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서정 하늘빛으로 투영되다
외로움의 서정 하늘빛으로 투영되다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8.04 1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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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사물의 표정을 언어로 담는 시인 한성기(중)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상편에 이어) 정확히 언제부터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가난과 질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으레 예술인들과는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한 몸이 돼 온 지 오래다.

작금엔 다소 의식이 높아져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해도 우리 사회는 아직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예술 분야를 선택해 성가를 이루기는 그리 녹록지 않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이 타고난 기질과 예지력이 있어도 예능을 권장하기보다도 월급을 받더라도 든든한 직업을 갖길 원한다.

처음부터 소질이 없으면 적성에 맞는 분야를 선택해서 특기를 살리는 편이 한결 본인의 인생을 개척하는데 수월하다고 말하는 게 대다수의 식견이다.

노력해서 안 되는 일은 없겠으나 예술은 창작과 더불어 누구나 손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모두 대충 이뤄지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과 싸워야 하며 널리 명성을 얻기까지는 그 분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한 방향에 눈을 맡기고 고난과 배고픔을 이겨내며 미치다시피 해야 가능해진다.

그래야 비로써 진정한 인간의 내면적인 바닥을 볼 수 있으며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창작과 작품에 몰두하는 원인과 기폭제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을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형태는 여러 가지일 수 있으나 예술을 자칭하는 사람이나 태생적으로 예술을 해야만 하는 예인이나 모두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심리적, 정신적으로 유치하게 만드는 돈이라는 것이다.

이에 눈이 멀면 본성만 드러날 뿐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정녕 예술인으로서 예술가의 길을 원한다면 최소한의 창작에 필요로 하는 만큼의 경비 정도면 나머지는 머리와 가슴으로 부딪치며 이뤄내면 되는 것들이어서 그 이상도 필요치 않다고 믿는다.

여기 그런 예인 중 한 사람이 한성기 시인이다. 고독과 쓸쓸함과 외로움과 병마와 싸우며 훌륭하게 업적을 남겨 바라다보이는 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산과 바다와 둑길을 오가며 얼마나 많은 고뇌로 얼버무려져 방황했을까? 한참 미숙하지만 그가 걷던 길을 조용히 따라 가본다.

한성기 시선집 '새와 둑길' 표지.

시대가 많이 변했다.

작가 중심의 인간론은 자세히 알 수 없어 그보다 그가 남긴 작품을 중심으로 읽어보고 몇 편을 분석해 상황을 잇고자 한다.

한성기 시인이 길어 올리는 작품들 대부분은 그의 발자취에 머문 자연 곳곳의 대상에서 선별돼 탄생하게 된다.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는 소재들은 그의 망막에 머무는 순간 여린 가슴을 통과해 촘촘하고 차분하게 물기를 머금은 빨래처럼 햇빛 혹은 그늘에 널려진다.

때론 건조하게, 때론 촉촉하게 그가 입고자 하는 옷감의 종류에 따라 정도가 달라지는 천의 속성을 파악, 온도를 맞춰 다림질해 옷을 입힌다.

그래서 그의 시는 깔끔하며 맵시 있고 넉넉하지만 크지 않고 부드럽지만 주름이 없는 한 벌의 의상처럼 안성맞춤이 된다.

이것이 한성기 시인의 시안으로 대상을 재단하고 가위질해 한 벌의 옷을 깁는 방법이며 끝으로 상표를 붙여 브랜드화한 작품들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많은 이들은 누구나 옷을 기워 맞춰서 자신에게 맞는 옷을 브랜드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옷감을 선별하는 과정부터 재단하는 정도, 깁는 방법 등 결코 간단치 않은 숙련이 요구되며 브랜드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견디고 인내해야 가능해진다.

이런 점에서 한성기 시인은 한편의 작품을 만드는 공정들을 이미 다양한 경험과 뼈아픈 체험을 통해 누구보다도 앞서 알고 있는바, 무엇보다 정직하도록 반듯해 진솔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살아생전 한성기 시인이 걸어왔던 사무치도록 아픈 과정에서 작품을 완성하는데 영향을 받는 주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더듬어 떠올려 시인의 가슴을 노크하자면 누구보다도 솔직담백하고 매력적인 인간미를 지닌 태생이었을 것이고 가슴 속을 파헤치는 아련함이 머물도록 시편들을 깁는 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우선 ‘새벽’이란 시를 살펴본다.

-새벽-

새벽은 말이 없다.

山 모롱을 돌았다.

국도 시커먼 콜타르 위로

햇살이 번지는

아침

山에서 새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새들의 가벼운

점프

벌써 심상치 않게 지나가는

차륜의 추도

몇 번이나 지치고 마는

나의 발걸음

한대

두 대

플라타나스 밑을

플라타나스도 가고 있다.

플라타나스 이파리로 햇살이

가득히 번지는

아침

-새벽-이란 시의 전문이다. 시에서 우선 나타나고 있는 상황을 새벽이라 말하고 있는 시인은 이른 아침의 조용한 어느 외길을 햇살이 번지기 전 산모퉁이를 한 바퀴 돌고 콜타르라 지칭한 아스팔트 길을 걷고 있다.

별것도 아닌 것 같은 이른 아침의 적막의 풍광을 자신의 눈에 비친 모습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당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러나 상황적 분위기를 살피자면 안개 자욱한 이른 새벽 가로수가 서 있는 한적한 국도의 시골길 모습을 걷고 있는 한 폭의 서양화를 연상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혼자 생활하는 습관으로 누구도 없는 새벽녘 일찍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이다.

굳이 계절을 표현하진 안 했지만 ‘플라타스 이파리로 햇살이 가득히 번지는 아침’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늦은 봄이나 초여름쯤이 아닐까 하고 추측된다.

비로써 아침햇살이 누리에 번지기 시작하자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와 총총거리는 새들을 모습을 눈에 담으며 조적(照寂) 한다.

여기서 시인은 어둑한 새벽길을 아침이 오기까지 오래도록 걷다가 비로써 여명이 트는 시간 이파리에 햇살이 번지고 새들이 먹이를 찾아 내려와 폴짝거리는 모습을 본다.

여기서 자신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생체로써 생명력을 유지한 채 이동하는 새들을 바라보며 하나의 동격의 유기물로 삼고자 역동하는 모습을 점프하는 모습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처해있는 당시 생활환경까지 엿볼 수 있는 현재를 말하며 이른 새벽 어딘가를 걸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이른 아침 자신의 건강을 위한 가벼운 운동 정도가 아닐까 생각 든다.

다시 길을 걷는다.

벌써 심상치 않게 빠르게 지나치는 몇 대의 자동차들이 이른 아침 자신보다 빠르게 앞질러 스치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발걸음을 기계에 비교, 지적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이내 뒤떨어져 지치고 만다.

그러나 아쉬움을 암시하는 광경도 잠시 또다시 열심히 아스팔트로 포장된 가로수 시골길을 걷는다.

걸어가면서 뒤로 나무가 스쳐 지나가고 플라타나스 나무의 넓적한 잎으로 햇살이 쏟아져 번지고 자동차가 스쳐 멀어져 간다.

비교적 편안한 아침, 걷기를 끝낸 시인은 떠오르는 햇살을 품고 있어 고무적이라는 생각으로 그 이후의 시간을 상상해본다.

세수와 간소한 식사로 조식을 끝내고 원고지 앞에 앉아 펜을 잡고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상되건대 시인은 시로써 오로지 살아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시가 인생의 전부가 되는 길임을 무욕함으로 알고 있었을 터이다.

시인이라는 직업의 명칭보다 그야말로 삶에서 생을 잇는 소신을 넘어 분신으로 여기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애끓는 마음이 간절하도록 연속돼 작품을 산소호흡기처럼 껴안고 호흡하고 있었을까? 뚜렷하게 각인돼 진다.

다음은 시인의 대표적인 시 역(驛)이다. 살펴 분석해보기로 한다.

푸른 불 시그널이 꽃처럼 어리는

여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

-역(驛-의 전문이다. 분위기는 어느 조그마한 행정구역 소재에 위치한 간이역쯤으로 보인다.

어디를 가려는지 눈이 오고 비가 오는 겨울의 간이 역 주변에 밝히는 푸른 불빛 시그널이 꽃처럼 비추고 있는 모습을 포착하고 가라앉은 마음을 시편으로 펼치고 있다.

쓰고 있는 시그널(Signal)은 어떤 일이 생기거나 생길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이지만 일정하게 들려오는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맞춰 반짝이는 불빛으로 철도의 신호주(信號柱)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간혹 어떤 부호, 소리, 몸짓, 표시 등을 뜻하기도 하지만 간이역을 비추고 있는 불빛을 겨울의 꽃으로 비유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은 전복되고 인화돼 간다.

역 안의 풍경은 이따금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가는 다소 쓸쓸한 모습들을 바라다보며 앉아 기댈 의자 하나 없는 것으로 쓸쓸함을 배가시켜 한층 외로움으로 묘사, 극대화한다.

다음의 시어에서 시인의 심상이 잘 드러난다.

‘불빛’, ‘대합실’, ‘빈 의자’, ‘급행열차’, ‘기적소리’, ‘눈’, ‘선로’, ‘역’ 그리고 ‘내가’라고 하는 자신의 처지를 눈앞에 펼쳐져 보이는 공간적 대상에 비교해 겨울의 쓸쓸한 역내를 자신과 함께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인은 ‘기적소리’와 텅 ‘빈 대합실’ 그리고 ‘빈 의자’ 등에서 허전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어디론가 떠나가려는 자신과 기적소리 함께 멀어져가는 기차를 극대화함으로써 떠남을 견지한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남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게 되는 간이역의 분위기가 순간 자신과 닮아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어지럽게 울리는 기적소리 또한 복잡하고 다난한 자신과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비유, 이를 정직하게 받아들여 바라보이는 대상들과 일치감을 투명하도록 드러낸다.

이어 아득한 선로 위 있는 듯 없는 듯 거기 조그마한 역처럼 내가 있다는 부분에서도 아득한 선로를 긴 인생의 여정을 끌어들여 의인화한다.

이는 자신의 애환 섞인 삶의 여정을 귀결시키고 머나먼 허정한 길을 병치시켜 마치 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있어 모습을 섬섬하게 불러 세운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려 그들을 싣고 떠나는 기차와 홀로된 자신의 처지가 간이역처럼 오버랩돼 간이역과 같은 자신도 거기에 서 있는 것으로 외로움을 풀어놓고 있다.

다만 이별이란 시어는 어디에도 선택하지 않고 있어 외롭고 쓸쓸한 상황에 그치고 있는 어느 조그마한 간이 역의 겨울 풍경을 아주 오래된 한 장의 사진처럼 여운을 남기고 있어 다행일지 모른다.

어느 시골 간이역과 자신이 처한 심정을 연결하고 병치시킨 시편이지만 바라뵈는 시각적 메시지의 효과성과 느껴지는 결정적 감흥의 결론을 겨울 한복판 간이역에 머물러 애상에 젖은 자신에게 물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1952년 문예잡지 ‘문예’에 실린 그의 초기작품이지만 대표작으로 시비에 새겨져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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