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勢道)의 광대가 되길 거부한 최북(崔北) (상)
세도(勢道)의 광대가 되길 거부한 최북(崔北) (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2.22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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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눈을 스스로 찌른 호생관(毫生館) 화가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방외지인(方外之人)으로 태어난 천상예인(藝人)

조선왕조 영조(英祖 1724~1776) 때의 일이다.

호탕하고 호방한 기질로 태어나 불같은 열정과 정열을 불태우며 그림을 유감없이 그렸던 화가 최북(崔北,1712~ ?)

이를 다루려니 마음 한쪽이 다소 무겁게 느껴오는 눅눅함을 어린 시절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날리던 꼬리연을 연상하며 시작해 본다.

연줄을 당기면 꼬리를 흔들며 드높은 하늘로 치솟던 꼬리연의 비상을 향해 창공에 대고 연과 소통을 나누던 수신과 교신.

연줄이 다 풀릴 때 드디어 조그만 쪽지에 구멍울 뚫어 연줄에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바람에 띄워 보내던 안단테(Andante).

지난해 유월에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에서 장편의 평설을 전기, 중기, 후기, 말기 등 4단계로 나눠 다루면서 언급에서 누락 됐던 화가 최북을 지금에서야 다룬다.

이유는 그때 글을 이어가고자 했으나 다른 화가들에 비해 자료와 기록이 턱없이 부족해 참고가 되지 못한데다가 최북에 대해 책을 보지 못해 논(論)할 수 없어 생각으로만 미루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매우 중요한 조선미술의 역사적인 부분으로 최북 화가를 빼놓고는 막 치솟아 오르는 꼬리연의 줄을 놓치는 것처럼 아쉬울 것 같아 다시 마음을 먹고 연줄을 잡아 당긴다.

무주 출신의 조선후기 화가로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에 위치한 최북 미술관이 지난 2012년도에 건립돼 있으나 영인본으로 전시위주의 작품을 배열형식에 지나지 않고 필자가 원하는 자료와 형식이 개략에 그치고 있어 직접 쓰기로 한다.

최북 그는 방외지인(方外之人, 천재)으로서 우리 조선시대 때 화가들이라면 누구나 원하던 궁중(宮中)에 모여 그림을 그리던 도화서의 화원들과는 달리 갇혀 들어앉아 얽매이는 것이 못마땅해 혼자 여기저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면서 필력을 날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정치적인 권세가 있는 세도(勢道)의 복종에 굴복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송곳으로 눈을 찌르고 붓자루를 집어던진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화가로서 혜안이 누구보다도 깊고 냉철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예인(藝人)이어서 빼놓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요즘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예술인들과는 달리 세속(世俗)에 안주하려 하지 않고 현실 속 어지럽고 혼란하게 추락해가는 세태를 향해 광야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질타하던 초인(超人)으로 거리낌이나 주저함이 없어 의로운 사람이기에 뒤돌아보며 기록하고자 한다.

‘세상 이런 꼴들이 어디 있는가?’하고 작금에 그의 음성이 전해오는 메아리가 크게 울려오는바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예상보다 빨리 음습하기에 이를 환기하고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도 현실정치와 예술가의 의식은 무엇보다도 밀접(密接)함에도 우둔한 우리에게 뜻깊은 손짓과 발짓을 하는 연유이다.

최북은 본인의 호(號)처럼 호생관(毫生館)이란 명칭에서 보듯 ‘붓으로 먹고사는 집’이란 뜻으로 평생을 붓질을 하며 그림의 외길을 걸었던 괴짜 중 괴짜였다.

남달리 의식 깊은 영감(靈感)과 날카로운 직관력, 탁월한 조형(造形)적인 능력의 소유자로 천재적인 사람들에게 흔히 일컬어 불러지는 방외지인(方外之人)으로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당시를 풍자화하며 회화화(誨化化)한 의식 있는 예인으로 이를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를 두고 모두는 방외지인이라 부르는데 주저함 없이 그 시대에서 대단한 사람으로 당시의 성향과 양식에 관계성을 갖고 풍자하는 것이 천재들의 특징 중 하나이고 예나 지금이나 동서를 막론하고 이러한 사람들은 시대의 반영자이자 사회의 거울이 되기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예인들은 역사적인 지속성, 민족적인 상관성, 지역적인 직관성 자연과의 관계성 속에서 인간사들의 연결성에 자신이 태어날 때 가장 알맞은 시기들과 현상들을 직시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의 천재적인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데 최북 역시 달관(達官)들의 불의에 불복해 불운으로 불행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즉 한 개인이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더라도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思考)와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등에 있어 이러한 것들과 잘못 연결되면 그 재능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지게 돼 있어 순리에 따르는 것이 합당하다 하겠다.

어느 곳이나 전진하는 역사의 발전 앞에 원동력이 됐던 방외지인들이 있게 마련으로 속되고 따분한 고정된 형태에 얽매이는 경우에는 테두리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 이들 두뇌의 구조가 태생적으로 자유롭게 형성돼 있어서다.

그렇다보니 이런 사람들은 부자연스런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자연스러움을 택해 이를 버리고 울타리 밖에서 큰소리를 질러대는 선지자(先知者)들이기 때문에 요즘말로 하자면 혼자라도 아웃사이더(OutSider)를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러한 사람들은 필자도 이 지면을 통해 견해를 피력했던 대로 대부분의 평범함을 뛰어넘고 있는 천재들로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을 관통해 통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일치된 언행이라는 것을 재고하게 된다.

그래서 돌아가는 어떠한 상황도 이미 사전에 먼저 직감적으로 알고 먼저 깨달은 사람들로 뭇 캄캄한 사람들에겐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차후 밝혀질 것을 어떻게 감추겠는가?하고 따지는 사람 중 최북 이라는 사람도 여기 전(前)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최북선생상.

아웃사이더를 자청한 진정한 환쟁이

그는 평소 솔직하고 대담하면서도 파격적으로 기운이 생동하는 거침없는 기행(奇行)은 물론 화법과 필법으로 산수, 인물과 함께 영모(翎毛)라 해 새나 메추리 그리고 짐승을 그린 그림들과 꽃과 새를 함께 그린 화조(花鳥) 등을 두루두루 섭렵해 막힘과 주저함 없이 그림을 그려댔다.

그의 첫 이름은 식(埴), 자(字)는 성기(聖器) 또는 유용(有用)과 칠칠(七七)이었으며 호(號)는 성재(星齋), 기암(箕庵), 삼기재(三奇齋) 등과 호생관(豪生館)으로도 불리었다.

그의 자나 호를 찾고 보니 이 다양한 자와 호를 보면서 범상치 않은 비범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직감(直感)이 몇백 년이 지난 과거이지만 지금 바로 앞에 마주보고 앉아 있는 듯이 형상들이 아슴아슴하게 비춰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스스로를 ‘성스러운 그릇’으로 본 것이나, ‘유용’이라 한 것이나 이름이 두 글자로 나눠 쓴 북 자를 ‘칠칠’로 칭한 것이나 어딘가 기묘(奇妙)하게 불리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기를 칠칠한 사람으로 비하한 것 같지만 칠칠은 하는 일에 거침이 없이 민첩하고 예민한 사람, 추함에 들지 않고 깨끗한 사람으로 일컫게 하는 뜻이라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흔히 우리가 쓰는 말로 오죽하면 ‘칠칠하지 못하게 행동하다’라는 낱말을 생각해보며 칠칠이란 용어를 떠올려보면 쉽게 짐작이 된다.

또한 ‘붓 한 자루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겠다’고 하는 ‘호생관(毫生館)’이라고 지은 점에서 그의 당호(堂號, 집 이름)를 유추해 볼 때 여기서도 세 가지 기묘한 짓을 하는 사람의 집으로 명명한 ‘삼기재(三奇齋)’라는 것도 특이하고 상이하다.

이렇게 호를 지은 것만으로 보아도 모두 자신의 쓰임새를 강조하는 의미로 추측돼 본인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돼 정도가 빠른 암산이 가능하다는 사실들이 분명하게 보여 초록색을 뿌린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진다.

물론 괴짜들이나 천재적인 사람들의 시안은 천리안처럼 서늘해서 본인한테는 행적 등과 기록 따위에는 상관하지 않고 판단대로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라서 일반 사람들 기준과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어 앞서간 이들을 조명한다면 다수의 기록물이 필요한데 최북 같은 경우도 그가 전라도 무주(茂朱) 사람으로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만이 그에 대한 전기적(傳奇的)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주 최북 미술관에는 그의 연보를 1712~1786인 74세로 영조, 정조 그리고 1800년 순조 가까이로 돼 있어 무엇이 맞는지 헷갈려 아리송하기도 하나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사실에 의거되는 부분만 파악해 다뤄보기로 한다.

따라서 추측컨대 그는 당시의 경향들이 못마땅해 철저하게 세상을 떠돌이로 지내면서 한세상을 살았던 것으로 막연하게나마 그려지는 형상들이다.

이미 앞서 밝혔듯 어디를 찾아봐도 최북과 함께 서울 화단에서 그림을 그렸던 이는 없고 강희안(1710~1784), 강세황(1713~1791), 김홍도(1745~1818), 이인문(1745~1821), 신윤복(1758~?) 등등의 화가들의 진면목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허나 최북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한 행적 몇 가지와 그림 몇 점을 제외하고는 자세한 작품 관련들의 지면을 살펴봐도 그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담은 내용들은 남들보다 아주 적게 필(筆) 돼 있다.

다른 화가들 같이 당시 무슨 그림을 누구와 함께 어떻게 그렸다든지, 작품성향이 어쩠다든지 하는 별도의 기록이나 내용조차 시원스럽지 못하다.

‘우리 그림의 변천사와 화가들’이란 제목으로 필자가 언급한 상위 화가들은 서화에 관한 많은 글을 써 모은 문집(文集)인 ‘표암유고(豹菴遺稿)’를 남겼지만 최북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어 이 또한 뭔가 틈이 있어 개운치 않다.

추측컨대 당시 양반 출신의 학자이면서 당대의 지도적인 위치에서 서화 비평가이도 했던 강세황으로서는 출신성분이 좀 낮았던 최북에 대해서 특히 괴짜 노릇을 일삼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될 뿐이다.

다행이도 최북이 서울화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기행(奇行)을 일삼고 다닐 무렵(1750~1776)에 간단히 써진 조선시대 문집에만 그의 기행을 알리는 정도로 일화나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기록돼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를 기초로 나름대로 글을 바느질하듯 이어가면서 전개하고 대표적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미리 밝히며 눈길이 가는 특이 사항들을 모아 바늘귀에 실을 꿰어 깁도록 하고자 한다.

당대의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했고 영의정까지 오른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쓴 ‘금릉집(金陵集)’과 조희룡(趙熙龍, 1797~1859)이 쓴 호산외사(壺山外史) 등에서 이름 두자와 행적을 간단하게나마 찾을 수 있어 다행이다.

표훈사도, 지본담채, 18세기경, 57.3 x 38.5cm, 서울 개인소장.
표훈사도, 지본담채, 18세기경, 57.3 x 38.5cm, 서울 개인소장.

우선 ‘금릉집’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 기록돼 있으니 사실이라 판단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최 북은 어느 날 서울의 한 귀인댁(貴人宅)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안내하는 자가 칠칠(七七)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미안한 나머지 “최 직장(崔直長)님께서 오셨습니다”라고 말하니 칠칠은 화를 버럭 내면서 “너는 어찌하여 나를 최 정승(崔政承)이라 하지 않고 최 직장이라”하느냐며 따져 묻는다.

그러자 그자가 웃으며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라고 되묻자 칠칠은 “내가 직장이 된 때가 언제 있었느냐, 만일 거짓 직함을 붙인다면 정승이나 직장이나 일반이거늘 하필이면 큰 것을 버리고 왜 작은 것을 붙여주려 하느냐”라며 귀인을 만나지 않고 뒤돌아 갔다는 일화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순간적으로 받아치는 재치나 감각도 두드러지지만 본인을 큰 사람으로 스스로 암시하고 있다는 부분에서 예의를 따지기 전에 그 상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도 귀인댁을 찾고도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가는 심상은 귀인보다 자신이 그 이상이라고 단절(斷切)하고 그냥 돌아가는 것은 고집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두둑한 그의 뱃장에서 오는 자존심이라 해야 할지 위트 있는 즉흥적인 애드립(Adlib)이야 말로 평범하지는 않게 엿보이는 부분이다.

남공철은 ‘금릉집’에 또 이런 이야기도 간략하게 쓰고 있다.

최북은 그림은 잘 그리나 눈이 하나가 멀어서 항상 안경 한 알만 붙이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며 평소 술을 즐기고 구경(여행)하는 것을 유독 좋아했다.

어느 날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폭포를 구경하던 중 즐거운 나머지 술을 잔뜩 마시고 웃다가 울다가 하다가 이윽고 소리치기를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연못 속으로 몸을 던졌으나 마침 이를 보고 있던 옆 사람이 그를 구해줘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후일담이 기록돼 있다.

한마디로 경치에 취하고 술에 취한 나머지 감정까지 취한 모습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최북다운 감탄사였을 테이고 이 역시 즉흥적인 돌출된 행동으로 여겨져 평소 ‘그가 얼마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나’하는 유추도 가능한 모습의 단면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때가 ‘금강산도(金剛山圖)와 표훈사도(表訓寺圖)’를 그린 때이니 화가로서 최고의 절정기에 이르고 있었을 때라고 유추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그림을 그릴 무렵은 1750년대로 한참 유명하던 겸재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경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치밀하게 묘사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극사실주의(Hyperrealism) 속에 정밀화’ 정도인 ‘실경(實景)산수’로 완성해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을 때이니 그러고도 남음이다.

특히 최북의 작품 ‘금강산도’와 ‘표훈사도’는 산과 바위와 집 등의 묘사법인 준법(皴法)이라 해서 독특하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따라올 자가 없었을 정도였으니 가히 큰소리를 칠만하고 옥우법(屋宇法) 등은 겸재의 화풍으로 많은 후배화가들이 이를 따르고 있었음에도 한참 앞서가고 있어서다.

그 당시 조선후기 한국 산수화의 대부분은 겸재 정선(1676~1759)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조선시대 그의 화풍은 한때 전성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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