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중)
[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중)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1.08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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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위한 파란, 현실정치 반추
조선 독립선언의 서(書)와 조국애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전편에 이어) 신동으로 태어난 한용운의 큰 걸음

한용운은 1879년 음력 7월12일 충청남도 홍성군 오관리(당시는 홍주목 주북면 옥동이라 칭했음)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난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으로 불렀으며 그의 집은 신동의 집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가 태어난 시기에 다른 이들은 그를 어떠해 평하고 있으며 어떤 인물로 바라보고 있는지 다소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 알아본다.

이에 대해 시인 고은(高銀)은 ‘한용운 평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왕조는 당쟁, 왜란, 기구한 정변의 부패와 심각한 모순들을 물려준 말기의 비극을 만들고 있던 시기로 정권에 가담한 지배계층은 청국에 붙고, 일본에 붙고, 노제(露帝)에 붙으면서 그들이 가진 이념의 형체로 이 땅의 산야와 백성을 착취, 기만하고 있을 때이다.

한용운이 태어난 1879년 8월은(음력으로 보임) 일본에서 옮긴 콜레라조차 이 땅의 전역에 전염돼 많은 백성이 병사(病死)하고 있었을 당시다.

농민들은 수탈당해 굶주리고, 병들어 죽거나 관헌에게 처형되고 있었으며 이 나라는 나라의 지배자에게 농민들이 유린돼버린 것처럼 일본, 청, 러시아 그리고 서구의 외세에 의해 처참해지고 있었다.

한용운이 이런 시대에 태어나서 그의 눈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슬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으려고 민족의 부정형(否定形) 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밝히며 이런 난세, 이런 위기의 시대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 사람됨이 위대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위대성보다 훨씬 위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쓰고 있다.

따라서 고은 시인의 말대로 필자가 이해한다면 그런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당위성과 위대성은 다른 시대의 행운 따위와는 비교될 수 없는 비장한 역경 위에서만 사람과 시대 사이의 형평을 뛰어넘어 ‘내가 나에게서 분리되는 이인(異人)’을 이루기 때문에 조국애와 민족의 악순환을 자신의 뛰는 심장 위에 놓고 앞장서 행동했다는 맥락으로 봐도 무리수는 없을 것이다.

한용운이 이미 10세 때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암기력을 바탕으로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사서와 오경까지 마쳤는데 그의 부친은 이 신동에 대한 기대를 갖고 살아갈 정도여서 큰 긍지를 가졌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유천(裕天, 한용운이 어릴 적에 불리던 이름)이가 우리 가문을 높일 거여”라며 미래에 아들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기를 고대했지만 난세의 흔들리는 기류를 감지한 한용운은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결심과 다짐을 반복한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벼슬을 해 정일품 벼슬이라도 하기를 바라시고 계시나 이런 난세에 벼슬아치들은 백성의 골육(骨肉)을 갉아먹고 대감들끼리는 세(稅)를 뜯어 먹어가며 서로 죽이는 판이고 백성 또한 거칠어 가고 있는 실정에서 벼슬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마음먹는다.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사람의 생각과 방법,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판단으로 누구나 호기로 생각할 일이라 여기겠으나 약관(弱冠)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민족과 조국을 예견하는 비상함은 경탄스러워 감동적이다.

그러나 정치를 하겠다는 수많은 고금의 기회주의자들을 저울에 계량하지 않더라도 과연 누가 더 나라를 직시하고 있으며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던 모습인지 아이러니해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아무리 삼령오신(三令五申)해도 변함이 없으니 그들의 정신과 작태가 한심스러울 따름이다.

실천 없는 말로는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화합과 통합은 그다음이라 해두고라도 공정과 정의를 상실한 분열통치에 온 나라가 갈기갈기 찢어져 헌정질서나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국면전환이 시급해 서로 힘을 모아도 쉽지 않을 판에 적대적 정치로 치달으며 분노와 경멸 그리고 혐오의 적대감만을 쌓고 있는 꼴이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보라! 현세를 비춰 최 윗선을 비롯해 300여명에 육박하는 현 정치인들에게 이보다 더 큰 무엇을 내보여야 하는지 모두는 부끄러운 자신을 들여다보는 근신(謹愼)이 뒤따라야 하며 대오각성(大悟覺醒)만이 최선이라 한다면 부적절한가 말인가? 따지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다.

옛말처럼 ‘호랑이의 등에 타면 무서운 것이 없고 내리기가 싫은 것’일지는 모르나 어디든 함정과 겨냥하는 총구는 누구도 모르게 있는 법이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항상 도사리고 있어서 빠른 판단과 계산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튼 그는 1892년 부친이 정해준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全貞淑)과 일찍이 결혼한다.

그러나 이 결혼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되며 아내보다 녹두장군과 난세에 뒤숭숭한 시국에 더 관심이 많았고 끓어오르는 울분 때문에 술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1894년 여름, 16세 때 그는 부모와 형과 아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나 한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노자(路資)도 지닌 것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태연했다. 서울로 가는 길 방향도 몰랐다. 그러나 모르면 물으면 되니 답답할 것도 없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해는 기울고 발에서는 노독(路毒)이 나고, 배는 주려 오장이 비틀리고, 차마 촌보처럼 몇 발자국도 옮길 수가 없어 길가에 있는 어느 주막에 들려 사정을 이야기하고 팔베개하고 하룻밤을 지내며 생각에 잠긴다.

그제야 그는 ‘이번 걸음이 너무나 무모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의 수필 ‘시베리아를 거쳐 서울로’에서) 자필하고 있다.

그는 집을 나올 적엔 무엇인가 사생결단이라도 내리려고 서울로 가고 있었지만 도중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란 사찰에 도사(道士)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바꿔 선회하게 된 것이 중이 되는 계기가 된다.

만해 한용운, 류환작
만해 한용운의 영정을 화폭에 담다. 류환作.

세계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

그 길로 강원도 인제 백담사로 향하는 한용운은 무슨 연유인지 도사는 만나보지도 못하고 백담사 근처 ‘오세암’에 머물게 되며 이 ‘오세암’에서 중이 되는 과정 가운데 그가 처음으로 맡은 것은 불가에서 불리는 ‘불목하니’ 담당이었다.

대개 처음으로 입산을 하면 누구나 거치는 것으로 밥 짓는 일을 맡고 그 과정이 지나면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오는 불목하니가 되고, 그 다음으로 채공(菜工)이라 하여 반찬 만드는 일을 맡게 되지만 그는 불목하니부터 시작하게 된다.

그렇지만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도 그는 이미 깊은 명석한 두뇌와 수준 높은 한학 실력으로 불전(佛典)을 일사천리로 터득해 나가기 시작해 입산한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스님의 자격을 취득한다.

이와 같은 그는 근대 중국의 선각자 양계초(梁啓超)의 문집 같은 외서(外書)도 닥치는 대로 섭렵하게 되는데 이러한 외서들의 탐독은 그의 시야를 세계로 향하게 만든다.

강원도 깊은 산골 절간에서 외서를 읽다가 그는 문득 우물 안에서 바깥세상을 보듯 세계일주를 꿈꾸기 시작하는데 이 꿈은 머릿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당장에 실천으로 옮긴다.

입산한 다음 해 봄, 서울로 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도 아무 말 없이 떠나온 것처럼 ‘오세암’에서도 아무 말 없이 절을 나와 버린다.

그런데 이 세계를 향한 첫걸음은 주머니에 지닌 것이 없으니 무전 세계일주가 될 수밖에 없어 마치 해초처럼 그도 흘러 흘러서 세계를 일주하겠다고 마음먹었다니 이게 보통 다짐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싶다.

그러나 그는 이때의 계획도 그가 쓴 ‘북대륙의 하룻밤’에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을 짧게 소개하자면 이렇다.

‘어느 날인가 경성에 와보니 기대하던 세계의 지리와 사정에 대해 대강이라도 체험담을 들을 곳이 없었다. 나의 교제가 넓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이겠지만 실로 세계적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적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리해 나는 지도와 문자로만 본 것을 기초 삼아서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가까운 러시아로 먼저 가서 배를 타고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하기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실제를 실천에 옮긴다.

그는 경성을 거쳐 원산으로 가는 도중 여행길이던 승려(僧侶) 두 명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마침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으로 물건을 사러가는 승려들이어서 그는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일푼인 그는 무전으로 떠나는 초행길이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원산에서 해삼위로 가는 기선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해삼위는 독특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동방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유배지에 불과하던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있던 중으로 인력이 모자라 두만강 건너 북관(北關) 농민들의 유입을 종용하며 소위, 러시아의 정치가이름을 딴 ‘무라비요프 이민법’으로 조선인들에게 사회적 혜택까지 베풀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귀화인들에게는 러시아 사람들과 동등권을 부여하게 되는 참이어서 알게 모르게 조선인들이 해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조선인들이 해삼위를 몰려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발각되는 자는 효수형(梟首刑)에 처했지만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가 독특한 한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한인 사회에는 질서와 법도 없었고 약탈, 살상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면으로 일본에 대해서는 강렬한 원한을 가지고 있어 경계심을 높이고 있었다.

이를테면 단발은 일본의 적(敵)이라 하여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이 나타나면 거침없이 죽여 없애버릴 정도였다.

한용운 일행이 해삼위에 도착했을 당시는 바로 그런 분위기가 러시아에서는 만연돼 있었을 때였고 이들은 승려로 삭발을 하고 있는 관계로 당장에 첩자로 오인됐다.

그래서 그들은 더이상 거기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고 처형 직전 기지를 발휘해 구사일생으로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 개화기 청년 한용운의 무한한 꿈은 빛을 보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변절자를 장례하고 화형하다

고국에 돌아온 한용운은 석왕사에 잠시 머물러 있다가 그의 고향 홍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고향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의 가문에 비참한 몰락뿐이었다.

홍주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의 위난 속에서 그의 부모, 형 내외는 물론이고 어린 조카까지 마침 짐승처럼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다행이 그의 처는 친정에 가있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는 있었지만 오갈 곳이 없게 된 그는 처를 만나 처가에서 7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게 된다.

그가 3·1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은 7년 동안의 처가살이를 끝내고 다시 중의 신분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한용운의 청죽 같은 성격과 독립에 의지가 잘 드러나는 사건으로 조선이 낳은 천재, 육당 최남선(崔南善)의 관계가 가장 유명하다.

3·1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은 정작 민족대표로서 서명하는 것을 기피했고 나중엔 변절해 일본에 협력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더해서 1930년대 후반에 최남선은 그의 장서를 총독부에 기증하고 만주 건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용운은 그의 동지들과 친구들을 ‘식도원’이라는 요리집에 초대해 놓고 최남선의 장례식을 거행하게 이른다.

“이제부터 왜인에게 종노릇을 자처해서 조선의 의기로부터 떠나서 죽은 고(故) 최남선의 장례식을 거행하겠습니다”라는 한용운의 느닷없는 최남선의 장례식 선언에 초대된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만다.

그러나 한용운은 태연하게 최남선이라고 쓴 소지(燒紙)를 불에 태워서 화형을 한다. 그리고 “자아, 이제들 장례잔치 음식을 드십시요!”라고 말하고 그는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용운의 뜻밖의 행위에 충격을 받았으나 뒤늦게 사실을 안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류엽(柳葉)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만해는 그 때 비분강개(悲憤慷慨) 하셨지. 그리고 육당을 장례지내고 맑은 기운과 표정으로 술을 마셨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어느 날 경성시내 파고다공원 인근에서 한용운은 그가 장례를 지낸 최남선과 마주치게 됐다. 한용운은 최남선을 보자 침을 퉤퉤 내뱉으며 외면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러자 최남선이 따라와 “만해 오랜만이올시다”라고 말을 걸자 한용운은 “당신 누구시오”라고 싸늘하게 응수하며 “그 사람 벌써 죽은 사람이지 장례까지 지냈으니”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까지 하는 한용운은 부모형제를 잃고 궁핍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돼 황망함의 연속이었지만 한 치의 의지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꿋꿋하고 당당하게 거칠 것 없이 세상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한용운처럼 초지일관 독립적인 의지를 간직하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처럼 모든 걸 불사르며 이 땅을 지켜내 온 의인(義人)도 드믈 것이라는 견해로 숙연해진다.

많은 사람이 변절하고 그 외도 숱한 독립지사들이 슬금슬금 일본에 무릎을 꿇으면서 협력자로, 변절자로 변해갔어도 그는 일본을 끝까지 저주하며 독립의 꿈을 간직한 채 독립운동가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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