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하)
[평설] 만해, 한용운의 애국정신을 돌아보다(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1.12 0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국 위한 파란, 현실정치 반추
조선 독립선언의 서(書)와 조국애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중편에 이어) 침묵 속 마지막이 된 심우장(尋牛莊) 시대

이렇게 시대를 앞질러 의협심으로 강인함을 보이며 선두에 있던 한용운은 55세 때 충남 보령출신의 유숙원(兪淑元)과 재혼을 하게 된다. 결혼할 당시 유숙원의 나이는 36세로 전성당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숙원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그 병원장 노모가 설득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한용운은 이 결혼을 친구들에게 알리지 않고 둘이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고 유숙원을 데리고 간 곳이 돈암동의 신흥사였다. 우물에서 정화수를 한 그릇 떠다가 대웅전 법상(法床) 위에 올려놓고 향을 사르고 촛불을 밝히며 합장하는 것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1933년 한용운의 두 번째 결혼식이 시작된 것이다.

간소한 살림살이가 마련된 집은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으로 한용운이 본인의 집을 심우장으로 명명하고 부르던 그곳에서 그는 죽기까지 10년 동안을 살았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그 시절을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 시대라고 불러 전해오고 있으며 이 집도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하게 됐다.

이 심우장을 지을 때도 한용운의 저항정신의 영향으로 원래 설계자는 집 방향을 정남향으로 설계했는데 그는 그 반대로 지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정북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유는 집을 정남향으로 지으면 조선 총독부 청사 쪽이 보인다해 집을 정북향으로 주춧돌을 놔야 직성이 풀려 총독부 청사와 평생 등을 지고 살아가겠다는 그의 신념을 꺾는 이 또한 없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 딸 영애와 영숙이 있지만 딸들도 보통학교에 취학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늦게 얻은 딸들을 무척 사랑했으나 보통학교에 들어가면 일본교육을 받게 돼 스스로 딸의 교육을 집에서 천자문과 소학(小學)을 가르쳤다.

이따금 딸이 신문에 나온 일본 문자를 가리키며 물으면 “그건 몰라도 된다. 그 문자는 글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니 일본에 대한 저항은 누구보다도 남달랐을 것이다.

또 왜인들의 통치하에서는 호적도 올리지 않겠다고 해 끝까지 호적도 없이 살아왔다는 점 등등을 보면 그의 극단적인 배일 감정이 어떠했는지 일면도 명료하다.

한용운은 일본이 결국 패망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끝내 일본의 패망은 보지 못하고 1944년 6월29일 아내와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파란 많은 세상을 몸소 스스로 실천해 간 고단한 인생을 접고 심우장 자택에서 조용히 입적에 들고 만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향년 65세)

속명은 유천이며, 득도 때 계명은 봉안이고, 법문은 용운이며, 법호는 만해다.

실로 대단했던 운동가의 꼿꼿하고 대쪽 같은 삶의 언저리에 드리웠던 암울한 시대를 앞당겨 살아온 그의 궤적을 살피는 것도 필자로서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위업을 조망해본다는 점에서 숙연해지고 마음속 가득 벅차오르는 전율을 재차 체감한다.

오늘날 만해 한용운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역사적인 증인이자 촌철살인 같은 전인(全人)으로 평가받는 것 또한 마땅하며 혁혁한 공적과 그 빛은 췌언(贅言)을 요구하지 않으리만큼 눈부시다 하겠다.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학식으로 숱한 글들을 언론과 문학지, 불경 등을 통해 발표해 그의 유명한 시(詩)들이나 글도 수 없지만 그중 빼앗긴 조국을 노래한 ‘님의 침묵’ 등등의 시가 모두에게 필독이 되고 있는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1925년 간행된 시집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현대시 문학사상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집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뚜렷한 고전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떠나간 ‘님’(조국)을 애타게 부르는 그의 구성진 사설체적인 가락에서 독자들은 나라 잃은 설움의 통한을 하염없는 서정과 서글픈 슬픔의 뒤편들을 활자로 그리는 몽환의 그림 속 상상으로 인간(님)을 주제로 자연을 통해 의인화해 뭉클토록 가슴을 적셔오게 하고 있다.

이를테면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는 눈이 멀도록’ 님을 그리워하며 갈구한다.

특히 작품에서도 인간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어 외향적인 때의 반면에 내면적인 다정다감한 일면들을 시(詩)속에도 진하게 녹여내고 있는 것이 권위주의를 부정하는 행동과는 상이하게 자신의 정신적 지주의 저변을 수준 높게 그려낸다.

더불어 서정의 밑바닥에서부터 연면하게 자아내는 그의 조직적인 시어들은 우리 민족의 한(恨)으로부터 소환시키며 가슴 밑 아프도록 정겹고 한없는 정서의 포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갈증을 풀 듯 양손으로 한 움큼의 시냇물을 떠 올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주시하다시피 불교계에서도 혁신불교, 대중불교를 외친 한용운은 근대 한국이 낳은 명승이었고 고사(高師)였다.

이조 이후 퇴폐일로만 걷고 있던 이 나라의 불교계에 그는 파천황(破天荒)의 불씨를 던져 한국불교의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코자 노력하는 등 선문(禪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는 1913년 ‘조선불교 유신론’이라는 명저를 내놓아 세인을 놀라게 했다.

또 그가 ‘조선독립의 서’에서 밝힌 33인의 한사람으로서 조국독립 운동에 신명을 바친 그의 충정과 애국, 애족심은 서릿발 같은 지조를 지켜가며 꺼져가는 조국의 등불을 간수하던 그의 실천적 행동은 첨예해 차라리 싸늘하기까지 하다.

이와 같은 그의 조국에 대한 이념과 사상은 동시대 지식인은 물론이고 대대로 내려오는 이 땅의 주인공들에게 그가 갈아놓은 시퍼런 칼날에 번뜩이는 불빛은 영원히 살아남아 지금도 가슴 가슴속 조국을 위해 펄럭이며 결기를 세우고 있다.

나가기 전에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중에서 시가 많은 것으로 독자들은 알겠지만 상당의 시조도 다작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조 1편을 옮겨 풀이해 본다.

풍란화 매운 향기 당신에게 견줄손가

이날이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런가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이 역시 민족과 조국을 염두하고 읊은 -풍란화- 전문 시조다

심산(心山) 깊은 산속 외롭고 한적한 곳에 외로이 피어 있는 풍란화(風蘭花) 그 향이 멀리 퍼져 오래가 맵도록 향기로운 민족이 당신(왜놈)과 견줄 수 있겠느냐 해 풍란화를 조국으로 은유한다.

조국을 찾는다면 청렴결백하도록 빛나는 별도 빛을 발할 것인데 불토(佛土, 부처가 사는 극락정토)도 한번 불의 부정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칼날 같은 영혼이여!라며 별을 통해 이상세계를 예인하고 미래실현을 추구해 보인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느니 민족을 상징한 혼(魂)이여 돌아오소서. 애원하듯 심상을 풀고 있어 자신의 기원과 성품을 그대로 환치시키고 있는 작품으로 유추된다.

이것이 곧 꼿꼿한 난(蘭)의 정신이자 그의 올곧은 기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음이 확인돼 지는 부분이다.

나가며

흐르는 물은 세월을 껴안고 흘러 그의 애 섧었던 마음 어디쯤에 흘렀을까?

신동으로 태어나 정처 없이 떠돌다가 영육을 불사른 슬픈 역사의 수레바퀴 자국에 선명히 남아 있는 청죽 같은 푸른 혼(魂).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서 고동치는 심장에 두 손을 얹어 두근거리는 의식 위로 포개지는 이념들을 껴안고 ‘피는 물보다 진한 핏방울의 혈맥’들을 인지해 평화, 평등, 화합, 정의를 부르짖던 조국애의 사명으로 꿈틀거리는 갈망의 핏줄을 어김없이 높였던 만해, 한용운

그가 바라보는 누구나 가져야 하는 인간의 내면적 자유는 사회적으로 표현될 때 비로써 각 개인들도 서로의 자유권을 존중하고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야 말로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민주적인 자유의 원칙이어서 변절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터이다.

결국 자기의 자유를 넘어 민족적 자유를 찾아 보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그가 의식 속에 자리한 확고한 이념으로 자유의 성질이 침해받았을 때 비로써 밖으로 화산처럼 솟구치게 되는 의식 있는 소유자로 조국을 지키려 했던 혁명적인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그의 대표적인 시(詩) ‘님의 침묵’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그야말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