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한국사, 3·8 민주의거가 남긴 교훈
잊혀진 한국사, 3·8 민주의거가 남긴 교훈
  • 육군영 기자
  • 승인 2022.03.08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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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와 투표는 하나의 절차나 통과점에 지나지 않아
시민에겐 감시하며 올바른 방향 제시 하는 의무있어
1960년 4월 19일 서울 숭례문 앞에서 자유당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걷는 시민들.
1960년 4월19일 서울 숭례문 앞에서 시민 수천여명이 자유당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대전=뉴스봄] 육군영 기자 = 필자는 4·19혁명을 교과서의 한 단락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1960년 대구 2·28과 대전 3·8 그리고 마산 3·15 의거가 없었다면, 또는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거나 이에 침묵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날의 모습과 많이 다를지 모르는 일이다.

흥미로운 점은 앞서 언급된 4·19혁명의 점화선은 모두 고등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됐다는 점이다. 3·8 민주의거에 참여한 최우영 유공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은 학생회와 학생 간부를 중심으로 점조직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집권 여당의 감시를 피해 궐기가 가능한 유일한 조직이었다고 한다.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자유당 정권은 미국에서 보내는 원조금을 횡령하는 등 부패가 극에 달했다. 이들은 부산정치파동을 비롯해 사사오입 개헌, 대구매일신문피습사건, 진보당사건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부정을 저질렀는데 원인은 대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하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조직체계를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대구 경북고를 중심으로 2·28 의거에 이어 일어난 대전에서도 대전고의 학생 간부인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의거를 준비한다.

대전고등학교 3·8 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된 기념사진.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대전고등학교 3·8 민주의거 유공자들이 촬영한 기념사진. 왼쪽부터 최우영, 인창원, 박장언 유공자.

당시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일요일에 모든 학생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한 상황이었는데 대전에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이 3월8일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선거연설회를 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대전고 학생들은 이를 목표로 시위를 준비한다.

당일 정보가 유출되면서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 교장의 사택에 연금되는 문제도 있었으나 점심시간에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탈출해 학교로 돌아왔다. 이들은 교내에 사발통문을 돌려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니 그 참여한 인원이 300여명이 넘었으며 갈수록 세가 불어났다. 이들은 5교시 시작종에 맞춰 교문을 부수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이들의 시위는 평화적이었으나 경찰은 학생들을 향해 경찰차를 돌진시키고 경찰봉과 총으로 이들을 강경 진압했다. 이로 인해 학생 80여명이 끌려갔고 남은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연좌농성을 이어갔다. 시위는 다른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동아일보 3월 9일자 보도.
동아일보 3월9일자 보도.

학생들의 저항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주요 일간지는 3·8의거를 일제히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는데 대전일보의 3월11일자 ‘이날의 학교표정’이라는 기사에는 당시 학생들의 모습이 남아있다. 같은 해 발행된 ‘4월혁명 투쟁사’에도 ‘대전학생 데모사건’으로 수록됐다.

3·8 민주의거의 기록은 대부분 살아있는 유공자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중심으로 기록돼 있다. 그날의 열정적인 학생들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됐다. 이들은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워했다.

3·8 민주의거 62주년을 기념해 교훈을 찾는 과정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입헌 민주주의를 돌아본다.

대선 후보들은 표를 얻기 위해 가능성 없는 선심성 공약과 상대 후보자에 대한 유언비어를 살포한다. 정권은 정치논리가 최우선이고 당에는 해묵은 감정을 앞세워 편을 갈라 논쟁을 벌인다.

민생 현안에 관련된 법률은 국회에서 계류돼 심의받지 못하고 있으나 사회적 이슈가 되는 법안은 날치기로 통과시킨 뒤 문제가 발생하면 적당한 개선안을 만들어 땜질로 해결하는 것이 악습으로 굳어졌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 정치 지도자들은 이 누구 하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으며 선심성 공약을 내세워 지지율을 확보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3.8 민주의거 최우영 유공자.
3.8 민주의거 최우영 유공자.

이같은 정치인들의 도덕적 해이는 국민의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선발한 훌륭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전능한 인물은 아니다. 선거와 투표는 하나의 절차나 통과점에 지나지 않으며 이후에도 시민에게는 이를 지켜보고 감시하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3·8 민주의거는 고등학생들이 앞장서서 궐기했지만 실제로는 온 시민의 저항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패한 정권으로부터 민심의 이반은 이미 극에 달한 상태였고 결국 자유당의 독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이나 유관순 열사가 그러했듯 이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침묵과 무지를 깨고 뜨거운 가슴과 관심을 통해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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