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勢道)의 광대가 되길 거부한 최북(崔北) (하)
세도(勢道)의 광대가 되길 거부한 최북(崔北) (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2.28 1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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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눈을 스스로 찌른 호생관(毫生館) 화가
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뉴스봄=류환 시인·예술평론가·화가·행위예술가]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말 많고 무겁던 세상을 살아가던 심상(心想)

‘금강산도와’와 ‘표훈사도’에 나타난 그의 그림들을 통해 그의 호방한 작품세계와 회화의 사상을 나름대로 살펴보며 분석해 본다.

1757년 즈음 그의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던 ‘미법산수도(未法山水圖)’는 먹물이 번지는 화법인 발묵법(潑墨法)을 끌어들여 그린 것으로 미불(未芾)의 화풍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여기서 미불(米芾)이란 화풍은 북송(北宋)시대의 산수화가로 유명한 화가의 필법을 말하는 것으로 산수화의 기법 중 하나인 것을 참고하면 이해와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적인 최북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가 거침없는 것은 그의 성격을 닮아 대체적으로 선이 굵어 선명하게 나타나는 화법이 가장 큰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또 그의 용맹전진한 그림의 필력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내적인 차용보다 외적인 기풍에서 자신감을 표출하고 승화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함축한다면 자신과 붓과의 유희(遊戱)다.

정확하고 안정된 구도와 설정 그리고 배경에 이르기까지 완벽함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서다.

촘촘하지만 시야를 확보하고 가깝지만 시원스럽게 본인의 심상을 있는 그대로 원근법을 살려가며 마치 소가 쟁기를 끌며 밭을 갈듯 화선지를 먹물로 채워가는 발묵법은 붓의 놀림이 마치 자신의 생각을 갈아놓듯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으로 이끌기에 그야말로 방외지인답게 수려함을 내보인다.

또 ‘수하담소도(樹下談笑圖)’는 선면화(扇面畵, 부채 위에 그린 그림)로 우람한 나무의 묘사와 배경이 아주 독특하다.

두 그루의 나무를 대담하면서 시원하게 거리낌 없이 그려놓은 작품으로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게 반영하고 있다.

마치 그의 그림들은 그림을 그리는 작업과정과 행위들이 여과 없이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두루마기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직관력과 관찰력은 바람이 낙엽을 쓸고 가듯이 한 획으로 직필하는 경이로운 풍광을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호취박토도(豪鷲搏兎圖)’란 수리가 토끼를 잡는 모습을 그린 작품도 구도와 화법이 마치 살아 움직여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생동감을 주고 있다.

그 옛날 당시에 단순히 사물을 바라보며 느꼈던 순간들을 먹물과 붓으로도 가능했으니 천재라는 명칭이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즐겨 사물을 바라보고 그림을 대하는 심도 깊은 과장에서 습득돼진 것으로 비치며 당시에 유행했던 화풍도 독창적이어서 특별하고 뛰어난 그만의 붓놀림이 역력히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호(號)가 현재(玄齋)로 불리던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호취박토도와 나무, 바위, 수리 등 모양과 그리고 포커스가 흡사한 것 역시 최북 현재가(玄齋)가 살았던 동시대의 화단에서 그의 영향력을 다소 받은 화가였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해변기암도(海邊奇岩圖), 관폭도(觀瀑圖), 단구승유도(丹丘勝遊圖) 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풍광들도 마찬가지다.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기암괴석 등을 힘차게 그린 최북의 솜씨는 유감없이 활기차며 원근법에서도 농 묶은 붓의 터치가 가야하는 곳만 가야하는 절감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그림들로 전체의 화면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주변 사물과의 어울림은 여백이 오히려 붓이 지나간 것처럼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처사가도(處士家圖)’란 작품은 남산골 아래 자신의 집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과 외롭고 초라한 형상을 한 초가집의 그림이다.

날카롭고 힘차게 꺾인 나무 아래의 죽림(竹林) 속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모습은 무엇인가 상념에 젖은 자신과 초가삼간 옆 꺾여 있는 조형어법은 자신을 비춰 초라한 형상으로 현실반영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이미지로 보아 아마 그의 정신에서 호출되는 상념이 가득하게 넘쳐나도록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정도의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실상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살펴진다.

이 작품을 보면서 기행(奇行)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되 실력이 뛰어나고 비교적 단정한 문인화풍(文人畵風)의 그림을 선호했던 최북의 정신 세계와 꺼릴 것 없었던 단조한 이미지들을 한 폭의 그림으로 지난 세월을 자신에게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초가삼간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본인이 기거하는 집과 자신의 형상으로 그를 충분히 미뤄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그림이 바로 ‘처사가도(處士家圖)’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갖게 한다.

주목되는 작품들 중에 갈대와 게를 진하고 힘차게 그려놓은 ‘지두작(指頭作)’이란 작품으로 주제를 붙이고 있는 그림은 말 그대로 손가락에 먹물을 찍어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최북은 이 부분만 보아도 당시의 문인화를 선호하던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이 즐기던 남종화에서 먹을 갈고 붓으로 점잖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미 작품과 작자가 한 몸이 되어 행위 자체와 과정을 예술로 보는 의미전달 매체의 다양성으로 일찍이 행위예술(Perfdrmance)를 조선 후기에 실현했다는 의미로도 얼마든지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어서 감각적이다.

한마디로 실험예술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그의 예술에 대한 창의력과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은 현제의 컨템퍼러리아트(ContemPoraryArt)라 불리는 현대예술에 가까운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종을 불허한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익히 알고 있는 문방사우(文房四友, 문방사보文房四寶라고도 함)의 기본인 종이, 붓, 먹, 벼루를 가리켜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평면(회화)을 점유하던 기존의 방식과 상식을 깨고 있어 실험의 단초를 발생시켰던 시조(始祖)라 논(論)하기에 충분하다.

그 시대 과연 이런 이가 몇이나 아니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지 상상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지만 사실이어서 필자가 나름대로 최북의 간단한 논평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보람이고 수확이라고 할 수 있는 단서이다.

경구에 말하기를 장생불로신선부(長生不老神僊府), 요초경화처사가(瑤草境花處士歌) 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늙지 않고 오래 신선처럼 살고 싶었지만 얼마나 살다가 홀연해졌는지는 정확치가 않아 흐르는 세월 속에 풍운처럼 천지의 허공 속을 방외지인(方外之人)으로 앞질러 세상을 살다가 이승을 떠나버린 최북.

지금도 그의 심장이 요동하던 그림들 중 한 폭의 그림 속 초가삼간에 정신이 들어 있는 ‘처가사도’가 심장 속 뛰는 맥박처럼 여진(餘震)으로 남는다.

한편 그는 당시 중인(中人)들의 시사(詩社 시인들이 조직한 시를 짓는 모임)인 시인 송석원 시사(宋石園 詩社)의 일원에 명단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당대의 시인들과도 폭넓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어 그야말로 특별한 예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시사에 가입할 정도라면 문학의 관심은 물론 문장에도 상당한 수준을 보였을 거라는 예단이어서 시·서·화(詩書畵) 삼절에도 능통했을 것으로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글은 찾아볼 수는 없었으나 워낙 명석하고 뛰어난 혜안을 가진 소유자로 그림에서도 나타나듯 오히려 글쓰기는 더욱 쉬웠다고 본인은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일이어서 시(詩)부분은 각설한다.

그림으로는 현재 추측으로 남아있는 20여점의 작품 가운데 그의 호방한 정신과 대담한 화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그림 역시 선상대취도(船上大醉圖)라 여겨진다.

더운 중복(中伏)의 달밤에 웃옷을 훌렁 벗고 냇가의 조그마한 목선(木船) 위에 드러누워 있는 한 촌로(村老)의 그림도 재미있다.

언 듯 자기 자신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이 그림은 편안한 자연을 만끽하고 있을 당시나 어떤 시상에 젖은 평상시 본인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 넣은 것은 아닐까 풀이된다.

최북.
최북선생상.

천하명산과 최 메추라기

특별한 일이라서 글을 다시 잇는다. 최북의 한쪽 눈이 먼 내력 등 몇 가지 대충은 익히 자료를 통해 알고 있어 이것을 재해석해 옮겨본다.

최북은 항상 향을 피워놓고 그림구상에 잠기곤 했다. 황대치(黃大癡, 본명은 황공망, 黃公望으로 중국 원나라 때 산수화가)를 숭배해 마침내 자기의 뜻으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毫生館)으로 지었다는 것은 사람됨이 격앙하고 오만하게 작은 절도에도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도록 해 다른 것에는 개의치 않고 붓으로만 생활하며 살겠다는 심산이다.

일찍 어느 집에서 달관(達官, 높은 관직, 또는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며 주인을 향해 “거기 앉은 자의 성은 누군가”라고 물었다.

최북이 얼굴을 들고 달관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먼저 묻노니 그대의 성은 누군가”라고 되묻기가 일쑤였으니 ‘아는 것이 병’인 듯하다.

이런 사소한 것은 별거라 하더라도 자칫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하자면 이는 오만함이라 보기 쉽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의 앞서가는 행적에서 충분히 사료돼 이해된다.

이런 행위는 말할 것도 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가 내뱉는 회화(誨化)에서 오는 신묘에 깨달음을 외친 묘오(妙悟)로서 최북이 어두운 탐관오리(貪官汚吏)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가르침에서 오는 구토(嘔吐)이고 토역(吐逆)인 셈이다.

관직에 올랐다고 무서운 줄 모르고 오만하거나, 배부르다고 없는 자들을 업신여긴다거나, 조금 안다고 남들을 모를 거라는 오판에서 오는 착각이라든가, 위아래를 모르고 매사에 아집을 떠는 부덕한 소치이거나 등등 오만과 건방에 일침을 내뱉는 것이다.

언제나 고독하고 사귐성은 없었지만 예인들의 특징이 그러하듯이 감정에 몰입된 통찰한 눈으로 사물을 보면서 작품과정엔 열정을 다해 놀라울 정도로 경지까지 올랐으니 천재들의 시선을 마주하는 일반 뭇 사람들의 시선엔 무엇을 보았겠는가?

최북의 그림 중엔 특히 산수화와 메추라기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 또는 최순(崔鶉)으로 실경과 메추라기라는 별명으로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평소 남의 비위를 맞추며 살기를 싫어하고 대담 솔직하면서 메인 곳이 없는 자유로운 몸으로 막힘없이 일필 하는 필법으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 최북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담채(淡彩, 색을 띤 돌가루의 광물질)를 사용하는 화려한 채색에도 능통했다.

이러한 화려함은 그가 살아생전 평소 즐겨 그리던 화조에 잘 드러나 표시되고 있다.

자유로운 새들과 메추라기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늘을 날면서 살고 싶었을 최북, 그는 어쩌다 사나운 독수리 발톱을 닮은 인간들을 만나 환멸을 느끼며 살다가 죽어갔는지 과연 운명은 재천(在天)인지 묻고 싶다.

요컨대 최북은 천재적인 예술가로 형식과 틀에 갇히기를 싫어했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나 눈치에도 전혀 상관과 아랑을 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기행과 파격과 몇 점의 작품을 남긴 것을 끝으로 숨을 거두며 붓을 놓고 말았다.

이미 밝힌 대로 최북은 어느 정도의 나이에 어느 해 어떻게 이승을 떠났는지 각기 달리 표시돼 있어 아쉽게도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고나 기록이 다르게 표기돼 있어 지금까지 불분명하다.

어디에는 겨울철 한양의 어느 골목에서 술에 취해 눈에 파묻혀 얼어 죽었다는 확실치 않은 낭설(浪說)도 있으나 이 또한 분명치 않은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이 필자 나름의 견해다.

이유는 정확치는 않으나 추측컨대 병치레도 없었고 언제인가도 명확치가 않아 지나친 기우(杞憂)는 오판일 경우도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어 분명해야 한다.

마감을 하면서 바람에 띄워 하늘 높이 치솟았던 꼬리연의 실타래를 감으려 연자세를 돌린다.

창공에 띄워 하늘 높이 솟기를 바라며 실이 모두 풀렸을 때 연에게 보냈던 조그만 쪽지에 담긴 사연을 생각하면서 연과 나누던 수신과 교신들을 뒤돌아 연자세를 걷어 접는다.

아마도 그런저런 사연들은 누구나 각자마다 요원처럼 갖는 오랜 바램일 것이다.

행여 최북 역시 그가 즐겨 찾았던 ‘천하명산(天下名山)인 이곳에서 죽으리라’라고 외쳤던 산속 깊은 어딘가에 아직도 그의 영혼은 긴 숨소리를 날리며 그가 즐겨 그리던 새들과 꽃들과 함께 사계의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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