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사색을 통한 구도자적 경이로움
명상과 사색을 통한 구도자적 경이로움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09.02 1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학평론] 시인 한성기, 둑길에서 우수(憂受) 젖는 희구(希求) (종)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정류소’라는 작품을 읽어본다.

-정류소-

버즘나무 밑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門을 닫아

버린

점포

우수수

머리 위로 가랑잎을

휩쓰는

바람

소리

버스가 오는 대도

손을 들지

않았다.

아까부터 가랑잎을

휩쓰는

바람

소리

그 소리를 엿들으며

그냥 나는

있었다.

1960년대 중반 40대 초반의 한성기 시인,

‘정류소’란 작품의 전문이다. 늘 관조의 대상으로 자연 속에서 걷기와 사색을 통해 바람을 음미하며 이상을 그려낸 초심이야말로 구도의 정신에 일관해 경이로움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하는 달관의 시인이 그려내는 순간적인 한 편의 시다.

온통 몇십 년을 외로움과 고독과 신병을 극복하기 위해 걸어왔던 머나먼 길에서 오늘도 어디를 가려는지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바람이 말을 한다. 머리채가 휘날리고 살갗이 바람 소리에 이는 가랑잎을 보고 마음속으로 말을 건넨다.

병들어 낡은 마른 장작 같은 육신일망정 툭 터진 도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시야를 정복하는 바람과 낙엽이 휩쓸리는 순간이 눈길을 잡아끌어 상황과 분위기에 접하게 된다.

여름내 초록의 빛으로 살아나 뜨거운 태양 빛을 쪼이다가 늦가을 잎을 떨구며 길가에 한 줌의 흙빛으로 뒹굴다가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을 보고 무정한 세월과 함께한 아픔을 뒤돌아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무엇하나 허투루 보고 쉽게 넘기는 법이 없어 오랜 기간을 걸으며 가까이에서 사물들을 다듬어 눈에 깊었던 생명들이 아련하게 보인다.

보이는 것, 건네오는 것 모든 말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여 흐르는 물체들에 대해 보고, 듣고 마음이 동요되도록 감동한다.

시인은 나약한 자신의 시선 속으로 덤벼들어 눌러앉는 현상들을 참을 도리가 없어 그대로 서서 광경을 보며 생각에 잠겨 울컥 가슴이 저며 옴을 오래도록 체감하고 있다.

‘정류소’의 작품을 간략히 훑어본다.

시인은 어디를 가려는지 ‘나무 밑 버스 정유소에서 버스를 한참을 기다렸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과거형으로 체험 후의 글이다.

어디를 가는지 알 길은 없으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앉아 기다릴 곳도 없게 가게 문(門)을 닫아버린 점포 앞에 서 있는 중이다.

그렇게 서 있자니 우수수 머리 위로 가랑잎은 떨어져 땅바닥에 일고 머리채를 휩쓰는 바람 소리에 감정이 몰입돼 어떤 느낌을 감지하게 된다.

어떤 느낌을 감지했을까?

병든 육신의 눈빛과 두 발로 먼 길들을 걷기만 했을 뿐 제대로 바깥(도회지)에 안주하지 못했던 자신은 흐르는 세월과 계절변화에서 오는 자연의 변화에 허무한 무상함을 가슴 깊이 통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가야 할 곳이 있어 집 밖을 나왔지만버스가 오는데도 손을 들지 않으며 버스에 오르지 않고 가야 할 곳을 포기하고 만다.

그야말로 시인다운 고매한 정신과 행동으로 잠시 가려던 길을 접고 자연에 이는 섭리와 자신의 마음속 변화에 공감돼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아까부터 가랑잎을 휩쓰는 바람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그냥 나는 서 있었다’ 해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서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냥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까부터 가랑잎을 휩쓰는 바람 소리 엿들으며 서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인의 예민한 감성이 잘 묻어난다.

바람은 눈에 보이진 않으나 사물을 움직이게 해 바라보는 화자의 변화와 표정들을 읽히게 해 그냥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일고 있는 감정의 변화에도 동시에 알레고리가 움직여지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정류소’라는 시인의 이 시에서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단서는 한성기 시인의 모든 작품성과 인간성을 아우르는 작가정신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서다.

어디를 가야 하는 길에 버스를 기다리다 감성을 흔드는 자연물에 몰입돼 가야 할 곳을 포기하고 돌아와 작품을 짓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가치 있고, 보다 더 아름답고, 보다 더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시인의 머나먼 길과 사명에 충실하도록 삶의 구도를 그려내고 있어 훌륭하게 그의 삶이 내비치기 때문이다.

이렇듯 주옥같은 시편을 남긴 한성기 시인은 1950년대에 현대문학이라는 권위 있는 문학지에 최초로 등단해 대전의 문인들에게 존경과 더불어 부러움을 사며 선구자적인 모습을 마지막까지 일관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살아생전 걷기를 통해 이룩하고 획득한 작품들을 상위에 개략적으로 간단히 언급했으나 약력을 통해 자세히 확대해 살펴본다.

1923년 4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 광덕면 장동리 82번지에서 출생

1952년 ‘문예지’ 5·6월 합병호에 ‘역’ 게재

1955년 ‘현대문학’ 4월호에 ‘아이들’, ‘꽃병’ 게재

1963년 첫 시집 ‘산에서’(배영사) 간행

1965년 제9회 충청남도 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969년 제2시집 ‘낙향이후’(활문사) 간행

1972년 제3시집 ‘실향’(失鄕)(현대문학사) 간행

1974년 ‘현대문학’ ‘현대시학’ 추천심사위원(~1984)

1975년 제4시집 ‘구암리’(호서출판사) 간행

1975년 한국문학상 수상

1979년 제5시집 ‘늦바람’(활문사) 간행

1982년 시선집 ‘낙향이후’(현대문학사) 간행

1983년엔 제1회 조연현 문학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상하고 이듬해인 1984년 4월 17일 당시 61세에 뇌출혈로 영원히 펜을 내려놓게 된다.

살아생전 병마와 시달리면서도 잠시도 쉬지 않고 끝없는 길을 걸으며 척박했던 문학 밭을 일궈 꾸준하게 시(詩) 창작에 매달려 발표한 시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역’(驛)(문예. 1952년 5월6일)을 시작으로 ‘병후’(病後)(문예. 1953년 3월9일), ‘도시’(都市)(문학예술. 1955년 8월), ‘아이들’(현대문학. 1955년 4월), ‘꽃병’(현대문학. 1955년 4월), ‘차중에서’(현대문학. 1955년 7월), ‘새벽’(현대문학. 1955년 12월), ‘길’(문학예술. 1956년 4월), ‘비는 멎지 않고’ (문학예술. 1956년 11월), ‘길’(현대문학. 1956년 11월), ‘얼굴’(현대문학. 1957년 3월), ‘무덤’(문학예술. 1957년 3월), ‘가을이 되어’(현대시. 1957년 10월), ‘물소리’(현대문학. 1958년 10월), ‘꽃병’(사상계. 1959년 3월), ‘밤’(현대문학. 1959년 3월) 등이 있다.

여기까지가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학(시)사에 횃불을 밝혀 여명기를 트는 1950년대 작품들이다.

이어 ‘나무’(현대문학. 1960년 5월), ‘꽃밭에서’(사상계. 1960년 8월), ‘열매’(현대문학. 1962년 11월), ‘낙화’(사상계. 1963년 2월), ‘가을’(현대문학. 1963년 6월), ‘이맘쯤에서 바라볼 뿐’(현대문학. 1964년 3월), ‘낙화’(문학춘추. 1964년 7월), ‘산방’(山房)(현대문학. 1966년 4월), ‘시골에서’(현대문학. 1967년 11월), ‘산’(현대문학. 1968년 7월), ‘4월’(현대문학. 1968년 8월), ‘비’(신동아. 1968년 9월), ‘시골에게’(월간문학. 1969년 2월), ‘기도’(祈禱)(현대문학. 1969년 4월), ‘새’(현대문학. 1969년 8월), ‘산’(현대문학. 1969년 8월), ‘초점’(현대문학. 1969년 8월), ‘시야’(현대문학. 1969년 8월) 등을 발표한다.

한성기 시인에게 둑길은 삶을 이어가는 구조적 공간으로 실존을 연장하는 이정표였다.
한성기 시인에게 둑길은 삶을 이어가는 구조적 공간으로 실존을 연장하는 이정표였다.

시인의 1960년대 시기는 그야말로 가난과 외로움의 극치에서 병마와 싸우는 자신을 껴안고 이곳저곳을 유랑(流浪)하듯 바람이 알려주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돌면서 글쓰기에 사력을 다한다.

‘새’(현대문학. 1970년 3월), ‘나무옆에서’(현대문학 1970년 3월, ‘동행’(현대문학. 1970년 3월), ‘정류소’(현대문학. 1970년 3월), ‘눈’(현대시학. 1970년 4월), ‘기도’(월간문학. 1970년 7월), ‘코스모스’(현대문학. 1971년 2월), ‘산2’(현대문학. 1971년 2월), ‘달여울2’(현대문학. 1972년 2월), ‘하현’(下弦)(월간문학. 1971년 4월), ‘둑길’(현대시학. 1971년 9월), ‘둑길’(시문학. 1972년 2월), ‘처방’(處方)(현대문학. 1972년 3월), ‘둑길2’(현대문학. 1972년 3월), ‘새’(시문학. 1972년 8월), ‘모두 말이 없었지’(월간문학. 1972년 10월), ‘영’(嶺)(문학사상. 1972년 11월), ‘낮잠’(시문학. 1973년 12월), ‘결정’(決定)(현대시학. 1973년 5월), ‘한기’(寒氣)(1973년 5월), ‘꽃’(시문학. 1973. 12월), ‘새치’(월간문학. 1974년 2월), ‘다리를 사이에 두고’(현대문학. 1974년 4월), ‘모일’(某日)(현대문학. 1974년 6월), ‘3월’(월간문학. 1974년 6월), ‘산’(山)(현대시학. 1974년 9월), ‘지구’(地球)(현대문학. 1974년 10월), ‘차단’(遮斷)(현대문학. 1975년 2월), ‘신록’(新綠)(현대시학. 1975년 4월), ‘산’(山)(월간문학. 1975년 5월), ‘새와 둑길’(월간문학. 1975년 11월), ‘어느 겨울’(현대문학. 1976년 5월), ‘영2(嶺)(현대문학. 1976 5월), ‘새’(시문학. 1976년 6월), ‘초겨울’(현대시학. 1976년 7월), ‘바람이 맛이 있어요’(월간문학. 1976년 9월) 등을 선보인다.

이때가 시인이 걸어오던 궤적에서 절정기를 이르는 작품들로 자연과 자신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문학적 영감(靈感)으로 고도의 하이테크한 작품들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인은 대표적인 시 ‘역(驛)’에서처럼 자신의 표현대로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조그마한 역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버리며 끝없이 점철된 발자국을 헤아리며 고뇌한다.

함흥 정평에서 태어나 대전사범학교로 교사로 부임하면서 충남 당진, 충북 영동, 추풍령, 조치원, 유성, 예산, 안흥(태안), 진잠 등 대전의 변방에 머물며 산길, 들길, 바닷길의 모든 길을 걸어왔다.

마치 길지 않은 혼돈의 시대에 마주한 시선들이 머물러 정체된 발길들은 다양한 아픔들이 혼재돼 주체할 수 없는 고통과 설움의 통한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있어 역력하다.

시에서 나타나는 작품들 대부분은 한결같이 걷기라는 수단적 방법을 통해 이를 실천한 흔적을 알 수 있으며 고단한 일상에서 빚어지는 자신의 삶 속 방향과 마주하고 있었음이 잘 묻어난다.

그 끝없는 길을 따라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윽했을 눈빛은 시인의 가슴 속 열림과 닫힘을 통해 서정의 아름다움을 맺는 결과물들로 오늘날까지 우리들에게 폭넓은 감동을 주며 심금을 울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