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견지명(先見之明)과 오합지졸(烏合之卒)
선견지명(先見之明)과 오합지졸(烏合之卒)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2.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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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탈현상 상황판단 상실 유감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요즘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가관(可觀)이다.

이는 점잖은 표현이다.

자기들 맘 대로라서 쥐락펴락 이놈의 짓들을 도무지 어쩌자는 건지 끄트머리까지 불을 켜고 지켜볼 일이다.

국민이 주권이라고 당연한 것을 강조해가면서 정녕 주권의식은 어디에 있는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려도 겨울한파로 몸 시린 얼음 속으로 숨어버렸는지 아니면 두꺼운 외투 속에 숨었는지 한때 평화를 상징하던 천덕꾸러기가 된 비둘기 떼만 바닥과 전깃줄을 오가면서 먹이를 찾고 있을 뿐이다.

이따금 보이는 것은 마스크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곤 보건소 앞마당에 추위를 견디며 비대면 속 감염 바이러스 검진을 받으려 줄을 서서 텐트 안으로 하나둘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전부다.

사람이 사라진 거리는 거리마다, 골목마다 폐업·임대·휴업 등을 알리는 싸늘하고 냉랭한 을씨년스러운 차가움만이 여기저기 눈에 띨 뿐 살아있는 도시의 온기라고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쓰레기더미 밖에 찾아보기 힘들다.

마치 무엇인가 한차례 큰 이변이 일어나 모조리 휩쓸고 간 뒤에 남아 있는 황망함만 후유 같이 죽어가는 폐허의 도시를 방불케 하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온통 들이어져 있다.

진작부터 민심들이 부르짖던 사회 전반에 흐르던 기류 속 키워드 중 하나로 ‘이게 나라냐’고 항변하며 국민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바이러스 핑계가 딱 좋은 억지춘향 그 후의 일변들이다.

이는 현실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오류를 낳은 판단으로 현 정부의 무책임이 국민 가슴에 상처를 주고 가뜩이나 열 받는 서민들의 혈압을 올리고 있는 것들로 가일층 사건사고가 차고 넘쳐서 이 이상 더 큰 문제가 어디 있겠나 싶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밝힌 대로 나라를 맡겨놨으면 어떤 일들이 터지기 전에 이유를 정확히 파악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대처해가며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정치의 정도일 것이다.

하물며 ‘하는 척’이라도 한다면 국민도 합세해서 너도나도 앞장서 어려움을 극복해 나아가겠지만 현실에서는 모두 고개를 외면하고 고함을 부르짖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나라에 돈이 없어 경제의 위험이 국가의 위험으로 봉착해 난리가 났을 때 모두는 아이들의 돌 반지부터 결혼예물까지 팔아서 IMF를 극복해 나갔듯이 너도나도 자처해서 힘을 보탰다.

허나 코로나시대를 맞아 경제위축, 부동산 버블, 외교 붕괴 국가위기설 등등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지만 현 정세를 보아 누가 같이 함께 가자고 어깨동무를 할 것이며, 스스로 자력의 힘을 보태 맡은 바 열심히 극복에 동참할 이 누구며, 돌아가는 꼴을 보고 누가 고함을 안 지르고 원성을 터트리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유를 묻고 있는 거다.

서로 잘나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면서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읍소도 뻔뻔하게 명함을 뿌리고 악수를 자청하고 길거리에는 개조된 트럭의 마이크 소리와 교차로마다 아르바이트 하는 이들을 앞세워 유니폼을 맞춰 입혀놓고 오가는 이들에게 90도로 인사하며 받드는냥 가증을 떨지 안았는가?

거기에도 모자라 최저의 생계인인 상인들이 모여 배고픔을 팔고 있는 시장을 찾아다니면서 꾸벅거리며 오뎅이니 떡볶이니 주워 먹는 척하다가 이미지 선거홍보용 사진찍기에 도취돼 의기양양 알량한 너스레를 떨던 때가 언제였는지 자문들 해보라.

그때 수많은 정치인이나 국회에 입성하고자 했던 그 많은 이들이 공약으로 내걸고 자화자찬하던 편안하고 살만한 파라다이스가 돼 있는지? 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더위에 시달리고 추위에 떨며 푼돈으로 연명하는 시장 상인들의 입장은 조금이라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돌아보라.

자영업자들은 물론 모두는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살기 어렵고, 힘들고, 사람들마저 드물어 장사가 안돼서 지쳐 죽을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모든 업종의 절규가 안 들리느냐 말이다.

오로지 국회만 입성하면 마치 상좌에 오른 최고인양 거드름과 건방이나 떨면서 지역을 위해 봉사하겠다던 가증스러움 마저 물 말아 먹고 많게는 7~9명까지 보좌진과 운전기사, 수행비서, 무슨 담당관 등등을 거닐고 다니는 돈 먹는 하마 떼들이 아닌가.

여기에 가용되는 세금이 한 달에 몇 천만원에서 몇 억원씩 거의 300여명에 육박하는 금배지를 단 하마 떼들 대다수가 가난하고 배고픈 국민의 혈세를 주사기로 헌혈 봉지에 피 뽑아가듯 하면서도 도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냐고 국민은 따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만 살펴봐도 아니, 솔직히 살펴보고 싶지도 않지만 누구누구 미투의 사건으로 비화되는 몹쓸 짓으로 불거진 지방단체장들의 해이는 물의를 일으킨 정도로 벗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말할 수도 없으며 셀 수가 없을 지경이 아닌가.

아무리 강조해도 바뀌지 않는 매한가지로 혼탁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요즘 우리 국민을 가장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만든 일련의 사태들을 온 국민은 지켜봤고 분노와 적대감을 안기는 것을 모두는 똑똑히 느껴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정치인들과 장관 그리고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가히 막무가내식도 유분수로 탁한 물은 흘려보내고 맑은 물은 끌어들이기는커녕 천지가 진동하는 ‘경천동지’할 노릇으로 사실이라면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지 겨울빛 하늘마저 노랗다.

일부지만 대표적으로 손혜원, 윤미향, 조국, 추미애 등의 일그러진 모습들을 보면서 국민은 자중하기에도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는 것으로 멈짓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번엔 대통령과 김정은의 도보다리 대화에서 USB 전달을 놓고 야당이 제기한 북한원전추진 의혹과 산업부원자력 등이 문제돼 국민의 긍금증을 무엇으로 입증하려는 건지 각 당마다 모두 다 까자고 달려들고자 상호 격앙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추임새다.

최고의 이슈로 이적행위로까지 해석될 수 있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USB의 전달과 산업부 문건이 최대사건으로 터지고 말았으니 다시 강조하지만 진실이라면 이성을 잃은 통수권자여! 그대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구시대적 유물 정치’라고 한 만큼 대통령은 국민에게 어떤 모습으로 대답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우리는 누구이고 이 나라는 무엇인가?

누구든, 무엇이든, 어디이든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며 진실은 늘 옳음을 지향하게 마련이어서 구시대 유물이든 아니면 현시대 신물(新物)이든 영원하지도 더욱이 요원하지도 않아 금방 드러나게 돼 있는 것이 순리이고 이치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고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도 대통령이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역사관이나 인간사나 모두가 그렇게 간단하지도 그렇게 쉽지도 않거니와 이런 착각은 해서도 있어서도 안 되는 금물(禁物)로 첨병(添病)이 되기 쉽기 때문에 두드려도 한참을 두드려야 될까 말까 한 일이다.

그네들이 말하듯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이라 한다면 그 생물은 아무리 땅속에 파묻어 놓은들 때가 되면 세상을 향해 꿈틀거리고 손짓하며 어둠 속에서 햇빛을 찾아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릴 수는 있지만 두 손으로 세상을 가릴 수는 없다.

오히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모습이 호수에 비추게 돼 있으니 권선징악만이 뒤따를 뿐이다.

어디든 불법, 탈법, 위법, 가식, 거짓, 허위, 속임수, 위장술, 가장묘수, 등등 모두 지나침이다.

절차와 방법상 준법을 지켜야 해서 정당성을 거치지 않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애기로 전통과 위계, 선례를 깨트리는 오합지졸(烏合之卒)로 결국은 불성(不成)하게 되는 섭리를 따르게 된다.

따라서 여기엔 한마디로 말한다면 떳떳함이 없어 선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하극상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고, 또 이에 면죄부가 성립되지 않기에 누구라도 굴복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아 진실과 도덕과 인간만이 땅바닥으로 추락하듯 곤두박질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해진다는 말이다.

기실 ‘위장된 선의보다 솔직한 악의가 낫다’라는 말이 이따금 공론의 장에 등장하게 되는 것은 ‘꼼수의 묘수가 악수가 된다’라는 것에 교훈을 주기에 시사하는 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간혹 내 인생이려니 하고 나의 혼자의 삶쯤으로 생각하고 착각에 빠지는 것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

판단은 혼자 할 수 있지만 행동은 정해진 법률을 따라야 하며 이를 실천하지 않을 시에는 끝까지 불의가 따라 다니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며 나 홀로는 도저히 사회에 존재하기가 어렵다.

이는 석가와 예수가 부활해도 그렇고 공자, 맹자가 지팡이를 짚고 구름타고 찾아와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고 타일러줄 것이다.

그래서 더불어 모이게 되나 둘 이상이 만나면 침묵은 이내 깨지게 돼 있고 비밀은 누설되게 마련이어서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우주의 이치요 인간심리에 들어있는 소우주의 법칙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올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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