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평론] 은둔에서 찾는 신화적 존재론의 사유(하)
[미술평론] 은둔에서 찾는 신화적 존재론의 사유(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6.07 1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태현 작가에게 말하기나 말 걸기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이를테면 그는 회화의 역사와 흐름을 통해 미술사조와 상통되는 리얼리즘 계열의 표현방식 한 가지를 도출해 내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예술사의 다양한 지식의 성자로 명성 높은 ‘아놀드 하우저(Arnoldhauser)’의 말대로 해석한다면 아무리 탁월한 개인이라도 거리를 두고 보면 시대적 조류를 나르는 한 운반자에 불가하다는 것은 작업하는 작가들에겐 그 누구도 예의가 아니다.

설사 그가 다빈치라 해도 르네상스적 조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오 작가의 캔버스가 말해주는 결과물들은 추상회화가 강인하게 드러나는 표현성이 돋보여 오히려 주시하게 되는 탁견이 된다.

인류 역사의 영원한 주제가 돼 있는 신화를 모티브로 일순간 떠오르는 잡다함을 벗어나려는 시도들은 인생의 가장 두꺼운 순간을 아름다운 미학으로 환류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오태현 작가는 그러한 신화를 추상표현주의 혹은 모더니즘의 추상을 선택하고 있으며 다른 한 축으로는 태고의 묵직한 표현주의 작품세계로 종교적 신화들과 태생적인 개념들을 이해하고 추구한다.

태고로부터 시리즈 No32, 오태환 作.

하나, 둘 혹은 선택적 다양성으로 이루는 화면들은 시각적, 표현적 방법으로 차용돼 필연적으로 물감들을 두꺼운 마티에르 기법을 쌓이게 하고 메말라 달라붙고 갈라져 일종의 상징적인 확신의 밭을 일구는데 특성을 찾는다.

화면에 겹쳐지는 물성이 무엇이든, 구성이 어떠하던 오태현의 작품들은 자신이 경작하는 마음이 곧 세계이고 현실이자 상징이 돼 신화로 우뚝 선다.

거기에는 물감과 흙과 오브제들은 시간이 시나브로 겹겹으로 쌓여 흐르듯 시냇물이 흘러 강물을 만들고 바다를 이루듯 자기만의 형상과 색채를 갖는데 점철돼 진다.

그 많도록 쌓인 돌계단, 돌탑, 돌축 그리고 크고 작은 흙무더기 등등은 틈틈이 굳어 틀에 박히는 조형적 어법과 시각적 상징들이 유입돼 견고토록 완벽한 성축을 이룬다.

그 유입들은 그림의 중첩으로 과잉처럼 복잡하게 복원돼 겹겹이 형성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마득한 시간 속에 드리우는 신화적 전설의 역사를 창조한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그 과잉들은 사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전개되기도 하고 그 각기대로 역할을 충실토록 빛을 발하고 있어 색과 시간이 어떻게 완성도를 이루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오태현의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핵심이 된다.

주지되다시피 묵을수록, 흐를수록, 시계의 바늘이 회전을 반복할수록 그의 작품들은 과잉에서 벗어나 객체로서 역할에 충실해 돋보기를 갖다 댄 듯 간략하고 명료하게 드러나 집중력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뚜렷하다.

물론 모든 작업과 작품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작품은 이미 새로운 생명력을 갖고 태동해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여 생기있고 윤기 있게 살아있어 시각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하고 미적 완성도를 획득하게 이른다.

특히 대형 캔버스에 드러나는 화면구성과 공간을 살린 배치와 물감들의 적절한 혼합과 위치, 오브제의 배열 등은 일종의 오태현 작가만의 독특한 조형 세계를 도출해 내기에 이른다.

거기에는 침묵이 정지한 흔적의 일부는 다양하게 자연을 접하면서 마주친 자연물의 현상들이 반영돼 자신이 만드는 텍스트가 현실과 이념, 혹은 추상과 반추상 사이에 쌓이는 하나의 확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실제로 군락을 이루는 견고한 흙더미들과 바위처럼 보이는 형상은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내면을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체의 이미지들로 세상의 사슬처럼 이어져가는 원형이자 궁극적인 자연적 섭리의 모습으로 드러내 또 하나의 새로운 신화를 형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모두는 침묵과 묵시의 한가운데서 획득한 씨앗을 발아시키는 심정으로 마음을 모아 기원한 흔적들이어서 잘 다듬어진 형식과 예술성을 띠게 되며 그 이미지들은 자신이 형성해낸 하나의 신화적 상징물이 된다.

혹여 때로는 신화적 상징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무겁고 구태의연할 수도 있지만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개인적인 발화를 의미한다면 오태현 작가에게 말하기와 말 걸기는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중 그림으로 말하는 회화의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반되는 것 같지만 상호 보완되는 관습과 본능적인 욕구 사이에서 뭔가를 만들고, 그려내고, 짓고, 노래한다.

회화는 사고나 행동이 비로써 발하는 과정에서 행위를 하는 그대로 화면에 남게 되는 것이 그림의 표현방식이다.

그림은 여타 예술 장르와 달리 완성된 모습이 작가의 의도와 동시에 그 흔적이 그대로 화면에 고스란히 남게 마련이어서 자신의 환경과 상황을 읽는데 근거가 된다.

오태현 작가의 그림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흙과 물감과 오브제들은 신화를 찾아가는 그의 습관이고 캔버스 역시 하나의 사실적 삶이며 평면은 똑바로 걸어가는 나침판이 된다.

따라서 물감과 재료와 오브제들은 필연적이어서 어김없이 견고하게 평면에 자신의 약속처럼 달라붙는다.

그 달라붙는 결과물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잠재돼 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닷가를 때로는 산책길을 조용하고 가볍게 걷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오태현 작가의 그림 역시 그사이를 오가며 점, 선, 면을 헤아린다.

즉 행위의 주체로서 작가 자신이 체험하고 꿈꾸는 사실들 사이를 오가며 우연과 놀라움을 통해 열린 결말들을 생성해내기에 이른다.

더 정확히는 그림과 현실 사이, 신화와 역사 사이 서해의 바닷가와 적막한 작업실 사이를 거니는 것과 동시에 말하기와 말 걸기가 가슴에 부엽토처럼 쌓여 가라앉은 자신의 서술을 풀어간다.

결국 회화도 자신을 찾아가는 하나의 여행이고 그 여행은 문화적 관습들과 개인적 양식의 재현이며 동시에 부정이기도 긍정이기도 하다.

이 관계들은 항상 변증법적이고 복합적이며 사막에 발자국을 찍어 길을 내는 것과 유사하다.

앞으로 오태현 작가가 붓을 들고 일종의 주술사처럼 혹은 여행자처럼 어떤 길을 내며 전진하고 어떤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