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원시행위와 주술적 매체 ‘연극’을 규정하다 (하)
시인, 원시행위와 주술적 매체 ‘연극’을 규정하다 (하)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7.29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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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평설] 시적 연극의 현대화
류환 시인 평론가 행위예술가.
류환 시인 평론가 행위예술가.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중편에 이어) 프랑스 시인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는 연극을 배우의 동작이 창조해 내는 움직이는 시, 공간의 시라고 말한다.

진정한 연극은 배우의 육체의 내부를 진동시켜 지금까지 현실 세계에서 사용된 적이 없었던 시적 상징의 제스처를 창조하는 연극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인간에 의한 가능한 모든 수단이 연극에 이용될 것이며 로고스에 의존하는 사고를 고착시킬 우려가 있어 철저해야 한다.

대사는 선과, 액션과 소리 등이 그것을 상호 간의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 형성하는 기호들을 자칫하면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된다.

말하자면 구체성은 오히려 가변적이고 변화무쌍한 영혼을 표현하는데 부적절하다는 말이 되기 쉬워 난해하기는 하지만 느낌과 생각을 총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신체에 모든 조직에 호소하는 공연으로 시적인 감흥에 기초한 스펙터클을 위해 정신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어들과 어울려 형성된 이미지들이 말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말은 말의 상상력인 가치를 되찾음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획득하게 한다. 게다가 무대장치나 조명 같은 구체적인 기호들이 동원되며 다양항 부류의 이미지들로 꽉 들어찬 공간은 치열한 기호들의 집합소가 된다.

이 기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식하는 정신의 나태함에 자극을 주어 사물의 이면에 감추어진 것까지 지각하도록 관객을 이끈다.

기호들은 끊임없이 무질서하게 해체되었다가 다시 재구성되는 운동을 통해 말로 번역될 수 없는 상태나 감정, 영혼의 비밀이 숨어 있는 미지의 영역을 밝혀준다.

결국 연극은 물리적인 요소들을 이용하는 공간 속의 시이다. 바로 이 공간의 시를 창조하는 자들은 연출가와 배우들로 정해놓은 텍스트에서 해방된 연출가들은 그 자신의 영역에서 창조 정신을 되찾는다.

이것은 본질적인 연극 정신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며 배우나 연극에 참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단순히 텍스트에 봉사하는 죽은 도구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로써 무대는 텍스트의 순수한 재현의 장소가 아니라 창조적 생산의 장소가 된다. 이런 연극의 장소는 체험된 텍스트의 반복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며 언제나 현재를 창조하는 무대로 살아난다.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어다. 시인은 시를 조탁하여 견고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깃든 말들의 조합을 이루어 낸다.

또한 시적 연극 속의 대화는 정서를 자극하는 상상력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에 어울리는 단어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시적 재질이란 이러한 표현의 능력을 의미한다.

연극의 형식을 탐구하는 몇몇 현대의 극 시인들이 말의 연극, 즉 시적 연구를 시도했다.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특권의 기호는 물론 말이다.

말은 발음되고 들을 수 있으며 쓰여지고 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유동적인 특성이 있어서 손쉽게 배합되기도 한다.

인간은 말과 더불어 가장 빠른 내적 언어와 가장 뉘앙스가 풍부한 언어를 지니고 또한 생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말은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라고 할 수 없고 역으로 생각도 없이 감각으로만 이루어진 시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생각과 감각이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참다운 시가 탄생하는 것이어서 시적 연극이란 이렇게 탄생한 시와 행동이 만날 때 가능하다.

언어를 새롭게 하는 하나의 개념

시적 연극에서는 말의 프리즘을 통해 현실이 포착되어 변형된다. 여기서 배우가 발설하는 말은 악기가 소리를 내는 소리와 같다.

차라리 음의 연기라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로 마치 무언의 극과도 흡사하다.

어휘 맞추기나 반복 전도된 어순에서 저속한 말장난에 이르기까지 대사는 해방된다. 언어는 그 자체로 회귀하며 특이 이성이나 논리의 범주를 벗어난다.

극작에만 몰두하기 전에 많은 시를 발표했던 장 타르디유(Jean Tardieu)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그의 극 작품은 연기하는 시다.

‘세 박자 리듬’이란 이란 작품에서 6명의 아가씨가 등장해 3박자의 느릿느릿한 리듬으로 여행자가 느끼는 인상을 발표하며 그들의 일상을 아예 협주곡과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되게 한다.

주인공의 독백은 알 수 없는 다양한 소리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하나의 악기가 오케스트라 전체가 협주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만든다.

역시 베케트에서 말은 침묵에 가까우며 제스처는 (不動)에 가깝다. 그의 연극에서는 전통적인 말과 몸짓의 기능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 말과 제스처가 존재한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말이 있다 해도 그 말속의 의미가 완전히 제거되어 소음으로 제거된다면 그것은 침묵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상태의 침묵도 존재하지만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무의미한 말의 홍수 속에 갇힌 말 역시 침묵으로 ‘말 있는 침묵’인 것이다.

시인의 재능에 따라 시학의 영역이 확장되어 언어에 기울이는 극 시인의 관심은 서정시인과 다를 바 없다.

몇 극작가들의 실험은 끊임없이 귀를 위한 작품에 바쳐져 그들 덕분에 우리는 배우들의 율동과 무대의 환상을 눈으로 즐기며 리듬과 멜로디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시를 듣는다.

이러한 시작 연극은 가능한 최소화시켜 텅빈 공간으로 만든다. 특히 관객들의 몽상적 상상 속에서 언어의 발산, 즉 시적 일치감을 방해하는 시각적 간섭을 배제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들의 합창에 의해 형성되는 관객의 자유로운 상상적 유회이다. 오직 소리와 색채의 조화가 있을 뿐이다.

불분명한 무대장치나 어떤 소품도 없는 빈 무대에서 배우는 시인의 언어를 연주하는 악기 역할을 할 뿐이다.

말하는 것 그것은 구체화하고 물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배우는 음의 진동, 개별적 음색과 억양을 통해 시어의 순수성과 발산하는 에너지를 극대화하는 임무를 띤다.

‘언어를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오네스코의 말을 상기해보면 이해가 쉽다.

모든 예술에 새로운 표현은 정신의 요구에 부응하는 풍요로움이며 그때까지 알려진 현실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모험이며 위험 또한 수반된다. 시적 상상력은 언제나 이 바탕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위대한 창작품들은 처음엔 낯설고 접근하기가 힘들다.

낭만주의 시인들이 인간성을 총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을 꿈꾸었듯이 현대의 극 시인들은 세계에 대한 연극 즉 인간이 행하고 꿈꾸는 것을 꾸준히 탐색한다.

이러한 극 작품은 시적 상상력이라는 유일한 은총과 환상의 도움으로 창조된 우주에 상응하는 연극이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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