며 밤새도록 노숙하고 집으로 들어가지 못해 하늘과 땅을 원망하는 처지가 많았다고 전한다.

안타깝게도 어쩔 수 없는 이런 내용들이 실록에 기록돼 있으며 영의정 정광필은 “지진은 그전에도 미세한 진동은 있었지만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습니다”라 해 당시의 지진의 심각성을 표시하고 있다.

선조 때인 1594년 한양에 지진이 일어나자 선조는 지진의 원인이 ‘부덕한 자신의 소치’임을 고민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지진을 어떤 분석과 이해보다 정치나 도덕적 기준으로 보고 당면한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견주고 있어 의중을 알게 한다.

실록에 지진 관련 기록이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었던 것은 당시 천문관측기관인 서운관(후의 관상감)에서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해 기록, 보관했기 때문에 엿 볼수 있는 기회가 용이하다.

살펴보면 지진기록은 구체적으로 발생한 지역과 함께 ‘집이 흔들렸다’, ‘담장과 상첩이 무너졌다’, ‘산 위에서 바위가 굴러 내렸다’ 등등 지진의 강도와 위치를 추론할 수 있는 기록으로 정리해 놓고 있어 차후를 대비하고 있는 정황들이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예측이라든가 지역별 내진(耐震) 등을 고려해서 현재에는 건물의 설치 시에 적극 이를 반영하고 실행토록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어 현대식 건물에는 필히 이를 설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전염병의 확산과 극복 대처

‘조선왕조실록’에서 역병이나 역질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면 상당 건수 이상에 달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실록에는 역병을 나타내는 용어가 다양하게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여역(癘疫)이라는 내용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두역(痘疫), 학질(瘧疾), 홍역(紅疫), 악병(惡病), 염병(染病), 온역(溫疫), 콜레라 등 시기별로 다른 전염병이 유행했던 것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 전염병의 참상이 시기적으로 끊임없이 나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숙종실록’에는 “이 해에서도 도성에서 쓰러져 죽는 시체가 1582인에 이르고 팔도에서도 사망한 사람이 2만1546인이었다”라고 쓰고 있어 당시에도 그렇게 많은 목숨을 잃는 이가 상당수에 이르렀으니 기근과 함께 전염병의 심각성이 얼마나 참혹하고 창궐했는지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상황들을 말해주고 있어 상상이 된다.

우선 그때에도 한양에서 역병이 발생해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격리해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방법이었다.

성 밖에는 역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으로 의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활인서(活人署)가 이들에게 의원과 함께 의무를 보도록 배치했었다.

이 활인서는 평소 무의탁 병자를 돌보는 일을 맡다가 역병이 발생하면 따로 여막(廬幕)을 설치해 환자들을 보살폈다고 하니 지금의 보건소마다 발열을 체크하는 임시진료의 모습과 비슷한 양상이 그려진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의학서들의 편찬도 꾸준히 이어져 허 준의 ‘동의보감’ 이외도 전염병에 관한 치료서 및 의료서 ‘신찬벽온방’과 ‘벽역신방’ 등을 만들어 사용토록 했다고 한다.

숙종 때는 왕비가 두창(천연두)에 걸리자 숙종이 경희궁에서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겨 나랏일을 살피는 기록도 있으며 과거시험 장소를 변경한 기록도 보인다.

숙종 때의 궁중에서 임금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한 어의(御醫) ‘유상’이란 의원은 왕의 두창을 치료한 공로로 종2품까지 올랐다는 공적이 남아있으며 ‘정약용’은 홍역과 천연두 퇴치를 위한 이론을 정리한 책 ‘마과회통’을 저술해 치침서가 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지석영’이 ‘우두법’을 시행해 천연두의 고질적인 전염병을 무너트리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1885년에는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되면서 전염병의 극복을 위한 역사가 이어졌다.

접으면서

지금 우리 인간에게 덮쳐오는 징후들이 현실적으로 맞닥쳐지고 있는 지구온난화현상은 이미 비상사태로 오래전부터 가속화가 이어지면서 국제적으로 지구촌 도처마다 이변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는 인간과 인류문명에 가해지는 결과로 재앙의 수준과 충격을 넘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지경에 이르러 막대한 재해로 경악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참변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중이다.

예측할 수 없이 변해가는 주요인으로 ‘지구환경파괴가 원인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무분별하게 자행한 인간들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지구변화의 위기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소나마 긍정적인 하나의 방법으로 백신의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에게 또 다른 바이러스의 완전한 종식의 선언까지는 다수의 세월이 걸리며 언제일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더불어 이 순간에도 ‘전 세계적으로 떠오른 이슈는 비단 코로나19뿐이고 종식이 가능하겠냐’는 희망적인 전망보다 어두운 질문들이 상당수다.

그 불투명은 계속해서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 각종 회의나 모임, 외식이나 나들이 등 제한을 둬야 하는 일상을 바꿔놓은 것 외에 확실한 것이 없는 만큼 지적한 바대로 선조들에게 해답을 구하고 규칙과 수칙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오각성만이 최선으로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이 불행한 결론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