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7)] 대학교수 그만두고 33세에 정치와 첫 인연
[기획연재(7)] 대학교수 그만두고 33세에 정치와 첫 인연
  • 조철현 편집위원
  • 승인 2021.05.28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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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카리모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속 45세에 총리 임명…세계의 이목 집중돼

[뉴스봄=조철현 작가ㆍ본지 편집위원] 라시도프는 1983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7년 전 일로 1964년부터 서기장을 맡아 왔던 브레즈네프 시대를 마감하고, 안드로포프 시대를 열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의 자살 이유는 분분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은 1991년 독립 이후 그의 자살 이유가 소비에트연방 정권의 정치적 탄압 때문이었다는 논리로 그에 대한 추모 열기를 키워갔다. 지난 2017년은 그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국정 1년차를 맞고 있던 미르지요예프는 고향 마을 지작에 그의 대형 동상을 세우며 그의 추모 열기를 더욱 부추겼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라시도프는 수많은 시련 속에서도 항상 높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에 헌신해왔다고 역설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지작 주민들은 큰 자부심 속에서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을 만들어 낸 것은 라시도프였다고 환호했다.

라시도프는 작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은 그의 동상 제막식 기념연설을 통해 라시도프는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며 문학에도 충실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강조하며 그의 문학적 족적이 영원히 빛날 것이라고 추모했다.

라시도프는 청년기의 미르지요예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동상제막식 연설에서 강조했던 ‘라시도프의 인본주의적 정신’은 그런 점에서 미르지요예프 시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마침 그의 취임 첫 연설문에도 그런 워드가 유독 많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국가 또한 부유해지고 강력해진다는 것을, 심지어 그것이 여러 차례 반복되는 말일지라도 저는 절대 이 말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대통령 취임사 중)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17년 지작 주 한복판에 세워진 샤로프 라시도프 동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17년 지작 주 한복판에 세워진 샤로프 라시도프 동상.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청년기 시절을 보낸 미르지요예프는 1981년 수도 타슈켄트로 유학해 ‘타슈켄트 관개(灌漑) 및 농업 기계화 대학’을 졸업했다.

이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이후에는 부총장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1990년 옛 소련 내 우즈베키스탄 최고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돼 33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와 첫 인연을 맺었다.

1992년 독립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시 미르조 울루그벡(Mirzo Ulugbek)의 구청장을 맡아 1996년까지 4년 동안 중앙무대에서 행정경험을 쌓았다. 이 시기 그는 헌법위원회 내 최고회의(Oliy Kengash) 구성원 자격으로 카리모프 대통령을 도와 우즈베키스탄의 헌법제정 과정에도 참여했다.

“조국의 독립 초기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는 이슬람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으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었다. 그는 카리모프의 사심 없는 동료이자 가까운 동료였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실의 공보 자료로도 엿볼 수 있듯 30대 청년 시절부터 미르지요예프는 카리모프 대통령의 큰 신뢰를 받을 만큼 여러 분야에서 탁월했다.

그 결과 1996년부터 2003년까지 7년 동안 그는 고향인 지작 주지사와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인 사마르칸트 주지사를 맡아 보다 큰 행정경험을 쌓아 나갔다. 같은 시기(1995년~2003년) 우즈베키스탄 의회의 의원직을 유지했다는 점 또한 그의 전방위적 활동을 보다 묵직하게 알리는 대목이다.

“지작과 사마르칸트 주지사로 있으면서 지역의 사회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1995년~2003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의원과 행정부 관료로 일하면서 민주개혁과 사회·경제 발전 관련 입법 과정에 적극 참여했다”(우즈베키스탄 대통령 공보실)

이어 2003년 우즈베키스탄 총리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45세. 집권 12년째를 맞고 있던 카리모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 속에서 이뤄진 총리 발탁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일부에서는 카리모프의 후계구도가 구체화됐다는 전망이 나왔고, 머지않아 카리모프가 권좌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오보까지 나왔다.

그로부터 13년. 우즈베키스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연평균 7~8%의 고도성장을 유지하면서 인구도 3000만 시대를 돌파했고, 카리모프 초대 대통령의 입지 또한 건재했다. 그 변화 바람 속에는 늘 미르지요예프가 있었고, 그의 직책은 계속 총리였다.

*자료조사 및 번역도움 : Michael Cho(KOSMETA 유라시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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