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 전 그날의 함성, 3·8 민주의거 최우영 유공자를 만나다
61년 전 그날의 함성, 3·8 민주의거 최우영 유공자를 만나다
  • 육군영 기자
  • 승인 2021.03.08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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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한 부정부패에 분연히 일어난 대전 고교생들 혁명의 불씨 되다
올바른 판단력 없이는 국가의 발전도 없어 "학생이여 늘 깨어있어라"
최우영 유공자.
3·8 민주의거 최우영 유공자가 6일 본인의 사무실에서 3·8민주의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대전=뉴스봄] 육군영 기자 = 지금으로부터 61년 전 4·19 혁명은 시민이 중심이 돼 이승만의 독재정권을 무너트린 아시아 최초의 민주혁명이다. 자유·민주·정의를 내세운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4·19 혁명의 시발점에는 늘 학생들이 있었다. 대구 2·28 의거를 시작으로 대전 3·8 의거, 마산 3·15 의거 등 일주일 간격으로 발생한 학생들의 분노에 찬 메아리는 결국 민중의 투쟁으로 번져갔고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의 주춧돌이 됐다.

특히 3·8 민주의거는 고등학생이 중심이 돼 가장 조직된 움직임을 보인 충청권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다. 정부는 2018년에 3월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으며 당시 유공자들의 도움을 받아 3·8 민주의거기념관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61년 전 대전의 학생들은 어떻게 거리로 나서게 된 걸까? 당시 현장에서 싸웠던 최우영 3·8 민주의거 유공자를 만나 그날의 메아리를 들어본다.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 수립 선포하는 이승만 대통령.
1948년 8월15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대통령.

3·8 민주의거는 어떤 배경에서 출발했나?

“3·8 민주의거가 있던 1960년은 대한민국이 세계 최빈국이던 시절이다. 그래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받아 그럭저럭 먹고는 살았으나 집권당인 자유당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선거부정도 만연해 있던 시기였다.

1960년 3월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선거는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과 민주당의 조병옥·장면의 대결이었다. 그런데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급서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연임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86세로 고령이다보니 유고(有故) 시 야당에 정권이 넘어가지 않게 하려고 자유당은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생들이 움직인 이유는?

“그 시절의 고교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였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민주주의에 이반되는 사태가 일어났고 특히 선거를 앞두고 대구에서 2·28 민주의거가 터진 뒤에는 모든 학생을 일요일 강제 등교 시킨 상태라 불만이 고조된 상태였다.

또 서울신문을 강제로 구독해야 했는데 서울신문은 사실상 자유당의 홍보지였다. 그런데도 자치회에서 돈을 걷어 신문값을 내야한다는 모순이 있었고 이는 선생님들의 힘으로도 해결이 안 되니 결국 시위를 통해 학무국장(당시 교육기관의 지도와 감독을 맡은 관리)에게 결의문을 전달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잘못을 시정하라는 내용으로 시위가 진행됐다. 학원내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달라는 뜻이었다”

대전고등학교 3·8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된 기념사진.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대전고등학교 3·8 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된 기념사진.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의거는 어떻게 준비됐나?

“당시 새 학기를 4월에 시작하던 시절이라 3학년은 모두 2월 중에 졸업식을 해서 학교에는 1, 2학년만 남아있었다. 대전고는 학생간부라 할 수 있는 ‘학도호국단’이 이미 발령돼 있었는데 이들이 앞장서 3·8 의거를 준비했다.

간부들은 시위 전날에 시내에 모여 사전모의를 진행했는데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이 선거연설회를 한다해서 시위코스가 그쪽으로 결정됐다.

처음에는 그냥 대전시민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가야 하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있으니 우리의 뜻이 전달하기 쉽다고 판단해 시위코스로 결정했다.

그날 결의문도 미리 써뒀는데 다음날 비밀이 누설되면서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아침부터 학교 맞은편 박관수 교장의 관사에 연금됐다. 다행히 점심시간에 감시가 느슨한 틈을 타 교실로 돌아오면서 5교시부터 시위가 시작될 수 있었다”

당시 결의문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나?

“앞서 말했든 학교의 강제적인 처사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구호로는 ‘학원의 정치도구화 배격’, ‘서울신문 강제구독 취소’, ‘학원의 자유보장’, ‘학생 감시 중단’등이 있다”

당시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의 결의문
3·8 민주의거 당시 대전고등학교 결의문.

의거는 어떻게 전개됐나?

“재학생 모두는 교문을 박차고 담장을 넘어 큰길로 뛰쳐나와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흥동네거리를 지나기 직전에 진압경찰의 백색 지프차가 우리 시위대 앞으로 돌진해 들어 왔다.

지프차를 피하고자 학생들은 대오를 풀고 양 갈래로 갈라졌고 경찰들은 경찰봉과 카빈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러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쥐어패기 시작했다. 심지어 사복차림의 경찰이 곳곳에 숨어있어 경찰과 민간인이 분간이 안 되는 상황이라 혼란이 더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어지간한 곳은 다 돌파했는데 공설운동장 입구에서 경찰들이 강력한 방어벽을 펼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져 대전역으로 향했는데 일부는 인동시장을, 일부는 대흥교 밑으로 중앙시장을 거쳐서 대전역 광장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잡히는 대로 경찰백차로 연행되기도 하고 상점으로 숨어들기도 하면서 하나둘 시위대가 모였다. 하지만 경찰도 필사적으로 목척교에서 도청방향으로 중앙로를 따라 진출하지 못하도록 최후저지선을 치고 포진하고 있었다. 결국 시위대는 크게 중교와 선화교로 우회해서 학교로 돌아와 농구장에 모여 연좌농성을 계속했다”

이후 의거는 어떻게 됐나?

“당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끌려간 학우는 80여명이 넘었고 학생들을 염려해 따라오셨던 조남호, 금종철 선생님도 경찰에 구금돼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날 저녁 늦게 교장님과 경찰서장이 시위장소를 찾아와 끌고 간 선생님과 학생들을 선처해주기로 약속을 받고 해산했다. 분은 안 풀렸지만 학우들과 선생님이 걱정됐고 피 흘리고 다친 학생도 있어 결국 해산했다.

오후 9시경 연행됐던 학우들이 석방됐고 주동학생들은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다음 날부터는 방과 후 매일같이 경찰서로 소환해 계속 배후를 밝히라고 협박했는데 문제는 배후라고 할 게 없었다”

대전 공설운동장앞에서 경찰과 대전고 학생의 충돌.
대전 공설운동장 앞에서 경찰이 대전고 학생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있다.

인근 학교에서의 움직임은?

“3월8일 이후 경찰은 초비상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학교에서도 갑자기 기말시험을 예정보다 앞당겨서 시작했고 경찰은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아직 학도호국단이 정해지지 않은 학교예정자들의 주소까지 모두 입수해 9일 밤부터 대전경찰서로 일제히 연행해 회유하고 협박했다.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 1, 2학년 재학생 600여명은 조회시간을 틈타 시위에 돌입했다. 목적은 대전경찰서에 구금된 학우들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경찰도 빠짝 약이 오른 상태라 시위가 매우 격렬하게 진행됐다.

급하게 준비된 시위라 결의문 같은 것은 없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와 구속학생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는데 ‘자유수호’, ‘민주사수’, ‘독재타도’ 등의 구호도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대전우체국과 목척교 인근에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고 일부 학생들은 보문고와 대전고를 지나면서 합세를 독려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동아일보 당시 3월9일자 보도.

이후 영향은?

“당시 조·석간의 사회면에 대서특필되면서 많은 보도가 나갔다. 가장 큰 규모의 준비와 체계까지 잡힌 최초의 시위였기 때문에 크게 주목을 받았고 연일 후속기사를 내보내면서 비중있게 다뤘다.

또 3·10 의거는 같은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학생시위가 확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국내 최초의 기록이 됐고 이후 4·19혁명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대구 2·28, 대전 3·8, 마산 3·15에 이어 4·19 혁명까지 모두 고교생에 의해 시작됐다는 특징이 있다. 기반에는 대한민국 민주헌법에 대한 교육이 있었으며 결국 정권의 붕괴를 초래했다”

3·8 의거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 많다.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이는데

3·8 기념관 건립 현장을 바라보는 최우영 유공자.
3·8 민주의거 기념관 건립 예정지를 바라보는 최우영 유공자.

“4·19 혁명 발생 후 1년 만에 5·16 군사 정변이 발생하면서 정부는 4·19 혁명을 비롯한 학생운동을 전부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스스로 군사 정변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4·19 관련 자료들이 많이 유실됐고 3·8 의거도 함께 묻혀 지내오다가, 1993년 문민정부 이후에야 혁명이라는 용어를 되찾고 기념식도 치를 수도 있게 됐다.

대전에서 3·8 의거에 참여했던 이들의 모임은 있었지만 이를 알리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국 2000년에 들어서야 사단법인 3·8 민주의거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나는 2003년도 부터 공동의장을 맡아 9년간 활동했는데 역점을 두었던 것이 자료발굴이었다. 3·8의 기억과 역사를 되찾는 취지였는데 당시 일간지와 서책을 확보하고 자료집과 증언록을 만들었다. 의거에 참여한 6개 학교 24명의 유공자 증언을 실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추가할 예정이다”

마침내 3·8 기념관 건립사업이 정상궤도로 들어왔다. 향후 계획은?

“3·8 민주의거는 대전시의회에서 두 차례 조례제정을 거쳐 2018년 11월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기념관 설립 이야기는 수년 전부터 있었으나 정권이 계속 바뀌면서 지지부진하다가 민선 7기 허태정 대전시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마침내 대상지가 선정됐다. 오는 2024년 개관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는 대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3·8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움직일 계획이다. 물론 교육감과 시의회 교육위원회의 협조를 받아야 할 사안이다”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학생들이 늘 사회에 대해 깨어 있고 관심을 뒀으면 한다. 지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있어 3·8 민주의거는 할아버지 때 이야기니 별 관심이 없을 수도 있지만 3·8 의거를 통해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한다.

학교란 오직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공간이 아니다. 3·8 의거는 정의로운 민주질서가 실천되지 않는 사회라면 발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학생들도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정의와 실천에 대한 정신을 이어갔으면 하는 염원이다. 몸소 애국을 실천한 충청의 옛 선조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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