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상)
[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1.04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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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위한 파란, 현실정치 반추
조선 독립선언의 서(書)와 조국애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님의 침묵과’ 메아리

‘님’은 오늘도 침묵한 체 거기 그대로 있다.

만날 때 떠날 것을 몰랐지만 다시 만날 것을 믿었던 영육을 태운 거대한 청죽 같은 육신이 거기 백담사에 혼을 불러일으키며 그대로 있다.

설악의 푸른 산 빛을 깨치고 울창한 오색나무 숲을 향해 흐르는 계곡, 연등도 펄렁이며 마음을 닦는 수심교를 건너 100개의 못이 있는 백담사에 차마 떨칠 수 없는 민족을 향하던 쓰라린 고통을 몸에 껴안고 차라리 나를 달궈 깨우는 분투하던 굳은 입을 다문 선각자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다.

청정한 군말로 ‘님’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용광로에 달군 인두로 이마에 각인해 놓듯 우리의 어리석은 부끄러움을 되새겨 너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항용 그림자일 뿐.

돌아가는 해 저문 벌판 어둠을 엇이겨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을 기루어 가엾은 민족사를 저항한 채 빛 그을음에 여실히 드러누운 그림자처럼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침묵하고 있다.

당신의 눈빛에서 투사됐던 민족과의 이별은 아침의 바탕에 근본 없는 황금과, 밤의 올이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한 생명들은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찾아볼 수 없는 황망함이었을 거다.

바위를 깨우는 ‘님의 침묵’은 정수리에 아연실색한 슬픔을 들어붓고 참담한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의 원천이 흐르는 오색약수터에서 세안을 하고 ‘님’은 갔지만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님’이 찬미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이 침묵한 환영에 휩싸여 가슴 가슴에 메아리로 남아 지금도 요원처럼 설악을 흔들고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영정 앞에선 필자.

상위 글은 몇 년 전 설악산에 들려 만해 기념관에서 선생을 그리며 써놓았던 필자에 시로 대전펜문학지에 발표됐던 글이지만 이번 글을 위해 상위에 붙이며 펼친다.

빼앗긴 민족과 조국을 위해 차라리 ‘님’이라까지 칭하며 혼미토록 잃은 의식마저 죽음으로까지 각오하고 이 나라를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 치던 선생의 눈물어리던 민족과 조국애,

지난 과거 그 암울하고 절박했던 나라 잃은 민족의식을 뒤돌아 조국을 지키려 했던 선생의 뜨겁고 올곧은 정신은 오늘의 현실정치를 두고 무겁게 책사(策士)하며 경중을 울리고 있는바,

어느 때보다 정치인들의 안일함이 선을 넘고 있어 이를 두고 지적하는 국민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는 이때 선생은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고서라도 애국심 하나로 점철했던 험난했을 길을 조심스럽게 뒤돌아 그 의미를 되새겨 반추해보고자 한다.

밥상을 뒤집고 감방에 똥통을 던지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요, ‘님’의 침묵을 쓴 시인이며 불교유신론으로 유명한 불교사상가이기도한 의인(義人)이자 전인(全人)이었던 선생은 사실 욕쟁이였다.

물론 나라를 잃은 슬픔과 울분이 그의 인격과 성품을 바꿔놓은 배경에는 다분히 격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잃어버린 조국을 한탄하며 탄식했었다는 점에서 형성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충남도청이 자리한 홍성에서 (당시엔 홍주洪州) 훈장노릇을 할 때 그는 머리를 길게 땋은 애들을 가르치는 서당에서도 지탄은 일찌감치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놈들아 이런 것을 뭣에 쓰려고 그려는 겨, 밤낮 굽실굽실 머리통이나 조아리면서 충효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을 배워 뭘 하것다는 거여, 강토가 이 꼴이 됐는데”라는 탄식 섞인 푸념으로 곧잘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이는 나라 잃은 탄식을 애들에게 교훈적인 일상의 훈계로 일삼은 모습 중 일목이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했을 때 그는 이미 중의 신분이었다. 설악산에서 수도하고 있을 당시 이 소식이 알려진 것은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중들에게 광기어린 욕설을 퍼붓기 시작한다.

당대의 고승, 중견 승, 수좌, 학인 등 8~90여명이 저녁공양 할 때 오게(五偈)를 읊은 뒤 막 첫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하자 “이 산중 놈들아, 나라를 빼앗겼는데 밥숟가락이 주둥이로 들어간다는 말이냐”

“이 벌레만도 못한 것들아”라며 밥그릇과 반찬그릇 등을 방바닥에 내던져 아수라장을 만들곤 쏜살같이 마을로 내려가 술을 퍼마셔댔다는 애기에서도 그의 불같은 성격을 쉬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찰의 떠올려보면 가장 정숙하게 문밖에는 마치 빈방인 듯 여겨지도록 조용히 식사를 해야 하는 승려들의 식사 법도를 무시하는 처사로 보이나 그의 입장에서는 도나 닦는다고 앉아있는 중들이 밥이나 축내고 있으니 참으로 분개케 하던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치욕과 영욕의 해가 여러 번 바뀌던 1919년 3월1일 서울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만세를 부른 뒤 곧바로 이 행사를 주도한 인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체포된다.

소위 3·1운동의 시발로 이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대부분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의기를 잃고 비겁(卑怯)해지기 시작한다.

근거로는 이 운동으로 인해 체포된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우는 자도 있고, 자신을 비관하며 후회하는 자도 생기고 있으니 이를 본 한용운은 동지들의 비겁한 모습을 보자 똥통을 감방 안에 집어던지며 욕을 퍼부었다.

“이 비겁한 인사들아, 울기는 왜 울고, 후회는 왜 하느냐, 이것이 소위 독립선언에 서명을 하고 그 따위 추태를 보이려거든 당장 이를 취소해버려라, 이것들아”하고 고함을 쳐댔다.

그는 독립선언에 서명까지 한 마당에서 결의를 저버리는 작태를 보이는 대표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그 처세가 맞느냐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독립선언과 조국애

한용운이 감방에 똥통을 집어 던지며 비겁한 인사들이라고 매도한 민족대표들은 재판과정에서 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 꼴을 본 그는 그런 것들 중에 상당수는 일본에 반항할 의사는 추호도 없을 것이라고 한용운은 눈치채고 있었다.

집합단체로 있는 천도교 신자들을 이 운동에 가입시키려고도 하지도 안한 것은 물론이고 처음부터 여기에 참가하지 말도록 종용하는 자도 있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도 남았을 터이다.

거기에 또 다른 자들은 ‘조선은 야만국인데 10년간의 선정(善政, 총독부 정치)에 의해 문화가 진보됐다’, ‘나는 일본에 있을 때 군자금 1만원을 헌납한 일이 있다. 그때 일본이 패하면 동양이 파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며 약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

‘일본 정부가 우리를 배일당(拜日黨)으로 지목하는 것은 큰 오해다’ ‘일본의 원조를 받아야 하며 우리는 일본을 은인으로 생각하며 더욱 친해 질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더라도 독립될 가망도 없으니 결코 앞서 나가지 않겠다’라며 노골적으로 일본에 아첨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조선독립선언 이유서

재판 중에는 3‘1운동이 확대되고 시국이 살벌해져 가고 있고 고문(拷問)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지속됐다고는 하나 이러한 발언들은 소위 민족을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들의 입에서 서슴없이 터 나왔다니 비통할 노릇이고 분통이 터져 환장할 일이었을 것은 뻔하다.

그래서 더욱이 각오를 한 한용운은 어떤 태도로 일관했을지는 당시 시대상에 나타나는 분위기를 상상해 대충 짐작해 봐도 당당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음은 확연하다.

한번은 한용운의 면모를 잘 헤아려볼 수 있는 재판과정에서 조서에 나타난 판사의 심문과정의 일부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A. 피고는 금번 기획으로 필벌(必罰)될 줄 알았는가?

Q. 나는 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고 있으니 벌을 받을 리가 없을 줄 안다.

A.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Q.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 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단한 조선독립운동 정신에 각인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굳건한 자세로 위에서 밝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사들과는 대조적이어서 견줘 상대의 대상이 못되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위와 같은 진술을 듣고 담당 예심판사는 “아아! 이 소요사건은 억압이나 강압으로는 대충 넘어가지 않겠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하니 한용운의 조국애가 얼마나 사무치도록 뜨거웠고 간절했는지를 알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한용운은 고법에서도 같은 진술을 했고 절차상 피고인에게 주어지는 최후 진술에서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덕(德)에 있지 험(險)에 있지 않다”라며 비상한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어 “옛날 위(魏) 나라 무후(武候)가 오기(吳起)란 명장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던 중에 부국과 강병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며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이 보배라고 감탄했었다”며 설파한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당신이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라 만약 수덕(修德)을 정치의 요체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돼 마침내 패망할 것을 알려두노라”라고 말하고 있으니 복역 중에도 거리낌이 없고 장부다운 기개와 기백을 조금도 잃지 않은 그이다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간수들조차 ‘저 고추 같은 중놈을 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형무소가 생긴 이래 저런 죄수가 있었던 적은 없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한용운은 능히 감옥에 갇혀있더라도 천하를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사식과 보석과, 변호사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의 상좌(上座) 이춘성(李春成)은 당시의 한용운을 이렇게 전하며 쓰고 있다.

“말 말게, 스님의 고집 때문에 더 자신이 고생이 컸지. 절에서 무엇을 만들어 가지고 면회를 가면 ‘이건 뭣 하러 가지고 왔느냐 내가 중들 귀신이 먹다 남은 것을 먹을 줄 아느냐’라며 내던지기가 일쑤였지”라고 밝힌다.

“결국엔 간수들조차 옳은 애기만 하고 따지려하니 나중엔 지쳐서 내버려 뒀어. 그래서 그때 내가 했던 중요한 일은 이분의 사식(私食)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공기라든가 그분이 몰래 써준 글을 밖으로 가져오는 일이었지”라며 “조선독립의 서(朝鮮獨立의 書)를 끈으로 돌돌 말아서 내 손으로 받아왔지”라고 과거의 역사를 피력한다.

감옥에서도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는 일명 ‘조선독립 이유서’라고도 알려져 있어 전문가들에 의해 한용운의 업적 중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 중 하나이다.

원래 이글은 한용운이 예심판사에게 구두 답변을 거부하고 감방에서 쓴 서면 진술로 구성은 조선 민족의 실력, 세계 대세의 변천 그리고 민족자결 조건을 밝힌 조선독립 선언의 이유, 조선총독 정책의 비판, 조선독립의 정당성 등으로 이뤄져 있다.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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