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맞이 풍습
설맞이 풍습
  • 류환 전문기자
  • 승인 2021.12.27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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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예의와 도리 깃든 선현의 설맞이 돌아봤으면…
겨울의 소소한 풍경, 류환 작.
겨울의 소소한 풍경, 류환 작.

[대전=뉴스봄] 류환 전문기자 = 이번 주는 연말인 동시에 연시다.

대선을 70여일 남짓 앞두고 올해도 어느 해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한해였다.

이도 갱신인 듯 3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바이러스와 전쟁 중인 것을 비롯해 이것저것 우왕좌왕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신축년(辛丑年)이었다.

누구나 묵은해를 보내고 신년(壬寅年)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지난날들을 뒤돌아 구태의연했던 지난 시간을 잊고자 하고 새로운 설계를 하며 새해를 맞지만 내 일이 아니어서 잊혀가는 줄도 모르게 어느새 까맣게 멀어져 아쉬움이 큰 것도 많다.

그중 우리 고유의 민속 세시풍습으로 이어오던 신년의 설맞이가 그렇게 퇴색돼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어 대표적이다.

이맘때가 되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송년과 신년이란 명목으로 어울려 먹고, 마시고, 노는 모습이 여러 곳에서 며칠간 계속돼 그야말로 대목이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 또한 현대사회와 코로나를 핑계로 이도 저도 아니게 흐지부지돼가고 있다.

사실 지난 시절에는 시간 낭비, 경제적 부담, 건강 저하 등의 손실을 의식하면서도 빠지거나 이를 치르지 않으면 서운해서 어쩔 수 없이 분위기에 취하던 것이 사회의 통념으로 돼있었다.

그러나 잠시 흥겹던 시절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은 먼 훗날의 아마득한 이야기가 돼버렸다.

이럴 때 우리의 선조들은 저물어 가는 해를 보내며 다가오는 신년에 어떻게 설맞이를 했는지 잊혀가고 있는 과거를 뒤돌아본다.

조상들의 설맞이는 궁중(宮中)과 사인(士人)과 일반 백성의 셋으로 나눠 있어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궁중(宮中)에서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때부터 시작으로 왕은 신년이 돌아오면 직접 조신들을 거느리고 옥황상제께 풍년을 비는 기곡제(祈穀祭)를 지냈으며 이어서 사방배(四方拜)를 한 다음 일월신께도 제례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신라 때에는 매년 왕의 주도하에 이뤄진 듯하다가 고려조에 들어서는 기록이 충분하지 못해 알 도리가 없지만 세월지나 이씨 왕조에 들어서는 기곡제, 사방배, 일월신께 드리는 다례는 물론 종묘(宗廟)와 영령전(永寜殿)에도 다례를 올리게 된다.

정2품 이상의 조신들은 이러한 행사에 왕을 모시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의식을 치르는데 정성을 다한다.

동지세수의 풍습의 동지팥죽, 올해는 지난 22일이 일양이 시생하는 동지였다.

사인(士人)들

고을마다 그 고을을 행세하는 선비들이 모여서 이른 새벽에 보목반시(報本反始)의 의식을 올린다.

보목반시수(報本反始穗)는 하느님을 비롯한 천지신명들께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과 나라(임금)와 조상들께서 받들어주신 공덕에 감사하는 의식의 하나였다.

천지신명에는 다례를 올리고 임금이 있는 서울을 향해서 망배(望拜)를 올렸으며 조상들에는 각자 다례를 올렸다.

보본이란 우주와 만물의 근원인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며 반시란 이 몸의 근원인 나라와 조상께 감사를 드린다는 의미로 옛 어른들은 나라가 곧 임금이라 생각해 임금이 계신 서울을 향해서 망배를 했다.

그러나 사인들은 그냥 설날을 맞는 것이 아니라 섣달그믐날 목욕제계(沐浴齌戒)하고 자세를 단정히 하고 앉아서 뜬 눈으로 설날을 맞이했다니 상상만으로도 모습은 엄숙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요한 것은 설날을 맞는 시간으로 우리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른들은 섣달그믐날 밤 12시에 1년이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새해가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음력을 쓰던 옛날에는 자시초(子時初)가 돼야 날과 달과 해가 바뀌는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자시초는 지금의 시간으로 밤 11시, 자시정(子時正) 또는 자정(子正)은 밤 12시, 자시말(子時末)은 새벽 1시로 날이나 해가 양력을 쓰는 현재보다는 1시간 먼저 곧 밤 11시에 바뀐다는 것을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백성들

일반 백성들은 섣달그믐날을 까치설이라 해 어린아이들에게 까치설빔을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

곧 섣달그믐날 아이들에게 까치저고리와 까치설빔을 한 아이들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가서 묵은 세배를 하는 것이 예사였으며 어른들은 연세 높은 동네 어른에게 지난 1년 동안 돌보심에 감사하는 뜻으로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예의였다.

설빔(식구 모두)은 차례 음식, 설음식을 등을 준비해 설날 일찍 조상 혼령들께 차례를 지내고 준비한 음식을 음복했으며 설음식으론 주로 떡만두를 준비하는 것이 일례였다.

음식이 끝나면 세배가 시작된다. 세배는 웃어른과 손위 항렬에게 빠짐없이 올리도록 했으며 직계조는 물론 형제간, 숙질간 모두 세시일배 하는 것이 통상관례로 집에서 세배가 끝나면 이웃 어른에 세배를 다니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인들의 설맞이는 많이 변해 사라지게 됐으나 일반의 설맞이는 큰 변화 없이 시골에서는 지켜지고 있는데 비해 도시인들에게는 별 의미를 두지 않게 됐다.

도시인들과 공무원, 회사원, 청소년들의 설맞이

도시생활을 하는 공무원들과 회사원들은 언제부터인가 송년, 신년 모임이란 이름으로 입추의 여지 없이 밤거리를 가득 메운 남녀들의 인파 속을 누비며 식당가와 술집을 돌며 송구영신하는 남녀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뒤돌아볼 때 목욕제계 한 후 정좌하고 앉아서 명상하며 은공을 빌고 조상의 공덕을 기리시던 선현들의 설맞이와 현대인들을 비교한다면 시간이 흘러 생활 습관과 방법 그리고 가치관이 바뀌어 가는 현대사회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어 변명이 아니라 무리수라 지적하는 이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이 진지하고 값진 여로가 돼야 함은 당연할 것인데 과연 어디에서 예의를 배우며 무엇으로 인간의 도리를 찾을 것인지 모두는 선현들이 맞던 설맞이를 돌아보는 시간을 잠시라도 갖는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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