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 은둔에서 찾는 신화적 존재론의 사유(상)
[미술평론] 은둔에서 찾는 신화적 존재론의 사유(상)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6.03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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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실을 잇는 적막한 풍광을 거닐다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어렴풋하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과 함께 전력 질주로 뛰어가기 시작한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년이 시위를 당겨 쏜 화살같이 순식간이다.

대전 아트존갤러리에서 전국에서 활발한 창작활동으로 유명한 청년작가 50여명을 선정해 초대작가전을 개최할 때이다.

많은 작품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어 눈여겨보았을 때 서산에서 거주하는 오태현 작가를 자세히 알게 됐고 그의 그림에 대한 작업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 만큼 다시 기억 속 멀어져 식어버린 씨불을 살리듯 입김을 불어 넣는 마음으로 팜플렛을 들여다보자니 신화(mythos)란 단어가 머릿속에 스쳐 여울진다.

이유는 오태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뉘앙스가 신화를 떠올리게 해 도입에서 우선 가장 적절한 방법 중 하나로 판단돼 서두에 신화부터 열어보고자 한다.

신화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선의 간격을 좁히며 간략히 떠오르는 오태현의 화상에 이는 심미안과 작업으로 이어지는 작품의 성격을 나름대로 살펴 이를 전개하고자 한다.

신화는 개략적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주는 신화도 있을 수 있고 현대적인 과학의 신화도 있을 수 있으며 태고로부터 유래돼 전해오는 신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설에 의하면 신화(mythos)는 글자 그대로 그리스의 여러 신의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역사는 기록해 말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신화는 먼 과거 혹은 머지않은 과거에 대한 인간들의 믿음이었고 자연 혹은 사회문화적인 현상들의 기원이나 형성에 관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성 있는 합리적인 판단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화는 세계의 과거를 또는 역사를 해설해주는 오래된 도구이자 방법으로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보는 가에 대한 다양한 수단의 하나이다.

세계는 또는 인류문명은 과연 어떻게 생성됐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간이란 그 안에서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제시해주는 역사적인 파수이다.

이것은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막연한 공포를 감소시키고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다주는 일종의 설정이었다.

신화는 종교와 과학과 다른 학문 혹은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세계 안에서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의 내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창작으로 빚어내는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림 역시 창작하는 한 방법으로 새로움을 표출하는 작업은 늘 자신의 삶과 주변과 사회와 세계에 관한 이야기에 중심축을 이루면서 거듭 창조되게 마련이다.

물론 근거와 바탕의 정도 또 그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해야 더 뛰어나고 탁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는 한 개인의 작품에 말 걸기나 말하기의 수단적 입장이어서 대동소이 하지만 결국 각기는 천차만별이다.

태고로부터 시리즈 No.6 오태현 作.

오태현의 작품에 있어 자신만의 색깔과 방법으로 말하기의 방식은 오랜 기간 한참 동안씩을 침묵하고 숙성시켜 적막의 한가운데서 완성도를 높인 후 세상의 빛을 쏘인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오태현의 작품은 서양화 비구상이지만 문학과 음악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라도 본인들 모두가 지향해나가고자 하는 분투는 역력하게 투영되기 마련이어서 오태현 작가 역시 캔버스라는 공간에 뼈 아픈 손자국이 선명하다.

누구든 한결같이 본인 분야에서 타인들의 추종을 뛰어넘으려는 각고의 인내는 뼈아픈 통증을 동반하는 일이라서 극복이라는 장애를 참아내어 시간과 외로움과 고독을 감내해야만 비로써 가능해지는 것은 그의 모습 곳곳에서 나타난다.

말없이 꽉 다문 얼굴에 덥수룩한 머리와 구렛나루 그리고 꾸밈없는 옷매무시 등등 외부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 외모와 덩치 큰 체격이 돌처럼 무겁게 보인다.

풍기는 외형에서 자신과 약속한 내면만을 키워가는 신념으로 결코 오래가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성하는 작가의 길은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 또한 단단한 각오 없이는 이행하기 힘들고 외길을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평소 일상에서도 오태현 작가는 타인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주변부의 외출을 가능한 자제하면서도 칩거한다.

누구와도 말하기와 말 걸기를 주저하면서도 스스로 속박되거나 얽매이며 남들처럼 손끝으로만 흉내 내는 것이 싫어 자기가 사고하는 범주 내에서는 맘대로 자유를 추구한다.

그래서 오태현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욕구를 잊어버리고 작업실에만 칩거하며 마치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작품에 천착한 실태래에서 실을 뽑아 이미지를 엮는데 주력한다.

그 칩거 속 침묵은 자신 스스로 택하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사회적 관습, 주변 작가들의 동일시되는 작품 기법, 혼란스러운 현실, 삶의 복잡하고 다난한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태현 작가의 입장에선 유명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의 많은 선진문화의 환경에서 작업하는 유명 아티스트들의 아뜰리에를 다년간 들러보아 견문을 익혀왔던바 프로작가들의 오리진과 작업의 진정성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했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는 그의 생활방식과 작업과정에서도 잘 드러나 눈치채진다.

침묵과 명상이 길어지면서 얻어지는 자유야말로 최상의 컨디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유연한 정신건강과 이상적인 체력관리에 이롭다고 에두르고 있는 것으로 믿어 그의 작가정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창작으로 시놉스를 연결하는 뇌세포조직망들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커다란 화면을 채우는데 열과 성을 다한다고 느껴진다.

비로써 그 침묵의 오랜 시간이 지나갔을 때, 드디어 작품의 세계관을 말할 수 있게 되고 오히려 하고 싶은 말들을 어떤 방법과 형식으로 캔버스에 토로해야 할지를 준비한다.

마치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게 강물을 거꾸로 쏟아붓고 싶은 심정과 표현으로 작품을 대할 때 완성되는 과정에서 희열을 찾고, 기쁨을 얻고, 보람을 확인할 것이다.

작업을 통해 캔버스를 마주하고 쏟아 내고 싶은 말하기를 참아오는 오태현 작가의 비밀스러운 은닉은 경이롭고 난해하며, 간단하고 복잡하게 전개돼 일종의 신화가 존재토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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