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종착지에서 찾는 화두
생의 종착지에서 찾는 화두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2.11 1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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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놓음으로써 올라가는 절제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어느 유명 예술인의 아름다운 선택

그날은 필자의 작업실에 제자들이 찾지 않는 날이어서 토요일, 일요일 양일간 조용히 들어앉아 그림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으니 일요일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때가 아마 지금의 기억으로 2019년도 11월 어느 가을 일요일로 기억된다.

중구 태평4거리 서대전역 인근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 틈틈 아이디어를 핑계로 안주도 없이 소주를 마신 탓에 몸도 무겁고 머리도 아프고 해서 저녁시간 어둠이 오기 전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려 밖으로 막 나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느 노신사 한 분이 필자의 작업실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며 “여기기 혹시 류 작가님 작업실이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한 손에 노란 봉투를 들고 있는 그는 중절모를 쓰고 얼굴엔 희끗희끗한 수염이 덥수룩한 채 다소 나이가 들어 보였고 비교적 점잖아 보이고 단정한 차림새이었으나 이내 느낌으로 예술가라는 것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떨 결에 “예, 그렇습니다. 어서 오십시오”하고 악수는 나눴으나 순간 도무지 이름도, 누누인지도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한번 얼굴을 상기해 보며 어디서 보았지 하고 속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작업실과 이름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온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그이는 필자를 알고 찾아온 분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얼른 소파로 안내한 후 잠시 2~3분 커피물이 끊는 동안 누구였던가를 빠르게 유추해보면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분도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악수를 나눈 뒤라서 이미 내가 본인을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녹차와 커피를 탁자에 내려놓는 순간 기억에서 반짝하고 고속열차가 승강장에 멈추듯 그때 그 시절이 와르르 떠오르며 과거 이미지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래 맞다! 그제야 형상이 그려졌다.

이분이 바로 몇십 년 전 대전의 M대학에서 미술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제직하면서 후배들을 양성했었고 필자와 굵직한 예술제개막식의 같은 무대에서 몇 번의 행위예술을 실연했던 이 모 박사님으로 한국미술계에서는 대단히 유명하신 거목이었다.

그런 것을 잊었다. 순간 얼버무리는 어색함, 낯 설음, 반가움, 부끄러움 등 여려 감정이 동시에 떠올라 죄송스러우면서도 흐르는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 서로 나이를 먹어 간다는 사실을 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 번 같은 예술제에서 뵙기는 했지만 그때는 한참 행위예술을 하던 다소 젊은 모습으로 수염도 기르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을 때이니 그때의 얼굴과는 전혀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첫 시선에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덥수룩한 수염과 중절모자를 쓰고 있었고 안경도 예전 것과 바뀌었으며 깨끗한 양복 차림새와 많이 변해있는 외모에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솔직히 쑥스러웠다.

비로써 선생과 필자는 말문을 트며 지난 이야기와 근황들 그리고 작업과정 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화 중 “오늘 친척 중에 조카뻘 되는 일가가 대전에서 결혼식이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들과 술 한 잔씩을 하면서 광주까지 가는 열차를 예약해 놓았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밤 10시30분 열차를 예약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시간이 한참이나 남아 필자나 보고가자는 마음으로 작업실이 서대전역 바로 옆이라는 것을 알고 대전에 올라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갈려고 후배에게 물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고마운 말이었다.

행여 불편하진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들어 “작업실을 환기도 시키지 않아 담배냄새와 캔버스에 물감냄새가 섞여 쾌쾌한 냄새와 붓이며 물감들과 소주병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산만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중이라서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선생은 작업실 환경엔 아랑곳 않고 너무도 편안히 앉아 녹차를 마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것은 본인도 매일 반복하는 생활과 삶의 일부로 일상이 돼있어 자연스러운 사소한 부담은 덜 수 있었다.

식사 여부를 묻자 “식사는 금방하고 오는 터라서 됐다”라며 “작업 열심히 하네요”라며 두리번두리번 몇 번을 작품을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냐”고 물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지난 시절을 서로 답하고 응수해 가며 선생과 너댓 시간을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길에 봉투에 들고 계시던 전시도록과 작업실이 그려진 명함 한 장을 주고 ‘연락하자’며 열차시간에 맞춰 광주로 내려갔다.

그때 나누던 이야기가 가슴속에 다가와 그날 집으로 향하는 필자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분도 상쾌해져서 좋았다.

이튼날 선생과 전화통화에서 오히려 힘든 과정과 역경을 참고 버텨가면서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겸연쩍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바람에 전화통화 중 감사하다는 말만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작업실에서 대화도중 말씀하시는 내용들을 듣고 필자도 같은 길을 걷는 입장으로 많은 부분에서 감탄과 교훈을 줘 후배로서 본받고 실천에 따라야겠다는 것을 절감했다.

선생은 일찍부터 한국의 행위예술계 1세대로 우리의 행위예술(퍼포먼스)을 정착하는 선두에 서서 앞장서온 작가로 대학을 막 퇴임하고 드로잉 퍼포먼스와 일치하는 눈부신 활약으로 줄곧 이어 실연한 신체드로잉 시리즈의 대가였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실험예술과 더불어 드로잉, 평면(서양화), 설치, 영상(미디어), 행위예술 등 총체적인 미술 분야의 작품들을 폭넓게 활동, 발표하면서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작가로 국내외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분으로 모르는 미술인들이 없을 정도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작가였다.

특히 선생은 70년대 당시만 해도 한국 서양화단에서 서양화의 다양한 작품들은 유학파 교수들의 지도하에서 서양화 교육을 받았으나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베끼기가 만연했지만 선생은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독창성으로 앞서나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양화는 완벽하게 베끼기 식의 색감과 붓의 터치만을 담아내야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개성과 자유스런 표현을 잊은 채 따라서 그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겨 회의감과 자존감을 통감하면서 적잖은 갈등을 가졌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자신만의 신체드로잉인 행위예술을 통해 편견과 답습의 관념을 깨는 교수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재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작품보다는 작품의 의도나 과정을 하나의 예술로 판단하는 것으로 미니멀 아트(Minimal Art) 이후에 생겨난 현대미술의 한 가지의 장르로 개념미술(Conceptual Art) 쪽에 가까운 예술을 더 선호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선생은 대학에서 퇴임하자마자 국내외의 굵직한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 등의 예술제에 참여해가며 개성적인 색깔을 찾는 작업을 매진했었다고 술회하고 있었다.

또 시간이 날 때마다 유럽 곳곳의 유명화가들의 본고장과 미술관을 둘러보며 내린 결정은 조용한 시골에 들어가 본인의 작업에만 몰두하고 매진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내린 결정으로 지금의 작업실이 있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로 낙향했다.

그런데 얼마도 지나지 않아 선생의 유명세를 알고 여기저기서 지인들을 통해 연락이 오더라는 것이었다.

누구누구의 소개를 받고 전화했다며 ‘우리 지역의 미술관장직으로 모시겠다든가, 미술에 관계되는 회장을 맡아 달라든가, 무슨 단체를 창립하자라든가, 원로단체에 가입해 이름을 내세워 달라 등등의 많은 유혹이 있었다고 했다.

극구 사양을 하자 어느 날인가 여럿이 구석진 산 밑자락 작업실까지 찾아와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몇 차례 수락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결정한 이상 ‘미안하지만, 본인 작업에만 몰두하여도 시간이 없어 맡을 수 없으니 돌아가 달라’는 얘기에 어느 분들은 ‘거만하게 논다’는 등 뒷이야기도 많았지만 ‘사양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특히 ‘대학에 몸담아 있을 때 여러 가지 구상과 계획만 세워놓았던 평면(Painting)과 설치미술(Installation Art) 작업을 미뤄오던 것을 더 나이가 들어가기 전에 작품들을 완성해 인생의 마지막쯤 그럴 뜻한 전시를 한번 가질 계획을 갖고 있던 터라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4년 만에 작업을 완성해 경상북도 도립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해줘서 지역의 언론과 방송은 물론 중앙의 언론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만큼 조명돼 많은 이들이 찾아와 성황리에 전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며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 자신과 약속했던 결정을 미루고 타인들의 요구에 따랐다면 지금처럼 나이 먹어서 뒤로 밀려났을 텐데 그럼 난 오늘 분명히 후회할 테고 자신을 위해 이룬 것이 없어 행복하지 못했을 거라 말하며 흡족해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학의 교수로서 역할과 의무를 다해 미련이 없었으며 더이상은 자신을 작업을 위해서라도 미혹에 현혹되지 말자라는 다짐으로 예술가로서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고자 여러 권유와 요구를 거절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절제로 탐욕에서 오는 과욕을 멀리해가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욕한 마음으로 화면(畵面, 캔버스)을 대하니 청정한 작품으로 전이돼 그때의 작품들이 가장 마음에 들고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음을 비우니 좋더라 하며 선배 화가로서 우리에게 이 다음을 알려주는 바 큰 체험과 경험을 부여해줬다.

이런 분들은 드물지만 교훈적이어서 파장이 깊고 울림이 넓어 비교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노욕 때문에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이들도 많아 구분이 쉽게 표시나기도 한다.

지난 2006년 부총리를 끝으로 정계에서 일체의 모습을 감춘 정치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강원도 고성군 작은 마을산기슭에 농가주택을 손수 지어놓고 조용히 별빛과 달빛 속에 은거하며 행복한 웃음과 건강을 일구는 이가 있다.

지금도 부인과 함께 300여 평의 텃밭에 각종 채소와 과실수를 가꾸며 천천히 살아가는 바로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가 그이다.

최근 그는 어느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15년 귀거래사의 소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서울에서는 정치도 너무 가깝게 있어 눈에 보이고 찾는 이도 더러 있을 터 다소 유혹도 뒤따를 것이니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앙앙불락’했을 것”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삶은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도 짐이 되니 모든 게 무욕해 상관할 필요도 없고 뿌리 깊은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될 수 있어 자유로우니 뭣이 걱정이냐”며 자연과 무욕이 주는 행복을 찬미하고 있었다.

그는 “농번기에는 내 식량이니 조금씩 땅 일궈 먹을 만큼만 가을걷이를 해놓으면 글 쓰고 독서하며 음악이나 듣는 무욕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편안하다”고 말하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요즘처럼 이렇게 퍽퍽한 세상살이에 정도를 걷고 있는 이분들의 삶이 특별하게 보이는 이유는 저 자연 속 석양에 지는 노을이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어서 거스르지 않는 정도가 수평선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고프면 식사하고, 잠이 오면 잠자고, 때가 되면 적당히 일하고, 공부하고 싶으면 책보는 자연스런 삶의 한 단면은 순리를 따라가서 여유롭고 어디에도 연연하지 않는 심성이 흙빛을 닮아 그렇다.

그런데도 왜 이들이 선택하는 평범한 삶이 우리 맘속 심지에 불빛을 밝히며 새삼 눈길이 가게 되는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금 너와 나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는 불편한 현실에 갇혀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는 각박한 이기주의가 팽배한 바쁜 삶을 쫒아가며 뒤돌아 볼 줄 모르는 것에서 이들의 마음은 넉넉한 삶의 지혜와 방식들을 실천하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절재하지 못해 탐욕이 부른 참사

이런 반면 최근 참으로 부끄러운 일로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을 지켜야 하는 법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과 함께 낯 뜨거운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 5일에는 삼권분립을 스스로 무너트린 김명수 대법원장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가 여는 본회의에서 법원장으로서 거짓말로 일삼은 사실이 드러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5월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를 면담하면서 “국회에서 탄핵을 하자고 설치는데(사표수리) 수리를 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하잖아”라는 내용 등등이 담긴 녹취록과 음성파일이 공개돼 상상 이외로 여기에 끼치는 영향들이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 대법원장이란 사람이 거짓을 밥 먹듯 해 전날 국회와 언론에 해명한 내용이 하루 만에 모두 거짓으로 밝혀져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과욕이 국내외 부끄러움과 치욕스런 수치를 주고 있어 향후 이 일들에 대해 적잖은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 그를 탄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사실상 법률을 방조했다는 지적과 함께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야 하는 수장이 삼권분립을 자처해서 걷어찼다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대통령탄핵과 함께 또다시 탄핵문제가 불거지자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하다”는 간단한 한마디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어서 어안이 벙벙할 뿐 말문을 잃게 한다.

모두 왜 이러는 것일까? 경우에 맞지 않는 행각들은 결국 자신들과 주변인 모두에게 초라함만 남기게 된다는 것이 자명할 텐데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이냐고 따지고 있다.

법을 지키기도 모자라 자신들이 들고 있는 계란바구니가 깨질까 두려워 감싸 안아야 할 전 법무부장관이나 판사들의 우두머리인 대법원장이란 사람들이 왜 이를 연이어 흔들어 대며 막말을 퍼붓고 거짓말을 일삼아 말썽을 부리고도 뭐가 아쉬워 이를 내팽개치며 제멋대로 인지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유분수란 지적과 함께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가뜩이나 코로나19 시국으로 1년 넘게 시달려 피곤에 지친 국민에게 더 이상의 참담하고 고통스럽게 누적된 피로감에 산성비 같은 소나기를 퍼붓지도 말고 또 비굴한 모습으로 연명하지도 말고 본인 스스로 과오를 뒤돌아보며 깨끗하게 거취를 밝히고 사퇴해서 올바를 정도를 가는 것이 마땅할 테다.

이러한 거짓이나 지나친 아집의 특별한 행동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절제되지 못한 욕망과 탐욕으로 어느 집단을 헤치는 것을 물론 자신의 자만을 부치기는 탓이 큰 이유로 절제되지 못하는 착각이 부르는 망각이 분출돼서 그렇다고 보여진다.

세상은 이치와 정도의 중심에서 상호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살아가기 마련이고 직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깊을수록 국민과 미래를 위해서라도 상층에서부터 자중해야 하며 때로는 뒤로 물러설 때를 알아서 물러서는 것도 배려이고, 겸손이고, 미덕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겸손과, 배려와, 미덕을 뒤로하고 어떤 일이든, 어떤 자리든, 부른 사람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얼굴을 디밀어야 속이 시원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집단을 무시하고 관례나 선례를 내팽겨치고 자리를 꿰차서 맘대로 주무르려는 잘못된 습성들로 일관하는 노욕은 지나치게 탐욕으로 얼버무려져 몸을 버리고 목숨을 저버리는 후진적 감각과 그릇된 판단을 면치 못하는 이들과 한발 나아가 이를 부추기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기에 그러하다.

특히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조용한 거취나 침묵해야할 입장에선 사람들마저 탐욕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경구를 되새김해야 하는 사실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국회의장까지 지낸 어느 분은 골프장에서 손녀 같은 캐디에게 몹쓸 손짓을 했다가 그나마 괜찮다는 정치인의 평가를 받아오던 순간을 엎질러버려 그야말로 행색이 초라하기 그지없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평생 법조인으로, 만인의 삶을 저울질했던 전 대법관은 국회의원직을 기웃거리다 명예롭던 인생의 흠집을 남긴 것도 부질없는 노욕에서 꼿꼿함을 부러트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어디 그뿐인가.

롯데그룹 창업자이자 총수인 신 회장은 인생 말년에 자신이 쌓아올린 대그룹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고 대한항공 조 회장도 같기는 마찬가지다.

수신(修身)은 물론이요, 제가(齊家)마저 자식들에게 재산다툼으로 이어져 법정을 오가며 제기에도 실패해 바벨탑 같은 욕망의 고층빌딩을 무너트리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어 위태롭게 만들었었다.

모두가 물러섬을 모르고 오직 나아가려고만 하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탐욕에 한을 풀기라도 하듯 쉼 없는 노욕에 맑고 깊은 눈을 흐려서 결론까지 혼탁해져 그렇다.

결국 집안싸움만 하던 그룹총수들 역시 재물에 대한 욕망을 끊어내지 못하고 인생의 끝을 망신과 패가로 덧칠하다가 눈을 감고 말았다.

따라서 때에 맞는 물러남과 욕망의 절제는 쉽지 않은 모두의 과제이지만 굳이 편안한 방법을 선택한다면 과제가 될 것도 없고 또 모든 존재에 끝없이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고 착각하는 불안한 심리작용 또한 본인이 불러드리는 방법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은 해소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존재의 유연성 역시 본인이 잘 알고 다듬어 처신하고 이를 자연스런 현상 중 일부로 받아들이면 편안해지고 적당한 마지노선을 갖고 자신과 타협하면 마음 편히 노년을 여유롭게 지낼 수 있겠으나 이를 종종 잊어버린다는 사실에 어둔해져 생기는 결과들이다.

그 어둔해지는 망각의 바닥에는 절제하지 못해서 드러나는 욕망 즉 탐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들어앉아 더욱 그러하다고 판단된다.

더 오래 존재하고 싶은 욕망, 더 가지려는 욕망, 더 오르려는 욕망, 남을 속이려는 욕망, 기어코 상대를 무너뜨려 가며 이기려는 욕망 등등은 수시로 우리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와 순리의 이치를 벗어나려 하는 왜곡되고 기형적인 정신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데서 오기에 그렇다.

지난 시절 ‘내가 누구였는데’라는 아상(我相)으로부터 그 부질없는 자기의 부정적 시각의 비판과 헛된 결단이 부르는 과욕은 자칫 치욕스러울 수도 있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수도 있어 자신의 오만과 타협하지 못하는 아집을 잘 다스려야 함은 당연하다.

따라서 노욕과 노추로 흐려져 가는 요즘 몇몇의 과부한 탐욕의 부자연스런 결핍들을 보면서 나이가 깊을수록 넓고 깊은 사색에 자문을 얻는 “청산은 나를 보고 물처럼 바람처럼 말없이 살다가 가라하네”란 무욕이 모두에게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주는지 잔잔한 생각에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삶의 방식은 각자의 해석은 모두 다르겠으나 죽을 때까지 삶의 보람을 느끼고 보다 더 많고 나은 자세로 지혜를 얻고자 배움을 공부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내용은 누구나 흔히 가지고 있는 컴퓨터(노트북)나 휴대폰 속에 얼마든지 무수히 들어있어 이것을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일과 배려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배려(配慮)라 하는 마음은 말 그대로 물질적인 나눔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염려하고 우러러 생각해주는 마음이 곧 배려하는 마음으로 배움의 내용인 즉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깊숙하도록 긴 세월에 연륜(年輪)이 채워지고 고랑(高浪)이 생기면 경계해야 할 것은 탐욕에 있으며 습득해야 할 것도 지혜에 있다 하겠다.

마음 깊이 삶 속에서 이어지는 생에 의미를 더한다면 삶의 지혜를 찾는 일이여서 논어 경구와 금강경에서 짚어주는 ‘상(相)의 욕망을 가만히 내려놓는 일’로 지혜를 깨우치는 것이라 일러주고 있어 지금 이 시대 다시금 곧추세워야 할 삶 속에 묻혀버린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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