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다
비, 내리다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7.09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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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환 作.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또 비가 내리고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린다.

그대가 기억한 7월의 추억 속 깊은 공간에 머무는 흑백 영상에선 탐스러운 복숭아가 허물을 벗고 있다.

우레같이 비가 퍼붓는 장마철 실내에 놓인 벽난로엔 장작불이 뻘겋게 활활 타오른다.

그이는 음습한 곳에 바셀린을 바르고 어항 속에 노니는 금붕어를 보다가 노래를 부르기로 한다.

전봇대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창가엔 28년산 꼬냑이 미끈한 실루엣 속 늘씬한 몸매로 샤워를 하며 휘파람을 불고 있다.

담배를 입에 문 늙은 피아니스트는 음률을 조율하고 습습한 창가에 연기를 내뿜으며 고유상표등록을 위해 인증번호를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눌러쓴 뒤 소파에 앉아 엷은 미소를 짓는다.

단발머리에 노란 꽃을 꽂은 계집애가 비가 내릴 때마다 빗속을 깔깔거리며 치마를 걷어 올린 채 고목 나무 밑으로 사라지곤 한다.

덩치가 큰 더벅머리 청년이 커다란 세퍼트 종의 개를 목줄로 끌고 두리번거리며 헛기침을 날리는 굵은 목소리가 멀리 빗속을 뚫고 지나간다.

폭우 속 커다란 괴성으로 쩌렁대며 하늘을 뒤집어 놓을 듯 천둥이 깊어가는 밤 비포장도로의 질퍽거리는 두 집이 만나는 언덕 위 외딴 황톳길 영상이 정지된다.

커튼의 분위기를 바꿔가며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밤안개 자욱한 그때 거기에 또 한 사람의 목격자가 아직 살아 있다는 풍문이 떠돈다.

그리고 그때의 사실이 전설처럼 침묵한 채 눈을 깜박이며 가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고, 또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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